12월1일을 ‘HIV/AIDS감염인 인권의 날’로 만듭시다 : “병보다 무서운 것은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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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이 날을 감염인을 배제한 채 ‘에이즈 예방의 날’로 임의 해석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채워 왔다. 이에 한국에서는 감염인의 인권을 증진하는 것이 곧 예방의 지름길이라는 주장을 내걸고 보건의료, 인권, 성소수자단체들이 함께 12월 1일을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로 선포해 인권주간을 준비해 왔다.

매년 정부 행사장 앞에서 기자회견 및 집회, 토론회, 문화제,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으로 HIV/AIDS 감염인의 인권 보장을 위한 행사를 열었다. 이들을 통해 감염인의 인권 현실을 드러낼 수 있었고, 정부에서도 감염인 단체와 소통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였다.

에이즈의 날에 보건의료인에게 에이즈 예방 상주기 행사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HIV/AIDS 감염이 발생한 지 25년째, 인권주간 운동을 한지 올해로 5년째이다. 그간 많은 활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차별, 지원예산삭감, 의약품 문제, 에이즈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 등 감염인을 둘러싼 현실은 아직도 차갑다.

“Positive Rights” (1회 인권주간 기조)

감염인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것이 가장 큰 예방책이라는 것이 이미 서구의 사례들에서 나타나고 있고, 에이즈 문제를 공론화해 적극적으로 예방, 교육하고 감염인에 대한 지원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다.

사회의 편견은 감연인에게 낙인으로 내면화되고, 인권 침해를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일부 감염인의 일탈을 조장, 이는 다시 인권 침해를 강화하는 악순환만 반복될 뿐이다. 익명 검사를 받을 수 있고 감염 여부의 비밀 보장이 잘 이루어진다면, 더 자발적이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다.

가족과 지인에게 감염 사실을 알리고도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더 적극적으로 치료와 재활에 임할 수 있다. 감염 사실을 밝혔을 때 받는 진료 거부가 없어져야, 감염인은 감 염사실을 스스럼없이 밝히고 의료인은 보호 장비를 구비하는, 상호 협조적인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다. 감염인의 인권과 비감염인의 감염되지 않을 권리는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AIDS가 발병했을 때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은 수혈 감염이 문제가 되자 동성애자의 헌혈을 금지하고, 병의 원인과 전파 경로를 모르니 예방법을 섣불리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정부가 병의 심각성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을 주저한 것이다. 정부의 미봉적인 초기 대응으로 질병에 대한 공포는 감염인에 대한 낙인으로, 이는 다시 동성애자와 마약사용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로 이어져 인권 침해가 자행됐다.

HIV 바이러스는 1983년 이미 발견되었지만 HIV 항체검사가 상용화된 것은 1985년 3월에 이르러서였다. 1987년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 AZT(azidotimidine)가 미국 식품의약국에 의해 공인됐지만, HIV 감염인들 중에서 AIDS 발병 사례가 줄어들고 AIDS로 인한 사망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5년에 들어서다.

1985년 타액의 바이러스 농도는 낮기 때문에 감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보고됐지만, 1994년 HIV 감염 여성의 치과 치료를 거부한 치과 의사에게 패소 판결이 나기 전까지 감염인들은 치과를 포함한 의료 기관 이용이 어려웠다.

그동안, 편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에이즈가 동성애를 포함한 성적 타락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는 인식을 퍼뜨렸고, 재난이나 괴질이 발생했을 때 희생양을 찾음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하는 전근대적 관행은 감염인에게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는 도덕적 멍에를 지웠다.

“인권을 말한 법도 한뎁Show” (2회 인권주간 기조)

결국 특정 집단에의 낙인과 피해자에 대한 책임 전가로 일관한 미 정부의 초기대응이 에이즈의 예방에도, 치료에도 실패하고 그 사이 감염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감염인에 대한 인권 침해는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재현됐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 정부는 1985년 국내에서 첫 HIV 감염인이 보고된 이후 유례없이 신속하게 1987년 11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을 제정했다.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현재는 많이 개선됐다고 하나, 초안에 있었던 HIV감염인에 대한 강제 격리와 진료 받을 수 있는 병원의 제한,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강제 검진, 전염가능 성행위에 대한 징벌적 조항 등은 과도한 공포와 혐오감을 조장하는 방식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감염인 단체와 인권단체가 꾸준히 문제제기 해왔던 외국인에 대한 강제 에이즈 검사와 입국금지, 강제 출국 조항은 2009년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권고가 있은 다음에야 올해 9월 ‘출입국관리법’, 11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의 일부 조항이 개정되면서 개선됐다. 그러나 입국 시 HIV 정량검사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조항은 삭제됐지만, 아직 입국금지, 강제퇴거 조항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편견의 확산에는 언론도 큰 역할을 해왔다. 1982년 미국의 괴질에 대한 첫 보도 이후 2005년까지의 3대 일간지의 기사 1600건을 분석 한 바에 따르면, 환자 발생과 관련한 단순사실 보도 및 HIV/AIDS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기사가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며, 5.3%만이 감염인의 인권에 대해 다루고 있을 뿐이다.

정말 예방을 원한다면 질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편견을 불식시킬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 정부지만, 정부 역시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대국민 ‘홍보’에만 급급했다. 이러한 ‘홍보’는 예방에 도움이 안 됐을 뿐 아니라 오히려 편견을 더 확산시키는데 일조했을 뿐이다.

최근 부산의 한 10대 지적장애 여성이 HIV에 감염된 후 가출, 성매매를 한 사실을 두고서도 언론은 ‘무차별’, ‘충격’, ‘유인’, ‘경악’, ‘부산이 떤다’, ‘부산이 발칵’ 등 선정적인 표현으로 온 국민을 에이즈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는 일반 국민의 편견과 차별은 부추기고, 에이즈에 대한 올바른 예방보다는 무지각한 공포만을 조장할 뿐이다.

“날은 춥고 인권은 멀고” (4회 인권주간 기조)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희망 미래대비예산’이라 말하는 2011년 보건복지부 예산 계획안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를 2만7000명 감소시키고 생계급여 예산 32억 원을 삭감했다. 의료급여 수급권자도 2007년 197만8000명에서 2011년 172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에이즈 정책과 지원을 총괄하고 있는 질병관리본부 예산도 다른 복지 예산과 다르지 않다. 2010년 예산 41억3200만 원은 2011년도에 43억3200만 원이 되었다. 2억이 증가된 내년도 예산은 상담간호사 인건비의 증가분이며, 나머지 예산안은 작년 예산안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한 것이다.

감염인 관련 정책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나 감염인들의 구체적인 수요나 요구에 대한 반영이 전혀 안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2009년도 질병관리본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에이즈 감염인 수는 6680명으로 2006년 4년 전에 비해 74% 증가했으나 예산은 4년째 41억 원으로, 사실상 올해까지 5년째 예산이 삭감된 것이라 볼 수 있다.

HIV/AIDS 감염인은 가족과 직장, 지인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많고(절반 이상이 실직 상태라는 조사가 있다.) 몸의 상태가 악화되면 일 자체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HIV/AIDS 감염인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고 있다. 아프고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에 감염인에게 쉼터와 요양 시설, 간병 지원이나 재가요양지원은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하지만 정부에서 운영하는 요양 시설은 1곳, 쉼터 2곳으로 감염인의 숫자 대비 턱없이 부족하다.

올해 질병관리본부는 ‘치과에서 일상적 HIV 검사 체계 개발 및 시범 운영’과 관련한 연구용역사업을 무리하게 진행하려다 인권·시민사회의 반발에 부딪쳤다. 이 연구는 감염인 조기 색출이라는 질병관리본부의 목표와 의료인의 교차 감염을 방지하고, 치과 병원의 새로운 수익모델이 될 것이라는 대한치과감염학회의 ‘포부’ 아래 진행된 것이다. 국정감사에서 ‘질병차별본부’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종구 질병관리본부장은 이 사업을 전면 백지화 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 예산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어디에 쓰이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에이즈 감염인입니다.” (2010 5회 인권주간 기조)

올해의 인권주간 기조는 ‘나는 에이즈 감염인입니다’이다. HIV/AIDS 감염인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배제, 치료접근권 등의 문제는 이 땅을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겪을 수 있으며. 그래서 감염인들의 인권은 곧 우리 사회의 지표이자 우리 모두의 인권이다.

HIV/AIDS 감염인의 존재는 질병의 위험이라는 은유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소수성을 발견하고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이 사회의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모든 사람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와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HIV/AIDS 감염인 뿐만 아니라 비감염인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명제이다. 감염인과 비감염인이라는 경계 구분을 넘어 인간다운 삶의 권리(인권이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를 위해 같이 연대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에이즈 감염인입니다’라는 선언적 의미는 또한 희망과 기원이다. 내가 에이즈 감염인이라고 언제쯤 편하게 이야기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감염인들이 편견과 냉대없이 함께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모두가 이 말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을 기원한다.

“나는 에이즈 감염인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 후대에게 에이즈 없는 건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
“나는 에이즈 감염인입니다. 나는 차별과 편견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에이즈 감염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감염이 될 수 있고 그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 (거리 켐페인에서 시민들에게 받은 엽서의 내용들)

/윤정원 의사·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