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노사관계 16강 동반진출을
최근 정부와 언론은 일상적인 임단투를 진행하고 있는 보건의료노조와 민주노총을 겨냥해 월드컵을 볼모로 집단이기주의적 요구를 관철하려는 ‘반이성적’, ‘반사회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며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작년에는 “이 가뭄에 웬 파업”이냐고 가뭄(?)까지 동원하더니 올해는 “월드컵에 웬 파업”이냐는 것이다.
나는 보건의료노조와 민주노총의 요구 관철이 월드컵 성공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요구를 수용하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모든 국민의 소박한 바람인 ‘월드컵 성공, 16강 진출’과 노조의 요구 관철이 함께 이루어질 수 없는 제로섬 관계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월드컵 성공을 위해 노동자는 투쟁을 포기하고 스스로 요구를 접어야 하는 것인가? 오히려 월드컵을 개최하는 나라답게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노동기본권과 사회복지’를 위해 노조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는 것이 정부와 노동자 모두가 함께 승리하는 길이 아닌가? 월드컵과 노조의 요구는 어느 하나를 버리고 어느 하나를 택하는 ‘선택의 문제’도 ‘선-후 문제’도 아닌 함께 풀어가야 할 현안인 것이다.
나는 정부와 대다수 언론이 월드컵 16강에 쏟는 그 정성의 16분의 1, 아니 160분의 1만이라도 노조의 요구에 귀기울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노사관계 국제경쟁력은 세계 49개국 중 46위, 공무원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몇 안되는 나라,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국민의 정부 동안 노조활동으로 인한 구속노동자 수 751명, 정부 예산 중에 보건의료예산 0.3%, 보건의료수준 58위, 삶의 질 수준은 94위, 사회보장, 복지 재정규모는 적정치의 22%에 불과 … 등, 이런 현실에서 월드컵을 맞아 내부의 요구는 억누르면서, 외국 손님 접대를 위해 경기장 짓고, 길 닦고, 분 바르고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열리는 월드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부고객 만족 없이 외부고객 만족 없는’ 것이거늘.
‘무분규 월드컵’, 좋은 말이다. 하지만 왜 오직 노조에만 파업 말라는 주문을 앵무새처럼 거듭하는가? 파업은 외형적으로 노조가 하지만 그것의 필요충분 요건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정부와 사용자다. 단협 개악안을 고집하고(아주대, 원광대병원 등), 파업전야제 집회 한다고 교섭을 거부하고(가톨릭 중앙의료원), 교섭 중에 노조대표에게 욕설하고 목 졸라 폭행하고(부산 대동병원), 노조 전임자 현장 순회를 감시하고, “해볼테면 해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용자(울산 동강병원)가 있는 한 ‘무분규 월드컵’은 어렵다. 대통령이 ‘무분규 월드컵’을 지시하는데 노동부, 보건복지부 등 주무부처 장관들이 노조의 교섭 요구는 외면하고 관계기관 대책회의만 여는 한, 체포·구속으로 협박하면서 파업을 막으려는 경찰과 노동부 관료가 있는 한, 몸으로 뛰면서 노조 요구 해결을 통해 노사평화를 찾기보다 전화 한 통화로 문서상의 노사평화선언을 강요하는 철없는 관료가 있는 한, 진정한 노사평화는 불가능하다.
특히 대표적 노동악법인 ‘필수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제도가 있는 한 ‘무분규 월드컵’은 어렵다. 직권중재는 매년 반복되는 병원 파업의 실질적 주범이다. 병원 사용자들은 이 법을 악용하여 항상 교섭에 성실히 임하지 않고 오히려 “파업을 하려면 하라”고 큰소리쳐 왔다. 올해도 몇몇 병원을 제외하고는 교섭이 무용지물이다. 왜냐하면 ‘노조요구 수용 거부 → 파업돌입 → 불법파업 → 고소고발 → 공권력투입 → 간부구속, 해고 → 노조 무력화’라는 환상적인(?) 시나리오가 있는데 굳이 노조와 부대끼며 교섭할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이 시나리오의 끝은 사용자의 의도(노조무력화)처럼 되지 않고 더 큰 투쟁을 불러일으켜 대립과 파국은 지속된다. 구속된 간부는 투사가 되어 돌아온다. 필수공익사업장 노조의 파업을 막으려고 만들어 놓은 이 법이 거꾸로 파업을 부추기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 법이 있는 한 단체행동권뿐만 아니라 단체교섭권 자체도 무의미해진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와 사용자는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 되어 있는 직권중재에 의존하지 말고 노조와 성실히 협상하는 것만이 ‘무분규 월드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보건의료노조는 5월23일 파업에 들어간다. 물론 요구안이 수용되면 파업은 없다. 벌써 그날 정부와 대다수 언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병원노조 파업 돌입, 의료대란, 환자 불편 예상, 불법파업, 정부 엄단방침’ 정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라고 느낄 만큼 판에 박은 레퍼토리가 반복될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노조가 왜 파업에 들어가는지 ‘왜?’라는 물음은 없는 채. 마지막으로 5월23일 이런 뉴스를 기대하면서 마무리할까 한다.
‘병원노조 파업 돌입 전 극적 타결! 매년 반복되는 파업의 원인이 된 직권중재조항 철폐하기로, 노동계 최대 쟁점이었던 주 5일제 실시, 모성보호법 개정에 따른 인력확보, 산별교섭 보장, 비정규직 정규직화, 사학연금제도 개선, 보건의료예산 확대, 병원 활성화 대책 전면 재검토, 특진제 폐지 등 의료의 공공성 강화 방안 극적 합의! 부당노동행위 병원 처벌, 타결 이후 환자진료 대책 등 월드컵 성공에 병원 노사가 함께 노력하기로 ….’
이주호/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정책국장zoo@nodo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