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정책‘전면수술’해라
〈우석균·인의협 정책실장〉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산하에 약제심사위원회가 존재한다. 한국의 약값을 정하는 중요한 위원회다. 그런데 위원회의 소비자 대표는 22명 중 단 2명뿐이다. 제약협회와 다국적 제약회사 대표 등 제약업계가 5명, 의사협회 등 의약계 단체 인사가 8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고 있는 격이다.
정부는 올해 사회보험 재정을 절감하겠다며 여러 가지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먼저 보험일수를 365일로 제한했다. 이제 만성병 환자들은 감기에 걸려서도 안되고 사고가 나서도 안된다. 정부는 더 나아가 의료보호 환자의 하루 식비 1,900원을 아끼기 위해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의료보호 환자들을 강제 퇴원시키는 ‘철의 정책’을 집행했다.
그런데 의료보호 환자의 식비를 빼앗는 이 정부가 제약회사에 하고 있는 행위는 어떠한가. 현행 약가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실거래가 제도를 보자. 정부는 1999년 11월 실거래가 제도를 도입하면서 시민단체들의 시장조사 내용보다 15~20% 부풀려진 약가를 ‘실제 거래가’로 인정했다. 약가 거품을 남겨 리베이트를 받을 생각을 하고 있는 의료기관의 신고를 토대로 ‘조사’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후 약가의 전면적인 조사는 3년 동안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값 리베이트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정부의 이러한 무능력과 무소신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실거래가 제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약들의 존재다. 이른바 ‘오리지널’ 약제이다. 염산라니티딘이라는 성분의 약품 중 오리지널 약제인 잔탁은 똑같은 성분의 다른 약보다 5~10배 비싸도 가장 많이 팔린다. 의사들이 오리지널 약제 처방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의·약분업 당시 대체 조제를 허용하기로 한 시민단체와 의·약간의 애초 합의사항은 무시됐다. ‘상품명 처방은 의사의 고유한 권리’라는, 어느 교과서에도 없는 의사협회의 주장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와서 목소리를 높이는 한나라당이 당시 가장 강력한 의협의 원군이었다는 점도 잊어선 안된다. 그 결과 현재 약값은 약제심사위원회에서 제약협회와 의·약사들이 알아서 정하고 의사는 상품명 처방권을 통해 고가의 오리지널 약제를 처방하고 있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약값을 내려야 할 어떠한 동기도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기막힌 경우도 있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혁신적 신약’의 경우 미국·스위스 등 최고 부자국가 7개국의 평균 약값을 자동적으로 따르게 돼 있다. 한국 정부는 형식적인 권한도 없다. 1999년 4월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은 주한 미 대사에게 “의약품시장 접근이 양국간 이슈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음을 알리게 되어 고무적”이라는 서신을 보낸 바 있다. 한국노바티스가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을 월 3백만~6백만원의 살인적인 가격으로 팔면서도 합법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약품 주권 포기행위가 어떤 장관에게는 고무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미국이나 스위스 국민소득의 4분 1밖에 안되는 한국의 백혈병 환자들에게는 죽음의 선고였을 뿐이다.
아이들 설사 약값을 깎아서, 절대 빈곤층 환자들의 식비를 깎아서 보험재정을 절감하겠다는 현 정부의 약품 정책은 제약회사, 특히 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들에 대한 퍼주기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이건 아니다. 의약품 정책은 총체적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경향신문 2002.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