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보건의료 모임마저 ‘이적단체’ 인가

(출처 : 한겨레 신문, 03.06.11)

보건의료 모임마저 ‘이적단체’인가

서울지법 형사21부(재판장 황찬현)가 진보적인 보건의료인들의 모임을 ‘이적 단체’로 규정하는 놀라운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진보의련)을 결성해 활동했던 현직 의대 교수에게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을 이유로 징역 10월에 자격정지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보건소 소장도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과 집유 2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보건의료 모임까지 이적단체로 판결한 것도 처음이거니와 그 ‘근거’로 든 것을 보면 한층 충격적이다. 진보의련이 강령 등에서 우리 사회를 ‘소수의 자본가가 절대 다수의 노동자를 지배·착취하는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규정한 것이 ‘이적’의 근거라면, 이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사회과학을 공부하지 말라는 ‘협박’과 다를 바 없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인 사상의 자유를 정작 사법부가 유린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국가 변란을 선전·선동”했다는 판결문은 전혀 현실과 맞지 않는다. 1995년 한 대학의 선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진보의련은 출범부터 ‘한계’를 드러내, 2001년 초에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이 진보의련 ‘조직원’들을 연행할 때 이미 사무실이 폐쇄된 상태였다. 판결이 나온 뒤 보건의료 단체연합이 성명을 내 ‘죽은 조직을 공안당국이 살려낸 꼴’이라고 비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더구나 진보의련의 보건의료인들이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던 ‘국민의 건강권’이나 ‘보건의료의 국가적 책임’은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사안들이다. 그런 모임을 권장은 못할망정 거꾸로 그들을 이적단체로 몰아세우는 법원의 모습은 사법 개혁이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를 새삼 깨우쳐준다. 시대 착오적 판결을 내린 재판부의 자성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