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연금개악반대 암스테르담 20만 대시위

대타협의 나라 네덜란드서 20만이 운집한 까닭
2일 암스테르담 대시위… 미국식 길이냐, 사회민주주적 전통이냐

장광열(jjagal55) 기자    


▲ 박물관 광장에 모여든 20만의 노동자 시민들  

ⓒ2004 장광열
네덜란드는 노조와 사용자, 정부간에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평화로운 노사관계를 근 20년간 유지해온 ‘사회 대협약’의 모범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네덜란드는 정부와 노조가 한판 격렬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우파적인 정부는 사회의 고령화에 대비하고 경제성장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사회복지정책과 노동정책 전반에 걸쳐 대폭적인 개편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고, 이에 대해 노조 측은 정부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 배수의 진을 쳤다.

목표치 10만… 20만 운집한 암스테르담 집회

노조는 지난 9월 한달간 유럽 최대의 항구도시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의 도시 총파업을 감행하는 등 파업과 시위를 지역별로 조직했다. 이어 2일 노조의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암스테르담 박물관 광장(Muzeum Plein)에 10만명 이상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를 성사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사회복지예산을 대폭적으로 삭감하고 기업주에 유리하도록 노동관계법을 개정하려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노조만이 아니다. 약 5백여 개 시민 사회단체로 구성된 연대기구인 키어 ‘헷 타이’(Keer Het Tij. 방향을 바꾸자) 역시 지역마다 공동투쟁기구를 구성하고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나서고 있다.

연대기구는 2일 암스테르담광장 시위 후에 노조 집회에 결합하기로 하고 지역마다 버스를 대절해 별도로 군중 동원에 나섰다. 기자는 소용돌이 속에 들어간 네덜란드 사회의 긴장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암스테르담 행 버스에 올라탔다.

2일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인파는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아침부터 15만 이상의 노동자, 시민들은 암스테르담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전국 각지의 기차역은 시위 참가자로 유례없이 붐볐고, 대부분 기차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집중하면서 한두 시간 이상 정체됐다.

이날 시위는 네덜란드의 150만 노동조합원들을 포괄하고 있는 네덜란드 노총(FNV)과 기독노총(CNV), 중간직 전문직 노조(MHP)가 함께 조직했다. 노조들은 10만 노동자를 조직하기로 하고 노조원들에게 무료 기차표를 집집마다 보냈다. 노조의 이런 노력이 성과를 이뤄 예상보다 2배 많은 20만 군중이 암스테르담에 결집한 것이다.

사실 인구 1600만의 작은 나라에서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함께 20만이라는 규모의 군중을 동원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네덜란드 언론에 따르면 이번 시위는 네덜란드 현대사에서 80년대 두차례 반전·반핵운동과 91년 노조 집회 다음으로 큰, 역대 네번째 규모의 집회였다고 한다.

네덜란드 현대사에서 4번째 규모

  

▲ 이날 시위에는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2004 장광열
현재 네덜란드 정부와 노조 간에 가장 첨예한 대립은 연금제도에 대한 것이다. 정부는 젊은 세대의 연금 수혜자 부양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연금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며, 노조가 고령 노동자의 이익만 생각하고 장래의 연금기금 고갈에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반면 노조는 정부가 연금제도 개편에 대한 노조의 반대를 마치 고령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로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정부 주장대로라면 이날 시위에는 고령 노동자들 일색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목격한 바로는 20~30대 청년층과 40~50대 장년층의 비율이 거의 4대 6 정도를 이루었다. 근 20년간 산업평화기를 거치면서 청년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이 거의 없고 청년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률이 장년층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현실을 고려해 보면, 젊은 노동자들의 참가율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또 젊은 층 역시 정부의 주장과 달리 연금제도 개편이 자신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제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자신들도 연금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보고 현재의 연금제도를 유지하고자 했다.

집회가 열린 반 고호 박물관 옆의 박물관 광장(Museum Plein)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붐볐다. 20만이 넘는 인파가 넓은 광장을 빽빽하게 메웠다.

사실 이날 시위는 내용보다는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모일 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노조는 10만 이상의 군중을 동원하여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건재함을 보여주고, 향후 파업 같은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조직력의 시험대로 이날 집회를 삼았다.

빠르게 급진화 하고 있는 네덜란드 노동운동

언론은 노조가 핵심 조합원들의 고령화와 청년층의 낮은 가입률을 근거로 들며 “만약 10만명이 모이지 않으면 노조는 정부에 백기를 들어야 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었다. 정부 역시 이날 집회가 자신들의 강력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을 볼 수 있는 시험대로 보고, 집회가 열리기 전 주에 서둘러 의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잡고, 애초의 안보다 후퇴한 안을 제시하면서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그러나 이날 20만의 군중이 모임에 따라 정부에 대한 노동자 시민들의 반발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또한 노조의 조직력이 최근 급격히 살아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정부와 노조의 대립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암스테르담 중심 담 광장에 모인 수만의 시위대  

ⓒ2004 장광열
노조는 이날 집회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강행한 안을 철회하지 않는 한 대중교통, 의료, 정부기관 등 부문별 파업을 벌여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야당들과 함께 정부의 연금제도에 대한 국민투표를 조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노조가 조직력을 동원해 국민투표를 청원하고 과반수 이상의 국민들이 정부 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진다면, 우파 연정 정부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편 노조 내의 강경파들은 우파 정부가 노조와 시민사회단체들의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수정할 뜻이 없다고 밝히자, 우파정부의 붕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총파업을 통해서 우파내각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온건한 성향으로 평가받던 네덜란드 노동운동이 빠른 속도로 급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노동조합에게 타협을 구하지 않고도 정부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장담하며 기세등등하던 정부가 노동자들의 뜻밖의 반격에 어떻게 대응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미국적 길이냐,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이냐  
[분석] 정부와 노조 대립의 배경  

  
▲ 수상 발컨엔더의 동상을 쓰러뜨리는 대형 그림과 우파 정부의 붕괴를 주장하는 시위대열.  
ⓒ장광열

유럽사회에서 사회복지제도의 후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70년대 중반부터 유럽과 미국 경제가 장기간의 침체기를 겪으면서 복지제도 역시 후퇴해왔다. 그러나 현재 네덜란드 정부와 노조의 대립에는 보다 특별한 성격이 있다.

네덜란드는 지난 10여 년간 정부와 기업주와 노동자 간에 서로 협력하고 타협하는 자세를 견지해왔고, 정치 역시 좌·우파 정당이 연정을 이루어 이념적인 대립보다는 실용적인 문제해결에 중심을 두어왔다. 네덜란드 경제는 90년대 이후 다른 유럽나라들에 비해서 높은 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여 주목을 끌었다.

현재 네덜란드 경제는 침체를 겪고있기는 하지만 정부가 주장하듯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실제로 96년부터 2003년까지 네덜란드 경제는17.8퍼센트 성장하여 유럽 평균 성장률보다 1.2 퍼센트 높은 성장을 보였다.

전임 정부는 네덜란드가 다른 유럽나라에 비해서 임금 수준이 낮고 노동생산성이 높아서 경쟁력이 뛰어나다고 자랑해 왔는데, 현 정부는 반대로 임금 수준이 높고 생산성이 정체되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조는 불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들이 장래의 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더 많은 토론을 통해서 상황을 알리면 국민들은 이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야당과 노조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연금제도 개편과 주당 노동시간 40시간으로 연장, 해고 요건 완화, 실업보험 적용 제한 등을 미국 경제체제의 도입으로 보고있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 역시 네덜란드가 미국에 비해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 국민들이 사회복지체제에 안주하면서 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런 나약한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경쟁에서 낙오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적은 임금을 가져가면서 기업들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과감한 개혁을 하지 않으면 네덜란드가 2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지금까지의 노사정 사회적 합의 모델에 연연하지 않고 일방적인 제도 개편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이곳 언론에서는 대화와 타협의 네덜란드 모델은 이제 끝나고 대립과 갈등의 새 시대가 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부의 태도가 이처럼 완강한 것은 현재 정치판의 판세와 관계가 있다. 2002년 초까지 네덜란드 정부는 좌파인 노동당이 제1당으로 우파 자유당과 중간 성향의 민주주의66 당과 함께 좌우 연정을 유지해 왔으나,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이 늘어나고 9·11 이후 유럽사회에 반 이슬람 정서가 급격히 늘어났다. 2002년 총선을 앞두고 칼럼리스트 출신의 핌 포르타운 교수가 혜성처럼 정계에 등장해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면서 네덜란드 정계는 격변을 겪었다.

그는 관료주의에 대해서 비판하고, 네덜란드 사회의 소수 인종인 모로코 출신 젊은이들과 이슬람교도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면서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중산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모아 조직적 기반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건 신당 핌 포르타운당(LPF)으로 총선승리 직전까지 갔었다. 비록 총선 직전 그가 피살됨으로써, 그의 집권계획은 실패했지만, 그의 등장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사회의 우경화가 진행됐고 우파정당들의 득세로 우파정부가 등장했다.

우파정부는 작년에 2차 대전 이후 사상 최대 규모인 170억 유로(25조원)의 재정지출을 삭감하고 사회보장제도의 급격한 축소를 감행한 데 이어, 올해 다시 사회복지제도와 노동정책의 대변혁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정부와 노조의 대립은 네덜란드가 미래에 미국적인 길을 갈 것인지,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을 유지할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2004/10/03 오전 11:56
ⓒ 2004 OhmyNews  

장광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