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없어 치료 못받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
[기고] 한 백혈병 환자가 ‘암 무상의료’를 간원하며
2005-05-13 오전 9:04:33
2005년에 1조3천억원의 여윳돈이 예상되는 건강보험 재정의 쓰임새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암을 비롯한 고액ㆍ중증질환에 쓸 것을 밝히고 있으나 그 혜택이 아주 제한적이어서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그 동안 건강세상네트워크, 보건의료단체연합 등 시민ㆍ사회단체는 ‘암부터 무상의료’를 실현하고 점진적으로 다른 고액ㆍ중증질환으로 그 범위를 확대해 갈 것을 주장해왔다. 1조3천억원이면 국내 모든 암 환자의 치료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 백혈병 환자로서 누구보다도 고액ㆍ중증질환자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 건강세상네트워크 강주성 공동대표가 ‘암부터 무상의료’를 실현하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글을 <프레시안>에 기고해왔다. 편집자.
’암부터 무상의료’, 결국 같이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백혈병이 걸려서 골수이식을 받고 그나마 용케 살아서 지내온 지는 이제 6년이 다 되어 갑니다. 주위 사람들이야 ‘살았으면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지 않느냐’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죽었으면 몰라도 결국 살아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아직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간 투병 과정에서 들어간 치료비는 둘째 치고, 몇 년을 요양하면서 가장의 역할도 못하면서 지내왔다면 그 집안 경제 사정은 사실 뻔할 것입니다.
‘암부터 무상의료’는 암부터 시작해서 고액ㆍ중증질환 전체에 대한 건강보험의 지원을 확대해 ‘돈이 없어서 병 치료를 못 받는’ 세상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보건의료단체연합
그나마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상황이 좋은 편입니다. 같은 처지의 환자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저 같은 중증질환자들을 가족으로 두고 있는 집안은 사실 종국적으로 환자가 죽고 가정 경제가 파탄 나야 상황이 종료되는 걸 많이 보아왔는데 저야 어떻든 일도 하고, 가정도 유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암으로 환자도 죽고, 가정 경제도 파탄 나서야…”
지난 달 27일, 복지부는 암 등 고액중증질환자의 부담을 경감하는 방향으로 남는 건강보험 재정을 집중 투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환자부담이 상대적으로 큰 암ㆍ심장기형ㆍ뇌종양 등에 대한 건강보험 급여를 확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보건복지부가 이와 같은 방향에서 건강보험 급여확대 대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심하게 ‘당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번 복지부의 발표는 이와 같은 방향과 향후 추진 절차를 제시했을 뿐, 실제 어느 정도로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가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제시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질병을 우선적으로 급여 확대를 할 것인지, 어느 정도 급여 확대를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지부의 발표는 최근 제가 일하고 있는 건강세상네트워크 등의 단체에서 ‘암부터 무상의료를’이란 슬로건으로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계속 요구하고 있고, 언론들도 이에 호응하여 보도를 하는 바람에 나온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 일부에서는 “왜 하필 암부터냐? 무상진료가 가능하긴 한거냐” 또는 “그렇게 하면 병원과 환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해지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우려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암부터 무상의료’하자니까 우리가 마치 “암’만’ 무상의료를 하자”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시하고 있는 슬로건은 “암’부터’ 무상의료”입니다. 즉 ‘암부터’ 시작하여 다른 중증고액질환으로 건강보험을 통해 무상의료를 확대해 나가자는 주장입니다. 물론 우리는 각종 보도에서 보아왔듯이 다른 중증질환자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암과는 달리 다른 중증질환은 그 범위와 대상이 아직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암은 대상 질병별로 단일하게 환자의 수와 소요 비용들이 다 파악이 되지만 기타 중증질환들은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직 병명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질병도 있을 뿐더러 이미 파악하고 있는 질병들도 비용 부담액이 천차만별이고 대상자 자체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부터 무상의료’라는 슬로건 외에 이름이야 어떻든 대만의 ‘중대상병제’와 같은 제도를 한국적 상황에서 고민해서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만은 입원 당 환자부담금 상한액을 우리나라 돈으로 80만원 정도로 정하고, 여기에 연간 환자부담금의 상한액이 우리나라 돈으로 약 1백30만원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암ㆍ희귀난치질환ㆍ심혈관질환ㆍ뇌혈관질환 등 고액ㆍ중증질환에 대해서는 ‘중대상병제’를 통해 사실상 본인 부담금을 전액 면제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대만은 이와 같이 고액 환자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여러 제도를 ‘중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의료비 때문에 집안이 망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건강보험료도 내고 암 보험도 따로 들어야 하나”
예전의 경험으로 보면 복지부는 이렇게 정책을 고민할 때 대상자를 확대한다는 취지 아래 다수의 환자에게 소액의 돈을 지원하는 정책을 많이 내놓았습니다. 결국 대상자는 많아질지 모르지만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지원이 됨으로 인해 ‘근원적인 문제를 풀지 못했다’는 비판이 계속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암부터’라는 의미는 현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간 건강보험료를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민간 보험 회사의 각종 암 보험이나 건강보험에 가입한 국민들은 도대체 자기가 왜 건강보험료를 내야 하는지 회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고액ㆍ중증질환에 대한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바로 시민들의 이중 삼중의 민간 보험료 부담을 덜어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울러 특정 질환 중 암부터 집중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앞으로 이런 보장성을 어떻게 다른 중증질환으로 확대할 것인가를 논의할 중요한 사회적 계기로 삼자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이미 여러 보도를 통해 알려졌듯이 올해 예상되는 건강보험 흑자분인 1조3천억원은 모든 암 환자들을 무상 진료할 수 있을 중도로 충분한 금액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상진료’라고 표현하는 것은 ‘환자가 단 한 푼도 내지 말자’라는 주장은 아닙니다. 대만의 환자들처럼 암이나 증증질환이 걸려도 일년에 1백50만원이 채 안 드는 중대상병제와 같은 제도를 사회적으로 함께 고민하자는 생각과 지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백혈병으로 고생했던 환자입니다. 질병이 걸리면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죽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병을 치료하자고 한 가정의 경제가 파탄 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간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의 길’을 어쩔 수 없이 갔던 것은 결국 이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여전히 문제는 이 글을 읽는 사람조차도 결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간 건강의 문제는 개개인이 체력 관리나 건강 관리를 통해 지켜야 할 ‘개인의 문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이 문제를 인권의 문제 즉 건강권으로 이해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건강권의 문제가 사회 내 인권 문제의 하나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고 실제 건강보험이 모든 국민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명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국민들은 건강보험료 외에 몇 배나 더 많은 각종 민간 보험료를 내면서 지내왔습니다. 자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건강보험을 믿다가는 잘못하다 ‘정말 쪽박 차겠구나’, 하는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이중의 보험료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국민들이 정말 보장성이 확대된다면 한 달에 돈 1만원 2만원 더 내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간 보험료는 열심히 올렸으면서도 국민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지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했던 그래서 공공보험에 불신만 키워왔던 정부에게 있는 것입니다.
盧대통령, “돈 없어서 치료 못 받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
저는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국민이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라고 했던 이야기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암부터 무상의료를’이란 슬로건은 결국 함께 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자는 국민들의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요구인 것입니다.
아픈 사람과 앞으로 혹시라도 아플 사람 모두를 위해 적어도 지금의 의료 현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암부터 무상의료를’ 더 나아가서 ‘모든 의료를 무상의료로…’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올까요? 백혈병이 걸려서 용케 살아난 제가 혹시라도 죽기 전에 모두가 함께 사는 꿈을 현실에서 보고 싶습니다. 지금이 시작입니다. 함께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