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다른 ‘미국 의회’와 ‘대한민국 국회’
[한미FTA 뜯어보기 22] 침묵하고 있는 국회의원들
2006-03-30 오후 5:54:17
5.31 지방선거가 2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국회가 그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와 관련지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이야기하는 국회의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의원들끼리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한미 FTA를 쟁점화하지 말자’고 짜기라도 한 듯하다.
미국의 일정에 따라 5월 3일 열릴 예정이던 한미 FTA의 첫 본협상이 6월 5일로 미뤄진 것도 한국 정부가 ‘한미 FTA 협상이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협상을 지방선거 후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올인 하겠다”고 공언했을 만큼 중대한 한미 FTA가 우리 국민들이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들을 뽑으며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논의하는 장(場)인 지방선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같은 시간에 미국 의회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미국 정부와 활발한 의사소통을 하며 한미 FTA를 자국 국민들에게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동시에 한국 시장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지난 7일 ‘한미 FTA 1차 사전준비협의’ 참석차 한국에 들렀던 웬디 커틀러 한미 FTA 협상 미국측 수석대표는 주한 미국상공회의소(AMCHAM)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정부는 무역촉진권한(TPA) 하에서 의회와 (90일 간의) 협의기간을 가진다. 우리는 이 기간에는 (한국과 공식적인) 협상을 벌일 수 없다. 우리는 이 90일 동안 두 가지 일에 주력한다. 먼저 내부적으로는 캐나다, 멕시코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후 15년 만에 가장 큰 FTA가 될 한미 FTA의 협상을 위해 우리 스스로를 철저히 준비시키는 중이다. 여기에는 한국 시장의 핵심적인 관세 및 비관세 장벽들을 파악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 우리는 이 모든 사안들에 대해 사업가, 노동자, 비정부기구(NGO), 의회를 포함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들과 협의하고 있다. (…) 우리는 또 이 기간을 이용해 한국의 협상대표들과 함께 조직적·기술적 작업 등 가능한 한 많은 사전작업들을 해나가려 한다. 공식 협상에 들어가면 곧바로 현안들에 대해 협의할 수 있기 위해서다. (…) 나는 올해 말까지 이 협상을 끝낼 생각이다.”
이런 커틀러의 발언으로 미루어 보면,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이명박 시장 부인이 관용차를 전용한 것과 같은 사안을 놓고 갑론을박하며 지방선거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동안에 정부는 국회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한미 FTA 본협상을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물밑작업들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의회의 일정은?…”바쁘다 바빠”
한미 FTA의 1차 본협상은 6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이다. 본협상 전후로 예상되는 미국 의회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2월 3일: 미 행정부로부터 ‘한미 FTA 협상 의향서’를 제출받음. 무역촉진권한(TPA)은 이것이 공식협상을 개시하기 90일 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
▲3월 3일: 대통령 직속 ‘통상정책 및 협상에 대한 자문위원회(The Advisory Committee for Trade Policy and Negotiations)’로부터 한미 FTA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를 제출받음 (이 보고서는 조지 부시 대통령과 무역대표부(USTR)에도 제출됨). TPA는 이것이 미 행정부가 한미 FTA에 대한 협상 의지를 공식으로 밝힌 후 30일 이내에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
▲4월 1일: 의회는 한미 FTA에 대한 ‘의회감독그룹(Congressional Oversight Group)’을 구성해야 함. 의회감독그룹은 상원 재무위원회, 하원 세출위원회 및 상·하원 양원을 포괄하는 협상 관련 위원회 각각의 위원장, 야당 대표, 위원 3인 등으로 구성됨. TPA는 이것이 미 행정부가 협상 의사를 공식으로 밝힌 후 60일 이내에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
▲2월 3일~5월 3일(6월 4일까지 연장 가능): 상원의 재무위원회, 하원의 세출위원회, 의회감독그룹, 농업위원회 등 한미 FTA 협상에 소관사항이 있는 의회 내 관련 위원회 등이 부시 대통령과 함께 한미 FTA와 관한 협의를 진행함. 협의 내용은 한미 FTA의 성격, 한미 FTA가 미국 통상법에 규정된 통상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적합한지 여부와 그 실현방식, 협정이 기존 법률에 대해 미칠 영향 등을 포함
▲7월 14일께: 국제무역위원회(USITC)로부터 ‘한미 FTA: 수입품에 대한 비관세 조치로 예상되는 효과에 대한 조언’ 최종보고서를 제출받음 (이 보고서는 2월 6일 무역대표부가 국제무역위원회에 요청한 것으로 무역대표부에도 제출됨). 이 보고서의 내용에 근거해 상원의 재무위원회와 하원의 세출위원회를 주축으로 상·하원의 관련 위원회들이 여러 차례 청문회를 개최해 관련 이익집단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부 관련부처의 협상 실행 계획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함
▲8월 2일: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될 경우 개정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관련 국내법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받음. TPA는 이것이 공식 협상이 개시된 후 60일 이내에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
▲8월 31일: 국제무역위원로부터 ‘한미 FTA 체결로 예상되는 국내 산업의 피해 여부’ 등 법률에 규정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받음 (대통령에게도 제출됨). TPA는 이것이 공식 협상의 개시 후 90일 이내에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
15년 넘게 여러 나라들과 수많은 FTA 협상을 벌이면서 국내외 협상의 노하우가 축적된 미국은 이처럼 하나의 FTA를 체결해야 하는 데 있어 정부와 국회 및 관련 기관의 역할과 그 역할이 수행돼야 할 시점을 정확히 규정하고 있다.
〈미 의회가 미 정부로부터 제출받을 한미 FTA 협상과 관련된 보고서들〉
△협상의 목적, 개요 등을 담은 미 무역대표부(USTR)의 보고서
△한미 FTA 협상의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들
△한미 FTA 협상에 대해 행정부가 취할 조치들에 대한 보고서
△한미 FTA의 집행 및 실시 계획서
△한미 FTA 집행법의 초안
△한미 FTA가 미국의 상업적인 이익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할지에 대한 보고서
△한미 FTA가 미국의 정책목표 등을 달성하는 데 어떻게, 얼마나 기여할지에 대한 보고서
△한미 FTA가 미국의 주 정부와 지방 정부에 미칠 효과에 대한 보고서
△한미 FTA 체결이 미국의 환경, 고용, 노동권 등에 미칠 영향에 대한 보고서
△한미 FTA 체결이 한국의 환경, 고용, 노동권 등에 미칠 영향에 대한 보고서
한국 국회의 일정은?…”없다”
그렇다면 미국 의회가 이렇게 한미 FTA 협상에 대해 활발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때 우리 의회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단 미국 의회의 경우처럼 한미 FTA에 관련된 일정표를 그려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일정이 ‘없기’ 때문이다.
한미 FTA 협상에 관련해 눈에 띄는 국회의 움직임은 올해 2월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강기갑 의원 등 40인의 의원들이 FTA와 같은 통상협정을 체결할 때 정부, 국회, 민간이 어떤 역할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해야 할지를 명시한 ‘통상협정의 체결절차에 관한 법률안(통상체결법)’을 국회에 발의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법안이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고, 체결된다 해도 이미 한국과 미국의 정부가 한미 FTA의 물밑협상을 상당히 진척시킨 후가 된다.
게다가 한미 FTA 협상에 당 차원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 곳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뿐이다. 우리당은 지난달 15일 정부와 함께 ’1차 한미 FTA 추진 관련 당정 공동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앞으로 농업, 영화 등 분과별로 실무대책회의를 열기로 했으나 아직까지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민노당도 이달 중순 당내에 ‘한미 FTA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으나 비정규직 법안 등 산적한 다른 현안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다.
이밖에 민주당의 한화갑 의원이 대표로 있는 ‘농어업 회생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이 이달 초 ‘한미 FTA 농·축·수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한미 FTA 협상에 대한 의정활동을 구상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협상에 한 분야인 농업문제에만 치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비대위는 ‘한미 FTA 대응을 위한 국회 특별위원회’나 ‘한미 FTA 대응을 위한 위원 모임’ 등을 제안했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미국 헌법 “FTA 협상 권한은 국회에”, 한국 헌법은 “글쎄…”
이처럼 미국 의회와 한국 국회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부와 국회 중 어느 곳이 통상협정에 대한 권한을 갖는지에 관한 두 나라 헌법의 규정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 1조 8절은 “의회가 수입상품세를 포함한 조세, 관세를 부과 및 징수하고, 외국과의 통상을 규제하는 권한을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통상협상의 전권이 의회에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 미국은 ’2000년 무역법(The Trade Act of 2002)’과 이 법에 포함돼 있는 ‘무역촉진권한(TPA, Trade Promotion Act)’에 따라 통상협정에 대한 의회의 포괄적인 권한을 2007년 6월 1일까지 한시적으로 행정부에 위임해 놓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는 공식 협상을 개시하기 최소 90일 전에 의회에 협상 의향을 문서로 통보하고 이 90일 동안 의회와 지속적으로 협상 계획 등에 대해 협의해야 하는 등 의회의 강력한 영향력 안에 머물러 있다.
이와 반대로 한국의 헌법은 통상협상의 1차적인 권한을 대통령과 행정부에 부여하고 있다. 헌법 73조에는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한다”고 쓰여 있다.
통상협정에 대한 의회의 권한을 규정한 것은 헌법 60조 1항으로, 이 항은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 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의회의 권한을 규정한 이 헌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 헌법에 규정된 ‘의회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최대한 넓게 해석해 정부가 한미 FTA 협상을 다 진행한 후 협정 비준에 대해서만 국회의 동의를 얻으면 된다는 가정 하에 협상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허영 명지대 석좌교수(헌법학)는 그의 저서 〈한국헌법론〉에서 “‘체결’은 좁은 의미로 해석해서 전권 대표의 지명·파견, 조약 내용에 대한 기본방침 지시 등의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면서 그 이유로 “넓은 의미의 ‘체결’에는 마땅히 ‘비준’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정부는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로 김종훈 외교통상부 본부 대사를 임명한 것부터 국회의 동의를 얻었어야 마땅했다.
우리 국회의원들은 한미 FTA에 대한 ‘적극적인’ 침묵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만큼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먼저 헌법상에 규정된 ‘통상협정 체결·비준에 대한 국회의 동의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 우리 사회와 국민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한미 FTA 협상에 대한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백번 양보해서 현행법상 통상협정에 관한 전권이 정부에 있다고 해석한다 하더라도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한미 FTA 협상에 대해 하나같이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미래와 정체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한미 FTA을 누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고 실행할지에 대한 규정 자체가 우리 법체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 국회의원들이 본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입법 활동을 소홀히 해 왔음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다.
노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