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협상 이대론 안된다] 6. 국민건강권 보장되나
[경향신문 2006-07-11 18:12]
지난 10일부터 시작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2차 협상에서 의료 분야는 ‘경제협상 그 이상’이다. 양국 간 경제적 실익 계산에 앞서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측 요구대로 정부가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포기하고 신약에 대한 특허권을 강화해주면 약값 상승은 피할 수 없다. 현재도 비싼 약값에 허덕이는 환자들에게 고스란히 그 부담이 전가되는 것이다. 정부는 ‘의료부분에 대한 공공성을 유지한다’는 기본원칙을 세우고 있지만 미국의 거센 요구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정부는 또 협상 타결을 통해 ‘국내용’에 머물러 있는 의약품과 의료기기 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미국과의 시장개방이 자칫 국내 의료산업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자국 의료산업의 몰락은 ‘건강 주권’을 잃을 수도 있는 문제다. ‘주판알 퉁기기’에 앞서 의약 분야 협상이 중요한 까닭은 이 때문이다.
◇핵심 쟁점인 ‘약제비 적정화 방안’=2차 협상에 들어서기 얼마 전 복지부 고위관계자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원칙적으로 협상대상이 아닌 정부 정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2차 협상 첫날인 11일 웬디 커틀러 미국측 협상 수석대표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에 포함된)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효능이 좋은 약만 보험급여 적용)이 (미국의) 혁신적인 신약을 차별하게 될 것”이라고 공세의 고삐를 다시 잡았다. 그는 “한국의 의료체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도 덧붙여 국내 특수성을 내세워 설득시키려는 우리 협상단의 의도까지 무색하게 했다.
복지부가 지난 5월 발표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한마디로 건강보험재정을 위협할 만큼 약값이 올라 이를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등 선진 7개국의 약값 평균 조정가로 잡았던 혁신적 신약의 가격을 효능에 따라 재평가해 정하고 건강보험공단이 약값 산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게 골자다.
복지부는 이런 약제비 재조정 방안이 건보재정의 안정화를 위해 꼭 필요하며 내외국 기업간 차별은 없다고 설득에 나섰지만 미국측과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약값 부담에 허리 휘나=미국측은 또 신약에 대한 특허권을 연장하고 복제약 가격을 낮추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행 의약품의 특허기간은 20년이지만 통상 특허출원에서 특허등록까지 2~3년, 식품의약품안전청에 허가를 신청하고 받는 데까지 다시 2~3년이 걸린다. 미국은 이렇게 시장진입 과정에 소요된 4~6년만큼 특허기간을 연장(보존)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특허기간 만료 후 생산되는 복제약 판매가 자연스레 지연될 수밖에 없고 주로 복제약 생산에 치중하는 국내 제약사의 수익성이 악화된다. 한국백혈병환우회 안기종 사무국장은 “차는 안 타고, 소고기는 안 먹어도 되지만 약은 안 먹을 수 없다”면서 “약값의 증가는 건강보험 재정의 악화를 불러와 결국 국민건강에 심각한 위험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측은 복제약 가격의 인하도 주장하고 있다. 현재 국내 복제약은 오리지널 대비 80%이지만 다른 선진국 수준(50~60%)으로 낮추라는 것이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내 제약산업에 대해 연구비 등을 확보해 주기 위해 복제약값을 다소 높게 유지했지만 이마저도 힘들게 된 것이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실장은 “복제약 가격이 오리지널의 60%로 떨어지고 특허기간이 1년 연장되면 우리 국민이 연 1조원 정도 추가부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의료산업에 도움되나=정부는 한·미 FTA 체결을 통해 국내 의약품과 의료기기의 대미 수출이 늘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의 입장은 다르다. 의료분야의 경우 가격보다는 질이 구매력 창출의 핵심요인인데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한참 모자르기 때문이다.
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국내 의약품의 핵심기술은 세계 최고수준의 64.3%에 그치고 기술격차도 4.1년 난다. 의료기기의 기술수준도 세계 최고에 비해 61.6%에 머무르고 격차 또한 3.9년 벌어졌다. 2004년 기준으로 미국시장에서 국내 의약품 산업의 시장점유율은 0.24%(24위), 의료기기는 0.77%(23위)에 그치고 있다.
협정이 체결돼도 관세로 인한 이익은 미미하다는 의견이 다수다. 우리나라가 통상 의료분야 상품에 8%의 관세를 물리는 반면 미국은 이미 대부분 무관세이기 때문이다.
반면 관세가 철폐되면서 미국 의료상품이 대거 국내에 유입될 가능성도 있다. 의료기기의 경우 현재 대형병원은 미국산을, 중소병원은 미국산의 70~80% 가격대인 국내산을 주로 쓰고 있지만 관세철폐로 인해 미국산의 가격이 10%가량 낮아지면 미국산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의약품 시장의 오리지널 비율 증가, 복제약 생산 지연 등의 상황이 벌어지면 종업원 30명 이하 업체가 전체의 63%에 이르는 ‘영세한’ 국내 제약업계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국제약협회 문경태 부회장은 “미국측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면서 “시장 개방은 필요하지만 정부의 국내산업 보호책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약협회는 지난달 제약기업 지원 특별법을 제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한 바 있다. 보건산업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다른 협상과 함께 진행돼서 그렇지 보건의료 분야는 협정 체결로 인해 이익을 볼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황인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