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티브 리스트’ 오보 소동(?)
한-미 ‘포지티브 리스트’ 비밀합의 보도.. 어차피 나올 이야기
임은경 기자
27일 아침 한때 한미FTA 2차협상 중단의 원인이었던 보건복지부의 ‘약제비 적정화방안’이 이미 협상 마지막 날인 14일 한미간 비공식 막후 협상을 통해 비밀리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나와 한동안 세간이 술렁였다.
협상이 아예 하나도 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14일에 사실은 비공식 협상이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미국은 우리 정부가 추진중인 의약품 건강보험 선별등재 방식(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수용하는 대신 우리 정부의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미국측 패널이 참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2차협상 마지막날 비밀 회동, 포지티브 리스트 관철 대신 미국요구 수용(?)
27일 ‘연합뉴스’가 복수의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협상 마지막 날 한미 협상단 양자와 보건복지부 등 3자간 막후 교섭을 통해 ‘건강보험의 개혁을 위해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반드시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미국측에 전달하고 이해를 구했으며, 결국 미국도 수용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반대가 완강했지만,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의지가 워낙 강해 결국 우리 뜻대로 관철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 도입에 따른 미국측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미국측 패널 참여, 입법예고 기간의 연장 등 미국측의 예상되는 요구사항을 일정부분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건복지부에 전달, 역시 양보를 얻어냈다”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실제 보건복지부는 25일 ‘건강보험 요양급여 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당초 예정과 달리 입법예고 기간을 20일이 아닌 60일로 연장한다고 공표했다.
또 이 법안을 직접 담당하는 보건복지부 박인석 보험급여기획팀장도 같은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경제성을 평가한 뒤 최종적으로 약값을 결정하는 보건복지부 산하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미국 제약업계 관계자를 참여시켜 논의하도록 할 생각”이라고 말해 미국측 요구사항이 일정부분 수용되었음을 시사했다.
보건복지부 해명, “미국 요구 수용은 사실 무근”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27일 낮 해명자료를 내어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미국측 위원이 참석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며 “2차협상 기간과 협상 후 현재까지 미국측과 막후 협상으로 어떤 사항도 합의한 바 없으며, 약제비적정화 방안 입법예고 등 추진일정에 맞춰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입법예고가 당초 예정인 21일보다 며칠 늦어진 것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데 걸린 시간 때문이라는 의혹에 대해서도 보건복지부는 “양국간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관보 게재 등 절차문제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2차 협상에 참가했던 보건복지부 한미FTA 협상 담당자도 ‘민중의소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이 아는 한에서는) 11일 미국이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간 이후 의약 관련 더 이상의 협상 자리는 없었으며, 14일 막후 협상도 물론 들어본 바 없다”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이렇게 나오자, 협상 담당 부처인 외교통상부는 당연히 보도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김종훈 한미FTA 협상단 수석대표와 이혜민 협상단장은 27일 낮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수용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없다”면서 “어제(26일) 입법예고에 들어갔으니 이제 미국쪽 반응을 기다려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말 오보일까.. 모든 정황이 그간 반대 진영의 추측과 일치
상황을 종합해보면, ‘미국의 약값 적정화방안 수용’ 보도는 일단은 오보 소동으로 끝나는 것 같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나 외교통상부의 해명을 그대로 믿기에는 미심쩍은 상황이 한둘이 아니다. 보건복지부 관리인 박인석 팀장이 직접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미국 제약업계 관계자를 참여시키겠다”고 말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이는 미국이 포지티브 리스트를 수용하는 대신 그 대가로 다양한 특허 연장을 통해 의약품 시장을 독점하고 미 제약회사의 입김을 반영할 다른 수단을 요구할 것이라는 한미FTA 우려 진영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약가를 결정하는 정부 위원회에 미국의 제약회사 관계자가 참여하는 것도 미-호주 FTA에서 미국이 이미 쓰고 있는 방법으로, 이를 한국에도 똑같이 요구할 것이라는 예상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14일 비공식 협상이 열렸다는 것이 설사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나, 포지티브 리스트를 대가로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 미국 제약회사가 참여하기로 한 합의는 다른 곳에서라도 이미 되었을 지 모른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그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포지티브 리스트를 아무 대가없이 그냥 수용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보’일지도 모르나, 어차피 얼마가지 않아 나올 내용을 조금 일찍 보도한 것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2006년07월28일 ⓒ민중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