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터무니없는 미국의 FTA 요구 사항
[경향신문 2006-09-07 18:24]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3차 협상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요구 사항들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요구 사항 중에는 TV 방송의 외국물 프로그램 편성 쿼터 확대, 재벌규제 등이 담겨 있다. 또 미국이 1차 협상 때부터 협상문서를 영어로만 작성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온 사실이 이번에 확인됐다. FTA 협상에 임하는 미국의 자세와 본심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미국의 협의문서 영어판 작성, 한글판 거부 주장을 예로 들어보자. 김종훈 FTA 협상 수석대표는 미국의 고집 이유로 자신들의 한글 구사 인력과 능력 부족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대체 양자 협상내용을 정리하면서 특정국의 능력부족을 이유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가. 협상문서는 당연히 한글과 영어로 작성되어야 하며 동등한 효력을 지녀야 한다. 국가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다. 방송 편성 확대 제의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제의는 스크린 쿼터 철폐를 앞세워 세계 극장가를 석권한 데 이어 다른 나라의 안방마저 점령하겠다는 의도로밖에 풀이되지 않는다.
김대표는 미국과의 FTA 협상을 프로 씨름에 비유해 이번 협상을 ‘힘쓰기 단계’라며 “배지기 등 본격적인 기술을 쓰는 것은 4차 협상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협상이 탐색전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시합을 유리하게 이끌려면 힘쓰기부터 기선을 잡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정부의 ‘힘쓰기’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다. 웬디 커틀러 미국측 수석대표는 의약품 분야 협상과 관련해 양국이 ‘주고받기 협상원칙’에 합의했다면서 “우리는 한국의 포지티브 리스트를 인정해주고 반대급부로 한국은 포지티브 리스트 세부사항에 대해 협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건의료단체 등 시민단체들의 우려대로 세부사항 협의는 포지티브 리스트 무력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힘을 제대로 썼는지 의문이다.
김대표가 본격적 협상 기술로 언급한 씨름의 배지기는 최고난도 기술이다. 천하장사 이만기처럼 기본적으로 탁월한 기술과 허릿심을 갖고 있어야 이 기술을 쓸 수 있다. 특히 상대방이 덩치가 크고 힘이 셀 때는 더욱 그렇다. 괜히 허세를 부리다가는 오히려 큰 부상만 입을 뿐이다. 정부는 FTA 협상을 밀어붙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국익을 지킬 수 없다면 포기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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