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기자의 눈 한미 FTA 5차 협상장에 도착해보니

    
  ’리조트 협상’ 시작…다음은 하와이 어때요?  
  [기자의 눈] 한미 FTA 5차 협상장에 도착해보니  

  2006-12-04 오전 9:42:11    

  

  
  별이 총총히 빛났다. 숨을 쉬기 힘들 만큼 춥지만 공기는 더없이 맑았다. 새하얀 눈으로 몸치장을 한 산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산등성이의 몇 안 되는 인가(人家)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전구의 화려한 불빛으로 빛났다.
  
  미국 몬태나 주 빅스카이로 오는 긴 여정의 끝은 이렇게 ‘황홀’했다. 한미 FTA가 아니라면 평생 와 볼 기회조차 없었을 곳. 이곳에 오게 된 건 전적으로 한미 FTA 취재를 맡은 나의 ‘행운’이다. 이곳에서 4일부터 닷새 간 한미 FTA 5차 협상이 열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천(大天, Big Sky)’에 오는 길은 너무도 멀고 험했다. 집에서 인천공항으로, 거기서 미국으로 국제선 비행 한 번, 미국의 ‘악명 높은’ 입국심사를 받은 후 다시 몬태나 주 보즈맨 공항까지 미국 국내선 비행 두 번, 그리고 또 버스를 타고 협상장인 ‘빅스카이 리조트’로 오는 30여 시간의 장도(長途)….
  
  나는 빅스카이에서의 첫 아침을 코피를 쏟는 것으로 시작했다. 숙소 앞 스키장의 ‘파우더 스노(powder snow, 입자가 고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빛이 아니었다면 아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몬태나는 인간과 외계인이 처음 만난 곳?
  

▲ 오전 8시에야 동이 트는 빅스카이(Big Sky). ⓒ 프레시안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생소한 몬태나 주는 영화 ‘스타트렉’에서 인간과 외계인이 최초로 만난 바로 그곳이다.
  
  로키산맥 북부지대에 속하는 몬태나 주의 해발은 평균 1035미터. 몬태나(Montana)는 스페인어로 산(mountain)을 뜻한다. ‘넓은 하늘을 가진 주(State of Big Sky)’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면적은 38만여 평방킬로미터로 광대하지만, 인구밀도는 미국 50개 주 중 4번째로 낮다.
  
  몬태나의 주요 산업은 관광과 농업이다. 한미 FTA 협상이 열리는 ‘빅스카이 리조트’ 외에도 20여 개의 스키 리조트가 몬태나 주에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옐로스톤 국립공원’도 이 주에 걸쳐 있다. 밀과 보리 농업 및 축산업이 발달했다. 주요 수출품도 ‘버펄로 쇠고기’를 포함한 농축산물이다.
  
  한미 FTA 5차 협상장소인 ‘빅스카이 리조트’는 사유지다. 미국 방송사 NBC의 기상 캐스터였던 고(古) 체트 헌틀리가 1973년 개장했고, 3년 후인 1976년 리조트 체인사업 회사인 ‘보인 유에스에이 리조트(Boyne USA Resort)’가 이를 인수·확장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 리조트가 속한 행정구역으로 군 단위의 ‘빅스카이’는 총 인구가 1200명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두메산골’이다.
  
  한미 FTA ‘리조트 협상’이 시작됐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두메산골에서 한미 FTA 협상이 열리게 됐나? 몬태나 주 출신인 맥스 보커스 민주당 상원의원이 미국 측 협상단에 제안해 이곳이 협상장으로 결정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보커스 의원은 한미 FTA를 포함해 미 행정부의 대외통상 정책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상원위원회인 재무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내정돼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미스터 쇠고기(Mr. Beef)’로 불리기도 하는 보커스 의원이 우리나라에 쇠고기 시장을 더 개방하라는 압박을 ‘상징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굳이 ‘비프 벨트(beef belt)’에 속하는 몬태나를 협상장소로 추천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최근 국내로 반입된 미국산 쇠고기에서 계속 뼛조각이 발견돼 해당 쇠고기가 반송 조치되면서 미국 측의 ‘쇠고기 압력’은 한층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단지 우리 측에 쇠고기 시장 개방 압박수위를 높이기 위해 협상장소로 정했다고 보기에는 이곳은 너무나 ‘두메산골’이다. 이번 5차 협상의 장소를 정할 권한은 미국 측에 있었다(한미 양국 협상단이 번갈아가며 협상장소를 정하기로 돼 있다). 그런데 이곳은 미국 측 협상단에게도 결코 접근성이 좋은 곳이 아니다.
  

▲ 미국 몬태나 주 빅스카이의 위치. ⓒ Big Sky Resort  

  그동안 한미 FTA 협상이 열렸던 곳은 미국 워싱턴과 시애틀, 한국 서울과 제주도 등 모두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곳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뜬금없이 외딴 곳’이 협상장소로 정해진 걸까?
  
  이와 관련해 한미 양국에서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커졌다는 점, 반대 시위자들이 양국 협상단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한미 양국의 국회의원들이 한미 FTA 협상에 대한 감시를 상대적으로 강화했다는 점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반(反)세계화 운동’, 특히 1999년 ‘시애틀 반세계화 투쟁’의 기억은 ‘자유무역 신봉주의자’들에게 ‘리조트 협상’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다자간 무역협상인 WTO(세계무역기구) 도하라운드나 양자간 무역협상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자본 위주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도구라고 보는 ‘철없는 자들’이 협상을 망치지 않게 하려고 멕시코 칸쿤처럼 ‘가는 데 많은 비용이 들고’ ‘외지고’ ‘조용한’ 리조트에서 협상을 뚝딱 해치우는 것이다.
  
  한미 FTA는 계륵(鷄肋)?
  
  실제로 한미 FTA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자 이곳 빅스카이까지 온 국내 원정시위대의 규모는 20명 가량 안팎이다. 미국 원정시위대의 규모도 10여 명으로 줄었다. 워싱턴협상이나 시애틀협상 때에 비해 원정투쟁단의 규모가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여기에는 최근 ‘한미 FTA 저지 범국민 운동본부’ 핵심 관계자들이 대거 구속되거나 소환된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보다는 거리와 비용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 한미 FTA 5차 협상이 열리는 ‘빅스카이 리조트(Big Sky Resort). ⓒ 프레시안  

  원정시위대의 규모만 줄어든 것이 아니다. 원정시위대의 활동반경도 크게 축소됐다. 협상장인 ‘빅스카이 리조트’가 사유지이다 보니 이들이 활동을 하려면 일일이 소유주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이 때문에 20~30명 규모의 원정시위대는 인근 도시인 보즈맨과 빅스카이를 오가며 한미 FTA 반대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두 곳은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아울러 우리 국민들에게 협상 소식을 알려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기자단의 규모도 제주도협상 때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보도의 구체적인 내용 대부분이 기술적인 것들이어서 별 재미는 없지만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협상이 열릴 때마다 기자를 보낼 수밖에 없는 국내 언론사들에게 한미 FTA란 그야말로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다.
  
  이번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비행편이 적은 곳에서 협상이 열리다 보니 협상단 일부와 외교통상부 직원들, ‘한미FTA 5차협상 저지 원정투쟁단’ 일부, 그리고 기자들이 한 비행기를 타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났다. 이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작은 시골공항에 도착한 뒤 나란히 서서 수하물을 수취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7차 협상은 ‘하와이’ 어때요?
  
  한미 FTA 협상은 양국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칠 중요한 협상이다. 이런 중요한 협상은 서울이나 워싱턴처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 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협상의 기본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일까?
  
  6차 협상이 내년 1월 서울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 다음 7차 협상은 어디서 열릴까? 기왕에 ‘리조트 협상’을 할 거라면 한국과 가깝고 날씨도 따뜻한 ‘하와이’로 협상장소를 결정해 주면 안 될까?  
    
  

  빅스카이=노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