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개혁의 위기] 4-7. 진보의 10대 의제 : 건강 불평등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사는 정모씨(71)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술을 받을 수가 없다. 정부에서 주는 월 30만원의 지원금으로 사는 기초생활수급자이자 의료보호대상자인 그는 자기 부담 비용 6백만원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청이 긴박한 상황에 놓인 저소득층에 의료비와 생활비를 지급하는 긴급구호자금 지원을 받도록 알선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원 금액은 최대 3백만원. 정씨에게는 여전히 3백만원이 필요하다. 가양동 사회복지사 이모씨는 “의료보호 대상자더라도 건강보험 적용이 안되는 치료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저소득층은 수술을 받을 경우 생활비를 벌 수 없고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도 없다”면서 “이런 추가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치료받을 엄두를 못낸다”고 설명했다.
치료비 부담은 저소득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박모씨(43·여)는 연봉 4천5백만원인 남편의 수입으로 살아온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10)이 소아암의 일종인 신경모세포종에 걸리면서 생활기반이 통째로 무너졌다. 세번째 골수이식 수술과 치료를 받은 지난 8월부터 지난달까지 3개월 동안 이들이 낸 치료비는 9천3백만원. 발병한 2002년 1월부터 지금까지 2억원을 썼다. 이들이 치료받을 당시 두번째 이식수술부터 건강보험 적용이 안됐기 때문이다.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병이어서 무균실·중환자실 입원비, 선택진료비 등이 만만치 않았다. 집을 담보로 대출받고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다. 그러나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 추가 비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박씨는 “남편(50)이 20년 넘게 직장생활하면서 건강보험료를 내왔지만 막상 큰 일을 당하고 보니 도움이 안된다”며 “의료보호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는 게 나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전했다.
의료비는 이렇게 가난한 자와 여유있는 자를 차별하지 않고, 생계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특정 계층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심화되는 ‘건강 불평등’ 현상은 의료문제 역시 계층의 문제임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소득수준, 생활·노동환경 등에 따라 건강에 큰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창보 사무국장은 “건강의 대물림은 부, 학력의 대물림에 이어 사회 불평등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서민층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근본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사회 흐름은 의료공공성 강화를 통해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는 쪽보다는 의료 산업화로 역행하고 있다. 그는 “정부가 의료서비스를 산업화해 시장원리에 맡기겠다는 것은 ‘삶의 질’ 문제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에는 의료 보장성 확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40~50%대인 건강보험 보장률을 70%까지 높이고 공공의료기관을 확충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2주년 국정연설에서는 “사회 안전망을 더욱 확충해서 최소한 돈이 없어 병원에 못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참여정부가 최근 의료시장 개방과 산업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의료 정책으로 전환했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하 의료단체연합) 변혜진 기획국장은 “정부는 의료 보장성을 강화하면서 산업화도 같이 추진하겠다지만 지금처럼 공공의료 시스템이 약한 상황에서 산업화하면 보장성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변국장은 “의료 공공성을 확보하는 두 축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와 공공의료기관 확충”이라며 “시장화가 아닌 보장성 강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60%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치인 70%보다 낮다. 또 OECD 국가들의 공공의료기관 비율은 평균 30%지만 한국은 10%이고 국립대 병원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8%에 불과하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그나마 허약한 공공성 기반마저도 위협을 하고 있다. 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실장(가정·예방의학 전문의)은 “공공성이 확대되면 이익이 줄어드는 대형 병원자본, 민간 보험사, 다국적 제약회사 등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부추긴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만히 두면 ‘시장’이 이기게 돼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이를 막기 위해 시민사회단체 전체가 달려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보장성 강화와 산업화 추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정부가 보장성을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도록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진보세력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우석균 정책실장은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때(2003~2004년) 수가제도를 바꾸고 공공의료기관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지만, 병원계의 압력으로 유야무야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병원·제약 등 의료자본의 힘은 참여정부를 좌우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의료자본이 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를 통해 의료 산업화에 적극 개입한 것이다. 그 결과 정부는 이제 의료기관의 영리법인화, 민간보험 활성화 등 의료 산업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의료개혁 단체들은 “정부가 특정 대형병원장의 주장을 정책 근거로 삼는 등 병원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보세력은 이같이 시급한 의료 산업화와 FTA 등 예상치 못한 현안에 대응하느라, 보장성 강화라는 근본적인 과제에는 힘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홍춘택 의료정책연구원의 말이다. “무상의료 1단계 실현을 위한 8개 법안을 지난해 제출했는데, 만 6세 미만 아동의 예방접종 무료화 안만 통과되고 나머지는 현재까지 계류 중입니다. 공공의료기관 확대를 위한 도시형 보건지소 확충 사업도 실질적 성과는 미미합니다. 운동단체 간의 협력이 잘 되지 않았고 민노당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부족하지요.” 김창보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은 “민주노동당이 시민단체의 입장을 조율해 원내에서 풀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노당이 내세우는 ‘무상의료’의 경우 구체적 접근 방법이 없어서 현실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면서 “상징적인 구호로만 느껴지지 달성해야 할 목표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의료문제의 공론화를 위한 시민단체 간의 발빠른 협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창보 사무국장은 “의료 시민운동이 보건운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이동해야 하는데 시민사회 안에서 공감대를 이루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인정했다. 민노당 홍춘택 연구원은 “수가제도, 급여·비급여 등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시민들이 의료 주제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미 FTA 협상 반대 운동이 시민들 사이에 의료 공공성에 관한 관심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기가 될 수는 있다. 변혜진 국장은 “의료시장 개방 반대 운동의 호응이 별로였지만, FTA를 계기로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홍춘택 연구원은 “진보의 핵심이 공존사회라고 한다면 의료문제야말로 사람들에게 연대정신을 강조하는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다.
〈임영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