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명분 챙기기’…미국은 ‘실리 챙기기’
[한미FTA 타결 국면에서(1)] 8차협상 전망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8차 협상이 8일부터 닷새 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다. 사실상 마지막 공식 협상이 될 이번 협상에서는 한미 양국 협상단이 3월말 협상 타결 직전에 열릴 통상장관급 협상과 정상급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기 위한 최종 쟁점들을 골라내기 위한 마무리 작업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8차 협상에서는 한국 측 협상단은 ‘명분 쌓기’에, 미국 측 협상단은 ‘실리 쌓기’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측은 국내적으로 한미 FTA 체결이 사실상 기정사실화돼 있는 상황에서 한국 측 양보로 비판 받을 협상내용을 협상타결을 위한 전략으로 포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반면, 미국 측은 미 민주당의 양원 장악 여파로 미국 내 ‘강성’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실질적인 성과를 올려야 할 필요성이 큰 상황이다.
8차 협상에서 한국 측 명분 쌓기와 미국 측 실리 쌓기가 무난히 이뤄지면, 양측 수석대표와 분과장이 동석하는 2+2 협상 및 통상장관급 협상이 1~2차례 더 이뤄진 후,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이달 30일께 협정문에 가(假)서명을 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 경우 한미 FTA 협정문도 함께 공개된다.
실제로 협상 막바지에 이르러 고위급 협상이 봇물 터지듯 활성화되고 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수전 슈워브 미 무역대표부(USTR) 2월 26~27일 미 워싱턴에서 통상장관 회담을 가진 데 이어 오는 20일께 다시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도 2월 27일~3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웬디 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와 만남을 가졌고, 앞으로도 이런 만남이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당초 예상보다 낮은 수준에서 협정이 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정부 쪽 수사에 가깝다. 통상교섭본부는 한미 FTA를 체결해야 할 가장 큰 명분들로 △섬유제품, 자동차 등의 대미수출 증대 △서비스 시장 개방으로 인한 국제경쟁력 상승효과 △미 반덤핑 제도의 개선 등을 선전해 왔지만, 이 부분에서 얻어낸 것이 전무하다시피 하자 ‘협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낮은 수준의 FTA를 체결하기로 했다’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수전 슈워브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연합뉴스
’무역구제-車-藥’ 3중 양보로…투자자-국가 소송제도 포기 분위기
협상 종반부 들어 가장 큰 관심을 받았던 무역구제(반덤핑)-자동차·의약품 빅딜은 ‘빅딜의 단계’에서 ‘한국 측 양보 수위 조절 단계’로 넘어간 상태기 때문에 이번 8차 협상에서는 이와 관련해 양측 간 큰 이견이 돌출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김종훈 대표는 “협상 막바지에는 주고받기 내용을 일일이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한국 측이 이 세 분야에서 모두 양보를 하는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일단 한국 측은 자동차 분야에서의 양보를 위해 국내 사전정지 작업에 돌입한 상태다. 한국 측은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를 폐지하라는 미국 측 요구에 대응해, 자동차세를 5단계에서 3단계로, 특별소비세를 2단계에서 1단계로 각각 줄이는 한편 지하철 공채는 아예 폐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최근 미국 측 한미 FTA 관련 핵심 의원들이 미 행정부에 서한을 보내 자동차 관련 협상을 비판하고 한국 측이 이에 공식 반발하는 등 ‘밀고 당기기’ 형국이 연출되기도 했으나, 이 사안이 딜 브레이커(deal breaker, 협상 결렬 요인)까지는 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의약품 관련 협상에서는 한국 측 양보 기세가 확연하다. 통상교섭본부는 보건복지부의 고집대로 ‘건강보험 약값 적정화 방안’을 시행하는데 대한 미국 측 허락을 받은 만큼 나머지는 다 내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신약 특허기간 중 복제의약품의 시판 허가 차단 △특허 등록 및 품목 허가 소요기간은 특허권 행사 기간에서 제외 △품목 허가용 제출자료 중 미공개 자료의 제3자 원용 금지 △의약품 경제성 평가 및 약값 결정 결과에 대한 독립적인 이의신청 절차 마련 등 한국 측 양보안의 밑그림이 이번 8차 협상에서 조금이나마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한미 FTA의 기대이익이 가장 클 것이라고 통상교섭본부가 선전해 왔던 무역구제 분과에서는 한국 측이 사실상 협상을 포기한 상태에 가깝다. 한국 측은 지난 5차 협상 때 이미 제로잉(zeroing) 금지, 일몰재심(sunset review) 금지 등 핵심 요구사항을 철회한 데 이어, 마지막 요구사항으로 남았던 비합산(non-cumulation)도 받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상태다. 단, 미국 측이 한국 측 입장을 감안해 몇 가지 미미한 요구사항을 ‘shall(꼭 지킬 것이다)’이 아닌 ‘may(들어줄 수도 있다)’ 수준에서 받아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편 지난 7차 협상에서 수석대표급 협상 의제로 ‘영전’된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경우, 한미 양측이 남은 두 가지 쟁점에서 양보하는 모양새를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측은 수용(expropriation) 관련 분쟁은 국제해결절차가 아니라 국내구제절차를 밟도록 하자는 ‘큰’ 요구를 철회하는 대신, 미국 측은 간접수용(수용은 아니지만 수용과 같은 결과를 낳는 정부 정책) 예외조항의 예시에 부동산 정책과 조세 정책을 넣어달라는 ‘작은’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식으로 협상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 김종훈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미국 측 협상 수석대표.ⓒ연합뉴스
’퍼주기’ 협상 결과,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가 관건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농업 분과의 경우, 이번 8차 협상에서 한국 측 협상단이 기존의 U(Undefined, 관세철폐 이행기간 15년 이상) 품목 235개를 100개 수준으로 낮출 전망이다. 하지만 이는 소관부처인 농림부 측 입장이고 통상교섭본부 측은 50개만 민감품목으로 인정받아도 성공이라는 입장이어서, 개방 수위는 더 높아질 수 있다.
8차 협상에서도 ‘쌀 개방 제외’라는 성과가 공식적으로는 공표되지는 않을 예정이다. 한미 양측은 지난해 협상 초기에 한국 쌀 시장의 전면 개방은 없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상태지만, 한국 측으로서는 협상 타결을 발표하는 시점에 맞춰 ‘우리가 끈질긴 협상력을 발휘한 결과 쌀은 개방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선전할 카드를 아껴둬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5차 협상 때부터 고위급 협상으로 격상된 섬유 분과의 협상에서는 관세 철폐 수준의 상향 조정 및 원사 기준 원산지 판정 방식(얀 포워드)의 일부 예외 인정이라는 한국 측 요구와 우회수출 방지 및 세이프가드의 도입 등 미국 측 요구를 맞바꾸는 합의안의 대략적인 모습이 드러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농업-섬유의 빅딜에 대한 논의도 활성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서비스·투자 분야의 협상에서는 양측이 서로 국내적으로 민감한 사항은 일단 ‘피하고 보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서도 한국 측 양보 분위기가 확연하다. 한국 측은 미 연안 해운시장 개방이라는 핵심 요구사항을 접었고, 정부조달 분과의 협정을 한국 지방자치단체에는 적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 주(州)정부의 협정 적용 요구를 접기로 했다. 반면, △기간통신 사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49%) 완화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협정 적용 △우체국 보험 및 택배에 대한 정부 특혜 제거 △방통융합 서비스 시장의 개방 등 미국 측 핵심 요구사항들은 고스란히 고위급 협상으로 넘겨질 것으로 관측된다.
지적재산권 분과의 협상은 8차 협상에서 크게 진척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지재권 보호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천명한 한국 측이 이 분과 최대 쟁점인 저작자 사후 저작권 보호기간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하는데 합의해 주는 대신 온라인 저작물의 일시적 복제권 인정, 접근통제 방식의 기술적 보호조치 도입 등을 협정에서 배제하는 방향으로 한미 양측이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성공단산 상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는 문제도 8차 협상에서 해결되지 않고 고위급 협상 의제가 될 것이 확실시 된다. 한미 양측은 협상 초기부터 이 문제를 실무급에서 해결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난 7차례의 협상에서 한국 측은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입장을, 미국 측은 ‘한미 FTA는 한미 양국에만 적용된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기만 했다.
미 민주당의 의회장악 영향으로 미국 측이 노동 분과에서 △복수노조 허용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폐지 △노조 전임자 인정 △공무원 노조 인정 등과 같은 새로운 요구를 해올 가능성이 커지면서 이 분과가 막판 변수로 떠오르고 있긴 하지만, 역시 ‘딜 브레이커’가 될 정도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번 8차 협상에서는 노동 분과 등 협상이 사실상 마무리된 일부 분과의 협상이 열리지 않고 화상회의 등으로 대체된다.
노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