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藥은 ‘구조조정’…반덤핑은 ‘흐지부지’?
[한미FTA 쟁점별 최종점검(上)] 핵심 분과에서 뭘 얻었나?
2007-03-20 오전 10:18:40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고위급 협상이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공식으로 개시된 가운데, 이미 실무급 협상단의 손을 떠나 고위급 협상 테이블에 오른 자동차, 의약품, 무역구제(반덤핑), 섬유, 농업 등 5개 분야의 협상 진척 상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당초 미국 측이 무역구제에서 양보를 하면 한국 측이 자동차와 의약품에 양보를 하는 식으로 ‘자동차·의약품-무역구제 빅딜(big deal)’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셋이면서도 하나’로 취급되어 왔던 3개 분야의 협상은 한국 측이 협상 후반부에 이 3개 분야 전부에서 먼저 ‘양보’의 손길을 건넴으로써 다시 각 분야별 ‘스몰딜(small deal)’로 쪼개져 논의되고 있다.
이 중 자동차 관련 미국 측 요구가 협상 막바지에 이르러 더 강경해지고 그 수위도 높아지면서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업계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미 민주당의 집권 여파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공화당 발(發) 의약품 관련 요구가 후퇴한 것도 아니다. 반면 한미 FTA의 가장 큰 기대효과로 선전돼 왔던 ‘미 반덤핑 조치의 발동 남용 완화’에 대한 한국 측 요구는 계속해서 후퇴해 왔다.
이밖에 미국 측에 민감한 섬유 분야와 한국 측에 민감한 농업 분야의 협상이 당초 예상대로 난항 기류에 휩싸여 있다. 이들 분야에서는 협상 타결 직전까지 양측 간 줄다리기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둘러싼 양측 간 통상마찰은 한미 FTA의 몇 안 되는 ‘딜 브레이커(deal breaker, 협상 결렬 요인)’로 계속 꼽히고 있다.
△자동차: ‘한미FTA 딜 브레이커’ 1순위
자동차 분야의 협상은 애당초 한국 측이 미국 측에서 끈질기게 요구해 온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를 개편·폐지해 주면 미국 측이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 관세를 일부 인하해 주고, 그러면 다시 한국 측이 자동차 관세를 인하해 주는 방향으로 협상이 진척될 것으로 예상돼 왔다.
최근 한국 정부는 배기량 기준 세제에 해당하는 자동차세와 특별소비세를 각각 현행 5단계에서 3단계, 현행 2단계에서 1단계로 축소하는 한편 지하철 공채를 아예 폐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에서는 한국 정부가 한미 FTA 타결을 위해 국민국가의 조세 정책 권한마저 포기하려 한다는 비판이 일었으나, 정부는 ‘미국과 상관없이 우리 업계와 소비자도 세제 개편을 원한다’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하지만 이같은 한국 측 성의에 대해 미국 측이 보인 반응은 ‘성의’가 아니라 ‘더 거센 공격’이었다. 미국 측은 협상 막바지에 한미 FTA 자동차 협상을 △자동차 관세(8%)의 최단기 폐지 △배기량 기준 세제의 폐지 및 자동차 관련 기타 세제의 단일화 △한국 고유의 환경기준과 인증 포기 △’외제차 수입 반대 정서’를 제거하려는 한국 정부의 가시적인 노력 등이 모두 ‘한 세트’로 포함된 이른바 ‘구조조정 협상(structural impediment initiative, 상대국의 관세 및 비관세 정책을 논의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통상 협상의 수준을 넘어 상대국의 경제구조 자체를 논의 대상으로 삼는 협상)’으로 승격시켰다.
미국 측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배경에는 미 민주당의 정치적 기반인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 업계 그리고 노동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웬디 커틀러 미국 측 협상 수석대표는 8차 서울협상을 마친 후 ‘미 의회의 요구사항이 협상 막바지에 더 거세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미 행정부는 의회의 요구사항을 (협상에) 잘 반영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말한 바 있다.
현재 자동차 분야의 협상은 ‘한미 FTA 딜 브레이커’ 1순위로 꼽힌다.
△의약품: 이제는 ‘미국 요구 들어주기’만 남았다
의약품 분야의 협상에서도 미국 측의 공세가 강하다. 제약업이 미국 제2의 산업인 데에다,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제약업계의 로비가 매우 거세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이 분야의 협상은 협상 초기부터 ‘구조조정 협상’의 형태로 진행됐다.
미국 측은 △혁신적 신약(innovative drug, 기존 약에 비해 약효가 파격적으로 뛰어난 신약’)에 대한 정부 평가 △제네릭(generic, 신약의 특허기간이 만료된 후 신약과 동일한 방식으로 제조된 복제약)의 가격결정 구조 △의약품 유통체계에 대한 정부의 간섭 등 한국 의약품 시장의 모든 것이 “비(非)선진적”이고 “비(非)윤리적”이라며 노골적으로 불평해 왔다.
의약품 분야의 협상은 보건복지부가 천문학적인 수치로 쌓여가는 건강보험 적자를 보전하고자 ‘약값 적정화 방안(약값 대비 약효가 우수한 약만 건강보험 적용대상으로 선별·등재하는 포지티브 방식)’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협상 분과 가운데 최초로 협상 결렬 사태를 맞기도 했다. 기존의 네거티브 방식에도 불만이 많았던 미국 측은 ‘설상가상’으로 포지티브 방식까지 도입되자 “한국이 협상 도중 협상 의제(mandate)에 해당하는 사안을 멋대로 결정해 버렸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한국 측이 싱가포르 의약품 협상에서 약값 적정화 방안을 시행하는 대신 건강보험 적용대상 의약품 선정 절차 및 약값 결정 절차에 미국 제약회사가 체계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한 번 결정된 약값에 대해서도 이들이 사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위원회를 설치해 주기로 하는 등 대폭적인 양보를 하면서 협상은 다시 매끄럽게 진행돼 왔다.
현재 한미 양측 협상단 사이에 가장 첨예한 쟁점으로 남아 있는 것은 혁신적 신약에 대해 이른바 ‘A-7 가격(A-7 pricing,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등 선진 7개국의 평균 약값)’ 기준 최저가를 보장해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다. 미국 측은 A-7 최저가를 보장해 달라는 입장이지만, ‘건강보험 적자 보전’이라는 짐을 안고 있는 정부는 이런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형편이다.
△무역구제(반덤핑): ‘하나’ 받아낸 것도 어디냐고?
무역구제(반덤핑) 분야의 협상은 한국 정부가 한미 FTA 협상에서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있었고, 한국 재계가 한미 FTA를 찬성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 측 협상단은 ‘무역구제(Trade Remedy)’라는 이름의 분과를 설치하는 데 성공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이같은 ‘명분’만 챙겼지 실제 협상에서는 아무런 ‘실리’를 챙기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 왔다.
실제로 한국 측은 지난 5차 빅스카이협상에서 이 분야의 핵심 요구사항인 △제로잉(Zeroing,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낮은 경우만 덤핑마진에 산입하고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높은 경우는 마이너스로 계산하지 않고 제로(0)로 간주해 덤핑관세율을 높이는 것) 금지 △최소부과 원칙(Lesser Duty Rule, 덤핑마진과 피해마진 중 액수가 작은 것만큼만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도록 하는 것) 등 핵심 요구사항들을 대부분 접었다.
이같은 우리 측의 대폭적인 후퇴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이 ‘미 무역구제법의 제·개정을 요하는 요구사항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자, 한국 측은 사실상 마지막 남은 요구사항이었던 △비합산(non-cumulation, 덤핑에 의한 산업피해 평가 시 중국 등 다른 국가들로부터 수입된 동일물품도 조사대상으로 해 그 수입으로부터의 피해를 누적적으로 평가하는 것 금지) 요구마저 포기했다.
이 분과의 협상은 지난 6차 서울협상부터는 전혀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한국 측 협상단은 벌써부터 ‘무역구제 위원회(양국 무역구제 제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반덤핑 관련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상설위원회)의 설치’ 등 미 국내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국내 업계에 실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측은 이번 고위급 협상에서 무역구제 관련 마지노선을 제시하기로 한국 측에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 측이 획기적인 제안을 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미국 측이 한국 측의 ‘체면’을 조금 살려주는 수준에서 협상이 ‘조용히’ 마무리될 것으로 관측된다.
△섬유-농업: 어렵기는 하지만…원래부터 어려웠다
섬유 분야의 협상은 외관상으로는 한국 측이 공세를 취하고 미국 측은 방어를 하는 분야다. ‘섬유는 한국의 농업에 해당한다’고 할 만큼 미국 측에 민감한 산업이기 때문이다. 한국 측은 미국 측이 제시한 섬유 양허안이 우리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여러 차례 퇴짜를 놓았고, 이를 한국 측 협상단의 협상 실력으로 포장해 왔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한국 측이 ‘실제로 발동될 가능성이 없다’는 명분으로 섬유 세이프가드를 도입하겠다는 미국 측 입장을 수용하고, ‘예외 규정을 두면 된다’는 식으로 섬유제품의 원산지 기준의 원칙을 미국의 악명 높은 원사 기준(얀 포워드)으로 해주는 등 확연히 밀리는 협상을 해 왔다. 게다가 미국 측은 ‘중국산 섬유 제품이 한국산으로 둔갑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막아 달라’며 우회수출 방지 장치의 도입까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 농업 분야의 협상은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으로, 2004년 4월 발효된 한-칠레 FTA의 체결을 2년이나 늦춘 주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측 협상단이 ‘농업 개방과 한미 FTA로 인한 농업 분야의 피해는 불가피하다’는 ‘소신’을 가진 만큼 이 분야의 협상은 적어도 협상 테이블에서만큼은 ‘딜 브레이커’가 되지 않을 것으로 관측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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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농업 분과의 협상은 각 품목의 관세철폐 이행기간에 대한 논의가 거의 마무리된 상태에서 △쌀, 쇠고기, 과일류, 채소류, 어류 등 민감 농산물의 개방 예외 또는 관세철폐 이행기간 장기화 여부 △저율할당관세(TRQ, 쿼터 물량에는 저율 관세를 적용하고, 초과 물량에 대해서는 고율 관세를 적용하는 방식), 농업 특별 세이프가드(safeguard, 수입 농산물 급증으로 국내 농업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경우, 일시적으로 관세를 인상하거나 수입물량을 한정하는 것)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미 양측이 협상 막바지에 농업-섬유 빅딜을 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으나, 정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20일(현지시간)부터 이틀 간 열리는 섬유 분야의 별도 협상을 위해 19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이재훈 산업자원부 제2차관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농업-섬유 간 빅딜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미국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노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