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줄 잘못 맸다고 두들겨 패는 형을 피해 중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상경한 소년, 장가도 못 가고 막걸리 배달을 비롯해 온갖 허드렛 일로 밥벌이를 했던 젊은이, 봉천동 철거촌에서 여성 활동가를 두들겨 패던 철거용역을 보며 두려워 피했던 중년 사내, 앞에 나서지 않고 묵묵히 뒷자리를 지켰던 늦깍이 사회운동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쳤으나 불과 2년 뒤 한미FTA를 추진하는 대통령을 보며 절망했던 진보정당 당원, ‘나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적이 없다’며 부끄러워하다 결국 결국 자신을 버리고야 만 고(故) 허세욱 씨가 16일 오전 한줌 재로 변했다. (☞ 관련 기사 : “가방끈 짧다고 시대의 진실 모를까”)
허세욱 씨 유해, 성남화장장에 합사…바람에 날린 유해 일부, 장례위에 전달
경기도 안성 성요셉 병원에 안치돼 있던 허 씨의 시신은 허 씨 유가족들의 뜻에 따라 이날 오전 6시 30분 성남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오전 8시 20분께 화장장에 도착한 허 씨의 시신은 사망 후 24시간이 지나야 화장할 수 있다는 법령에 따라 오전 11시 28분에 화장됐다. 화장된 허 씨의 유해는 다른 유해와 함께 성남 화장장에 합사됐다.
유가족들은 허 씨의 장례에 참여하길 희망해 온 ‘한미 FTA 무효 민중민주 노동열사 허세욱 동지 장례대책위원회’(장례위) 측에 알리지 않은 가운데 화장 절차를 진행했으나, 양 측 간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뒤따라간 노동계 인사들과 유가족 30여 명이 허 씨의 화장 절차를 지켜봤다.
이 자리에 있던 구수영 민주택시연맹 위원장은 “허 씨의 유해를 합사하는 과정에서 바람에 흩날린 유해 일부를 간신히 수습했다. 그것을 고이 싸서 장례위에 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허 씨의 상태, 경찰은 미리 알았는데…수술 각서 쓴 대책위는 왜?”
한편 이보다 조금 앞선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는 한미FTA 저지 범국본 오종렬 공동대표,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등 장례위 관계자 1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장례위 관계자들은 “허 씨의 마지막 길을 유가족과 함께 모시고 싶다. 그러나 유가족이 끝내 거부한다면 별도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회견에서 허 씨 유가족 및 허 씨의 치료를 담당한 한강성심병원 측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오종렬 공동대표는 “대책위(현 장례위)는 허 씨 수술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각서까지 썼다. 하지만 병상에 있는 허세욱 씨를 단 한 차례도 면회할 수 없었다”며 면회를 막은 유가족 측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최근 단식을 푼 문성현 민노당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 대표는 “허 씨 주치의인 김종현 한강성심병원 화상센터소장이 고인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보고를 지난 10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김 소장은 지난 12일 대책위 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상태가 호전됐다’고 말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말을 믿고 허 씨가 2~3차례의 수술만 더 받고나면 회복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는 것이다. 이어 문 대표는 “병원 외에도 경찰이나 관계 기관들은 고인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사망 수 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대책위에 그 사실을 숨겼다”며 “수술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한 대책위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문 대표는 “병원 측이 대책위에 고인의 사망 사실을 통보하지 않아서 대책위는 고인이 사망한 지 20분이 지나서야 경찰을 통해 알게 됐고, 그 사이 시신이 성요셉병원으로 옮겨졌다”며 “병원 측은 왜 시신을 옮겼는지, 어떻게 옮겼는지에 대해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는 18일, 서울 하얏트 호텔 앞에서 노제
이날 장례위는 유가족과 별도로 진행할 장례 일정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오는 18일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허 씨가 분신한 서울 하얏트 호텔 앞에서 노제를 거행한다.
오종렬 공동대표는 “다섯자리 수(1만 명) 이상이 참석하는 노제를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구체적인 시간과 계획은 추후 공개한다.
성현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