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국제 곡물가 급등에 대안없는 한국

2007년 10월 1일 (월) 09:10 미디어오늘

국제 곡물가 급등에 대안없는 한국

[경제뉴스 톺아읽기]쌀 빼면 곡물 자립도 5% 미만… FTA 이후 쌀값 폭등 걱정 왜 않나

[미디어오늘 이정환 기자] 국제 곡물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등하고 있다. 1일 아침 국내 주요 일간지들은 농수산물유통공사와 농촌경제연구원 발표를 인용, 이 문제를 비중 있게 다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다수 국민들처럼 국제 곡물 가격이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농수산물 분야에서 올해 상반기 54억3520만달러의 무역 적자를 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9.1% 늘어난 규모다. 한국일보는 2면 <반도체로 번 돈 곡물 사는데 다 써>에서 “이 같은 적자규모는 같은 기간 메모리 반도체 무역흑자 52억755만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반도체로 벌어들인 돈을 모두 해외에서 농축산물을 구입하는데 쓴 셈”이라고 지적했다.

▲ 한국일보 10월1일 2면.

매일경제는 31면 <국제 밀값 이러다 금값될라>에서 시카고상품거래소 자료를 인용, “밀 선물 가격이 올해 들어 78% 이상 급등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6일 기준으로 밀 가격은 1부셀에 9.34달러로, 1년 전과 2년 전에 비해 각각 2배와 3배씩 올랐다. 매경은 “밀 가격이 폭등하면서 식품업체들도 비용 상승분을 소매가에 전가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곡물이나 자원을 통해 국가 패권을 강화하려는 민족주의 움직임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 매일경제 10월1일 31면.

경향신문은 15면 <치솟는 국제 곡물 가격/경상수지·물가 비상등>에서 좀 더 구체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경향은 농촌경제연구원 보고서를 인용, “내년까지 미국, 러시아 등의 소맥 생산량이 증가할 전망이지만 소맥 재고량은 78년 이후 최저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향은 국제 곡물가격의 급등 원인으로 “브라질·미국을 중심으로 옥수수 등을 이용한 바이오 연료 개발이 본격화된 영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경향은 또 “중국 및 개발도상국들의 소비가 늘면서 곡물 수요가 많아지고 있는 반면 공급이 따라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다 “올해 세계적인 이상기후 현상과 미국 중부지역의 서리·홍수 등으로 곡물 수급여건이 더 나빠진 탓도 있다”고 지적했다.

▲ 경향신문 10월1일 15면.

밀가루, 가축 사료 등 덩달아 급등

밀은 식료품의 원료로 쓰이고 옥수수는 대부분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아직까지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배합사료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애그리브랜드퓨리나코리아는 품목별로 가격을 4.5% 올렸고 대한제당은 5% 올렸다. CJ제일제당은 밀가루 제품 출고 가격을 13~15%나 올렸다. 국제 곡물가격의 급등이 축산물 가격과 식료품 가격 급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이야기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배합사료 가격은 이미 올해 들어 30%나 뛰었다. 가뜩이나 수입 축산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축산 농가들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조선일보는 B3면 <밀가루가 금가루 되나… 곡물값 폭등에 아우성>에서 제빵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 “빵 하나의 원가 중 밀가루 가격이 20%나 되는데 가격을 올리지 않으려면 나머지 부문에서 생산비를 줄여야 한다”고 전했다. 사료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도 사료값이 오르면 시차를 두고 축산물 가격이 오르곤 했다”며 “업계 구조조정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이 같은 현실은 우리가 농업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또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시장 개방이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농업에 대한 관심마저 소홀해진다면 위험한 일”이라며 “오히려 전략산업이라는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경쟁력을 높여 밀물처럼 밀려드는 수입 농산물과 경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10월1일 한국일보 사설.

한겨레도 사설에서 “국제 곡물 가격 상승을 계기로 우리 농업 살리기에 팔을 걷어 붙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차피 우리 농업은 경쟁력 없는 것 아니냐는 자조적인 말만 되풀이 한다면 이처럼 무책임한 말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국일보나 한겨레나 국내 농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문제의식을 환기하는데 그쳤을 뿐 명확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한국일보는 “대부분의 곡물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적 취약성을 감안하면 유사시에 대비해 세계 곡물 유통에 대한 장악력을 키워야한다”고 지적했다. “일찍 눈을 돌려 아시아 곡물 메이저가 된 일본의 사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개방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한겨레

한겨레는 “국제 곡물가격이 높아지는 만큼 우리 농업의 경쟁력도 높아지게 된다”면서 “농업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한겨레는 “농민들에게 돈으로 적자를 보전해주는 지금까지의 방식은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장기적인 체질 개선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 한겨레 10월1일 사설.

국내 언론의 고민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한겨레의 사설이 맺은 결론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한겨레 역시 “어차피 농수산물 시장의 점진적인 개방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인전하고 있다. 한겨레는 “농업을 살리는 일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지적했지만 어떻게 농업을 살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대부분 언론에서 우리나라의 곡물 자립도가 25%라고 인용하고 있지만 쌀을 빼면 곡물 자립도가 5% 미만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박스 기사 참조). 미국에 이어 EU(유럽연합), 아세안 등과 FTA가 통과되고 쌀 시장이 적극적으로 개방될 경우 머지 않은 미래에 쌀 가격이 지금의 밀과 옥수수처럼 1년 만에 두 배 이상 오르지 말란 보장이 없다.

쌀값도 밀·옥수수처럼 두배 이상 오른다

지난달 28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듯이 올해 초 멕시코에서는 옥수수 가격이 급등하고 멕시코 사람들의 주식인 또띠야 가격이 뛰어오르면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멕시코 정부는 가격 상한선까지 설정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한 상태다. 이탈리아 상점들은 급등하는 파스타 가격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파키스탄은 음식 가격 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밀 수출도 제한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빵값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끔찍한 상황이 곧 우리에게도 닥칠 거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 또 하나는 세계 곡물 시장의 75%를 카길과 ADM, 두 회사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 콘아그라와 루이드레퓌스와 분게를 포함한 이른바 5대 곡물 메이저의 시장 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옥수수의 경우 상위 3개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81%가 넘은 콩과 밀은 각각 65%와 61%씩이다. 자유무역이 확산되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 플로리다에서 인산 비료를 만들고 이 비료로 아르헨티나에서 대두를 키우고 이 대두로 태국의 닭을 먹이고 이 닭고기를 다시 가공해서 일본의 슈퍼마켓에 파는데 이 모든 과정이 카길의 사업 부문과 사업 영역이다. 곡물 메이저들은 세계 식품 시장을 장악하고 이제는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힘까지 갖게 됐다. 공급이 부족하고 곡물 가격이 치솟아도 이들 곡물 메이저들은 그만큼 가격을 올려 받으면 그만이다.

▲ 미국 미네소타 세비지에 있는 카길 공장 / 플리커.

이제라도 쌀 시장 개방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할 때다. 국제 곡물가격 급등을 강 건너 불구경처럼 방관하거나 밀가루나 가축 사료 등의 문제로 마음 편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 쌀값 하락에 따른 농가의 소득감소분을 보전해주기 위해 쌀소득보전 직불금 7288억원을 반영하고, 중장기적으로 농가단위의 소득안정직불제 도입을 위해 내년부터 농업경영체 등록제를 시행(95억원)하기로 했다. 시장을 개방하고 사후약방문을 쓸 게 아니라 시장을 강화하는 좀 더 적극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반도체로 번 돈 곡물 사는데 다 쓴다”는 지적도 깊이 고민해볼 문제다. 머지 않아 반도체와 자동차와 선박으로 번 돈을 곡물 사는데 다 쓰게 될지도 모른다.

쌀 빼면 곡물 자립도 5% 미만

농림부가 지난해 발간한 농림업 주요통계를 보면 200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사료 소비량은 2014만톤, 이 가운데 배합사료 소비량이 1514만톤을 차지한다. 배합사료에 쓰이는 곡물은 모두 818만톤으로 우리나라 전체 곡물 소비량 1979만톤의 41.3%에 이른다. 문제는 배합사료의 원료 가운데 수입 원료가 1140만톤, 75.3%에 이른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나라 전체 곡물의 41.3%를 소와 돼지와 닭들이 먹는데 그 75.3%가 수입 곡물이라는 이야기다. 원료로 쓰이는 곡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사료곡물 837만톤 가운데 79.2%를 차지하는 옥수수는 모두 663톤, 그 가운데 국산은 1만3천톤 밖에 안 된다.

배합 사료에 들어가는 옥수수의 자급비율은 0.02% 밖에 안 된다. 옥수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료 곡물도 174톤 가운데 국산은 17톤으로 10%에도 못 미친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료 곡물 수입은 1980년 201만톤에서 2005년에는 818만톤으로 네 배 이상 늘어났다. 우리나라 쌀 소비량이 523만톤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곡물 자립도는 29.3%다. 1979만톤 가운데 1399만톤을 수입했다. 30개 OECD(경제개발국기구) 회원국들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 만약 그나마 어렵게 지키고 있는 쌀 523만톤을 빼고 계산하면 이 비율은 5% 밑으로 줄어든다. 쌀만 지켰을 뿐 이미 곡물 시장을 송두리째 내준 상태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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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게 왔다 밀가루가 금가루 되나…

2007년 10월 1일 (월) 04:00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