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미국’으로 가려 하는가”
‘지옥 같은’ 미국 현실 까발린 영화 <식코>
2008-03-18 오후 4:54:40
아직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어느 날 밤 갑자기 40도까지 오르는 고열에 신음하고 있다. 아이 어머니인 당신의 선택은?
물어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다. 당연히 “가까운 병원으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간다”가 답이다. 그런데 그 병원 응급실에서 아이가 어느 보험에 가입돼 있는지부터 살피고 있다면?
역시 누구나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더 기막힌 것은 딸이 가입한 보험회사에서 “그 병원에서는 치료를 ‘승인’할 수 없으니 우리 보험회사와 연계된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는 통보가 날아온다면?
의사를 붙잡고 아무리 울며불며 매달려 봤자 소용없다. 결국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보험회사의 지시대로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 몇 시간 동안 아이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미래’이 될지 모르는 ‘미국의 현실’
▲ 오는 4월 3일 전국 30여 개 극장에서 국내 개봉?앞두고 있는 <식코>가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프레시안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Sicko, 병자나 환자를 뜻하는 미국의 속어)> 속에 나오는 얘기다. 오는 4월 3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식코>가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개봉 전부터 이미 인터넷을 중심으로 그 끔찍한 내용이 화제가 된 듯이, 2시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묘사된 미국의 의료 체계는 한 편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영화 속 이야기가 과연 남의 나라 일일까? <식코>의 국내개봉을 추진하고 ‘함께봐요 식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의료 시장화 정책’이 현실화된다면 <식코>는 한국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관련 기사 : “앞으로 손가락 2개 붙이는데 6840만 원 든다?”)
이명박 정부가 민간 의료 보험 활성화, 건강보험 당연 지정제 폐지, 영리의료법인 허용 등을 통해 의료제도를 ‘실용적(?)’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당연 지정제가 폐지되면, 건강보험증이 있어도 못 가는 병원이 생기고 당장 내 딸에게도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나의 일’이 될지 모르는 ‘끔찍한 미국 의료 제도’의 실상은 과연 어떨까?
돈 없으면 당연히, 돈 있어도 보험 가입 못하는 나라
민간 의료 보험 제도 아래서 돈 없는 사람은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보험료가 비싸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의료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5000만 명(전체 인구의 20%)에 달한다. 당연히 이들은 ‘아파 죽을 지경’이 돼도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아담도 마찬가지다. 사고로 부상을 당한 아담은 혼자서 자신의 다리를 바늘로 꿰메고 있다. 무어는 “이들은 안 아프게 해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니 당연히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의료 보험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죄명’이다.
’돈이 없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에서는 돈이 있어도 보험 회사에 가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183cm에 59kg은 저체중이라서, 155cm에 79kg은 너무 많아서 보험 가입을 거절당한다. 아플 때를 대비해 가입하는 보험인데, 조금이라도 ‘아팠던’ 경험이 있으면 모두 거절이다.
영화는 보험 판매원으로 일했던 베키 말키의 얘기를 들려준다. “가입 부적격 질환 목록이요? 무지하게 길어요. 이 집을 다 둘러쌀 정도죠.”
의료보험 있더라도 치료법과 약은 보험사가 결정한다
의료 보험에 가입돼 있더라도 내가 받을 수 있는 치료 방법이나 약물의 선택권은 보험사에게 있다. 의사도 환자 본인도 아니다. 보험회사는 대개 환자의 건강이 아니라 이윤을 염두에 두고 치료법과 약물을 선택한다.
한 미국 보험회사에서 심의위원으로 일했던 린다 피노는 “(그들은) 그것을 ‘치료 거부’가 아니라 ‘지급 거부’라고 부른다”고 털어놓았다.
피노는 “나는 내과 의사로서 환자에게 필요한 적절한 수술을 거절했다”라고 고백했다. 물론 그 환자는 결국 죽었다. 꼭 필요한 수술을 “필요 없다”고 한 대가로 피노 씨는 주급 몇 백 달러에서 수 십 만 달러를 받는 유능한 심의위원이 됐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려 하는 ‘민간 의료 보험 활성화’의 결말이다.
더욱이 보험회사는 어떻게든 치료비를 지급하지 않고자 애쓸 것이 분명하다. 이날 시사회에 앞서 ‘식코 보기 공동 캠페인’ 참가 단체들이 가진 기자 회견에서 건강연대 강창구 운영위원장은 “민간보험회사는 가입 단계에서는 갖은 감언이설로 유혹하지만 지급 단계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급을 안 하려 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비를 낼 돈이 없는 환자를 택시 태워 내다 버리기도 한다. 현대판 ‘고려장’이 병원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영화는 “심지어 정맥 주사를 꽂은 채로 버려지는 환자도 있다”고 증언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환영받고 있는 ‘영리의료법인 허용’이 가져 올 우리의 미래다.
왜 ‘캐나다·프랑스·영국’ 대신 ‘미국’인가?
모든 나라가 다 그런 것일까? 아니다.
22세에 자궁경부암에 걸린 싱글맘. 그녀는 미국 보험 회사에서 “자궁경부암에 걸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며 치료를 거부당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캐나다로 불법적으로 ‘밀입국’해 캐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캐나다가 이상한 것일까? 무어의 발길은 영국, 프랑스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무어는 “병원비는 얼마인가요? 돈이 없어 쫓겨난 경험은 없나요?”라고 묻는 자신이 ‘광대’가 된 느낌을 받는다. “치료비? 공짜”라는 답 때문이다.
영국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긴급하게 실려 온 환자의 치료비를 묻는 무어에게 병원 관계자는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그런 질문은 처음 들어본다”며 기막히다는 듯이 웃기도 했다. 심지어 이 병원은 병원비를 수납하는 원무과마저 아예 없다.
감독은 <식코> 관객의 대다수가 되리라 생각했을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잘 못 돼서 그렇게 못하는 것일까?”
동시에,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잘 못 돼서 저렇게 되려하는 것일까? 이명박은 왜 캐나다·프랑스·영국대신 오직 미국일까?”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 정책에 기대를 걸고 있는 당신이라면, 반드시 <식코>를 관람할 것을 권하고 싶다.
여정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