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들은 천생 사기꾼이라는 생각밖에…”
[인권오름] 불운의 스타 글리벡 <1>
2008-04-11 오후 12:11:15
”환자들이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약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약이 전달되지 않는 이유를 알기란 쉽지 않다.
마침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이 의약품의 연구, 개발, 생산, 공급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획 기사를 마련했다. 이번 기획에서 주로 다룬 소재는 한국에서 의약품접근권 운동의 출발점이 된 의약품 ‘글리벡’이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와 진보네트워크 센터에서 각각 활동하는 강아라 씨와 홍지 씨는 까다로운 내용을 부드럽게 전하기 위해 글리벡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글을 썼다. ‘글리벡’이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 글을 쓴 두 활동가는 글리벡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의약품에 대한 시민의 권리가 어디에서 가로막혀 있는지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총 4회에 걸쳐 진행될 이번 기획의 첫 번째 기사다. <편집자>
데뷔했을 때, 난 정말 내가 크게 뜰 줄 알았다. 물론 ’21세기 최고’로 뜨긴 떴다. 악명높은 가격으로 떠서 문제지만. 사는 게 원래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지만, 난 정말 억울하다. 구구절절 이야기하자면 한숨밖에 안 나오지만, 죄스러운 내 가격이 싫어도 나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당신들은 내 이야기를 한 번 들을 필요가 있다.
▲글리벡은 왜 불운의 스타가 되었을까. ⓒ인권오름
글리벡은 왜 불운의 스타가 되었을까. 아, 내가 누구인지 이야기를 안 했군. 난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다. 과거 내 이름은 STI571이었고, 아주 어렸을 때는 이마티닙(imatinib)이라고도 불렸다. 지금 사람들은 나를 보고 ‘글리벡(Gleevec 또는 Glivec)’이라고 하지. 어느 이름이 더 좋으냐면, 당연히 전자다. 내가 데뷔할 때 나에게 글리벡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 앞세워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고 다닌 그 원수 녀석 생각을 하면 이가 갈리거든. 그 녀석만 아니었으면 난 아마 지금쯤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21세기 최고의 스타로 기억되었을 텐데.
40년을 준비한 데뷔, 노바티스가 망쳐
1960년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과 관련된 염색체 이상을 발견했어. 연구가 이어지면서 백혈병의 원인이 되는 효소가 밝혀졌고 나의 데뷔가 준비되었지. 그 효소를 공략해 병을 치료할 약이 연구되는 데 30년의 시간이 걸렸다. 어떤 스타가 데뷔를 30년 동안 준비 하겠어? 그만큼 난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받고 등장한 몸이다. 그리고 1991년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나의 데뷔가 결정되었다.
물론 데뷔가 결정됐다고 바로 무대에 서는 것은 아니야. 오디션도 몇 번 참여하고, 리허설도 몇 차례씩이나 했다. 내가 21세기 최고의 신약 기술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완벽한 약의 모습으로 등장한 게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2004년의 일이지. 1960년부터 2004년까지 40년이라는 무명의 시간을 거쳐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을 때 그 기분! 요즘 극장가에서 섭외 1순위라는 변희봉 씨나 아시려나.
그런데 매스컴의 시끄러운 나팔소리에 잠깐 귀가 멀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이 없더라는…. 팬이 있어야 스타가 있는 법인데, 어찌 된 게 나는 팬이 한 명도 없는 스타가 돼있더라는 거지. 정말 눈물 나게 비참하더군.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원수 녀석, 나의 매니저에게 따져 물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이놈이 나를 두고 술수를 써서 사기 계약을 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종신 노예 계약서를 내 눈 앞에 들이대더라고.
그 원수 녀석의 이름은 ‘노바티스(Novartis)’라고 하니, 이 글 보는 사람들은 절대 잊지 마라. “노바티스는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고,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놈이 사기 칠 때 자주 쓰는 말인데 절대 속지 말기를.
생각해보면, 노바티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수상쩍긴 했다. 스위스계 제약회사인 녀석을 처음 만난 때가 1991년인데, 데뷔가 결정되며 세상에 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 치근덕거린 녀석이었다. 데뷔를 준비하던 30년의 시간 동안에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시장성’, 즉 돈이 될 만한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얼마 되지 않았거든.
’무시되는 질병’과 수많은 무명 스타들
나는 나중에라도 ‘시장성’이 입증되어 결국 21세기 최고의 신약 기술이라는 찬사를 받긴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스타 하나 배출되기 위해서 수많은 무명 약들이 눈물 흘리는 게 또 이 바닥 생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라, 별별 사연들이 다 있다. ‘무시되는 질병(neglected disease)’이라는 말 들어는 봤는지? 질병 사이에도 사농공상에 천출의 씨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 가장 많이 팔린 약 다섯 가지의 개발에 공적 자금이 투입된 비율. 77%에서 많게는 95%에 이른다. ⓒ인권오름
그런데도 제약회사들이 마치 우리의 유일한 은인인 척 하는 것 보면, 북극에서 에어컨도 팔아버릴 천생 사기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뭐 우리 입장에서는 데뷔를 해서 팬들의 기대와 지지를 배신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데뷔하기 전에 노바티스 같은 녀석들이 뭐라 뭐라 뻥을 쳐대도, 세상에 나를 알리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눈엣가시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자들 생각하며 참고 또 참은 세월
그렇게 참아가며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데 노바티스가 중간에 갑자기 계약을 해지하자고 생떼를 써대는 거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이 녀석 눈에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수가 많아 보이지 않았던 거고, 나의 시장성에 대해 계속 의심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갑자기 나에 대한 개발을 포기하겠다며 배 째라고 누워버리는 것 아니겠어?!!
나도 그 때 무척이나 열 받았지만, 나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기분이었을 거야. 그렇게 녀석한테 공적 자금 들이부은 건 그만큼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데, 이 녀석이 돈 부족하다고 강짜로 들이댔으니. 팬들에게 이렇게 스타를 망신시키는 소속사가 세상에 어디 있는지 몰라. 내가 그 때 낯부끄러워서 사람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니까. 데뷔를 준비한 시간이 아깝고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계약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도 없고, 녀석을 쥐어 팰 수도 없고…. 결국 2,0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미국식품의약품안전국에 청원을 냈고, 덕분에 나는 1998년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데뷔할 수 있어 다행이긴 했지만 희귀의약품 지정은 노바티스한테 한 몫 확실히 안겨줬지. 정부가 노바티스에게 연구비 지원뿐만 아니라, 개발비용에 대한 세금 혜택 등 온갖 멍석을 다 깔아 줬다는 이야기지.
이 때 정말 소속사 바꾸고 싶었다. 툭하면 돈 없다고 배 까고 드러눕는 노바티스 같은 녀석을 누가 매니저로 삼고 싶겠어. 게다가 그 녀석은 돈에 눈이 멀어 나를 이 바닥에서 영영 매장시키려고까지 했지. 하지만 1960년 나의 존재가 예고된 그 때부터 나를 믿고 끝없이 기다려줬던 환자들, 그리고 얼굴조차 모르는 민중들을 위해서 데뷔 때까지만 참고 또 참자고 생각했어. 중간에 포기하면 아니한 것만 못하잖아.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잖아. 하지만 참고 참으니까 오히려 노바티스 저 녀석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지.
녀석과 내가 맺은 불공정하다 못해 살인적인 종신 고리대 사기 계약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활동가 강아라,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