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프리즘] 코코아 우유값 / 정세라
» 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
코코아 우유를 마셨다. 저소득층 공부방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엄마 샘’(선생님)이 점심 먹고 가라는데, 바빠서 그냥 가겠다 하니, 끝끝내 우유 하나를 떠안긴다.
샘은 최근 우유만 남기고 요구르트를 끊었다 했다. 값이 개당 100원씩 올랐다는데, 구청 급식비는 오른 게 없어서란다.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우유를 마시는데, 달콤한 우유가 ‘꿀렁’ 목에 걸렸다.
가난과 고통이 도처에서 눈에 띈다. 서울 을지로엔 말 못하는 걸인이 울음 같은 비명으로 행인을 붙잡는다. 지하철역엔 알코올 중독을 달고 사는 노숙인들이 찬바닥 냉기를 그저 견디고 있다.
누구는 이런 책임을 개인의 게으름이나 도덕적 해이에 돌린다. 누구는 사회적 약자의 경쟁 패배와 강요된 무기력으로 돌린다. 그러나 책임이 어디에 있든, 이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도 사람의 아이를 낳아 기른다.
공부방에는 이혼한 엄마와 고시원에 사는 초등학생이 있었다. 아이 엄마는 식당일을 다니지만, 몸도 마음도 피폐했다. 사람들이 “정신이 이상하다”고 수군댈 정도였다. 엄마는 딸애에게 “나한테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울먹인다. 하지만 일이 없는 날이면 그저 술에 기댈 뿐이다.
반지하 단칸방에 사는 자매는 이웃 어른이 공부방에 어려운 사정을 알려왔다. 아버지는 이름 모를 병으로 머리카락과 눈썹이 다 빠졌다. 대인기피증이 심해서 일하기도 어렵다. 어머니는 가출한 지 오랜데, 자매는 굶기를 밥먹듯 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고통은 딱히 책임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는 엄마 품에 안겨 영어 유치원을 드나들지만, 누구는 초등학교를 마치도록 한글이 서투른데도 방치된다.
고통은 덧나고, 번져 나간다. 고시원 아이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용케 공부는 잘한다는 중학생 남자 아이는 가끔씩 책상에 머리를 짓찧고 자해를 해서 주변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서류나 통계로 은폐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부는 내년도 기초수급 대상을 올해보다 1만명 줄인 예산안을 제출했다. 올해 159만6천명치 예산을 배정했는데, 실제 수급자는 10월말 현재 153만2천명에 그쳤다는 이유를 들었다.
왜 돈이 남았을까? 일선 공무원들은 “수급자 수는 예산 여유를 따라가기 마련”이라고 털어놓는다. 돈이 달리는데, 서류 조건이 모호한 실질 빈곤층을 구제할 이유는 없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든 서류상의 생계 부양자가 있으면 그만이다. 이들의 가난을 책상 행정으로 은폐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국회가 내년도 예산 심사에 한창이다. 보건복지가족위는 복지부 소관 일반 예산을 5900억원 늘려놨다. 여기에는 급식비 증액은 물론 기초수급을 올해 수준으로 회복하는 안 등이 들어 있다.
그러나 상임위가 살려낸 예산이 예결특위를 거치며 무참히 잘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동료 의원이 지역구 사업 예산에 안달하면, 고시원 모녀나 단칸방 부녀는 다음 차례로 밀려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지난해 예결특위에선 차상위 계층이란 말뜻도 모르는 의원이 복지예산 삭감을 닦달해, 쓴웃음을 자아냈다.
예산안 처리는 법정 시한을 넘길 모양이다. 야당은 사회간접자본 예산을 복지로 돌려쓰자 하지만, 여당의 반대는 녹록지 않을 듯하다.
혹한의 계절, 상대적 빈곤선 아래 놓인 아이들이 11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코코아 우유 예산을 깎아내는 야만적 사회를 저어할 따름이다.
정세라 사회정책팀 기자sera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