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창고에 처박힌 한 대형병원의 ‘인권위 진정함’

창고에 처박힌 한 대형병원의 ‘인권위 진정함’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환자들의 자유로운 진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정함 제도가 유명무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인권위의 진정함을 정신과 병동 내 창고에 방치했다. 이 창고는 환자복과 베개, 의료보조기 등 비품을 보관하는 곳으로, 열쇠로 문을 열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환자들의 출입은 불가능하다. 창고 벽에 걸린 진정함에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강남성모병원’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찍혀있다.


강남성모병원이 공개된 장소에 있어야 할 ‘인권위 진정함’을 환자들의 출입이 차단된 창고에 방치해뒀다.


창고에 방치한 진정함 밑에는 ‘인권위에서 온다는 전화 받은 사람은 속히 Open쪽 진정함 자리에 걸어두라’는 알림(?)이 함께 붙어있다.

-고의적 방치…인권위 “진정방해 행위 처벌대상”-

국가인권위원회법 시행령 제2조는 구금·보호시설의 장은 시설 안에 진정함을 설치하고 매일 진정함을 확인해야 하며 진정함에 진정서나 서면이 들어있을 때는 지체 없이 인권위에 송부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진정함 설치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게 인권위의 설명이다.

문제는 강남성모병원의 이 같은 방치가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병원은 진정함과 함께 ‘알림’도 붙여놓았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알림’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온다는 전화 받은 사람은 속히 Open쪽 진정함 자리에 걸어두었다가 인권위에서 가고난 후 다시 본 위치로 옮겨 놓는다”는 상세한 지침까지 붙여놨다. 즉 인권위 조사가 있을 때만 진정함을 밖에 내놓고, 평소에는 창고신세라는 것. 병원 측이 진정함의 진정서를 인권위에 보내지 않아 문제가 됐던 적은 많지만 진정함을 고의로 방치한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보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병원에서, 가톨릭을 내세운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더 어이가 없다”며 “정신과는 폐쇄병동인데 진정함을 그나마도 공개된 곳에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인권을 유린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병원 측은 처음에는 “인권위 진정함이 무엇이냐. 병원 곳곳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니 사실 확인을 해봐야 겠다”고 밝혔다. 이후 “지금은 복도에 잘 걸려있다. 과거의 일”이라면서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 자세한 경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청소 등의 이유로 잠깐 창고에 넣어뒀던 것 아니겠냐”며 “누가, 언제, 왜 창고에 넣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창고에 진정함과 함께 걸려있던 ‘알림’에 대해서도 “그런 적 없다. 확인 결과 지금은 없다”고만 답했다.

인권위는 강남성모병원의 진정함 방치에 대해 “진정함을 창고에 넣어둔 것은 환자들의 진정을 방해한 행위로 인권위법 제31조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며 “조사 여부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인권위법 제57조에 의하면 정신병원의 진정서 개봉 및 은닉, 폐기 등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 “진정함 ‘있으나마나’…그럴 바에야 없애달라” -

인권위 진정함의 문제는 비단 강남성모병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함 설치부터 관리까지 병원에서 도맡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게 정신병원 입원 경력이 있는 이들의 증언이다. 진정함이 공개된 곳에 놓여도, 진정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다함께 참여하는 정신병원 인권모임’ 운영자 한승철씨(43)는 “진정함이 정신과 병동마다 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환자들도 안다”며 “병원 직원들이 진정함을 관리하고 열람하는데 제대로 된 진정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신병원 입원 경력이 있는 김모씨(53)도 “병원에서 당한 인권침해를 적어 진정함에 넣었지만 6개월, 1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며 “나중에서야 ‘내가 순진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한 여성도 인권위와의 상담에서 “진정함 열쇠를 인권위에서 관리하는 줄 알고 눈을 피해 진정서를 넣었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 꺼내보고 ‘글씨체를 조사하면 누군지 다 안다’면서 진정서를 찢어 폐기했다”며 “진정함이 ‘형식’ 일뿐, 오히려 병원이 진정서를 넣은 환자를 요주의 인물로 분류해 협박하는데 악용되기까지 한다”고 호소했다. 이 여성은 “이럴 바에야 차라리 진정함을 없애달라”고 답답해했다.

인권위는 현행 진정함 제도와 관리·감독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러나 인력과 예산 문제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권위 윤설아 홍보협력팀 사무관은 “현재 진정함은 구금시설에서 스스로 설치하도록 돼 있지만 다수인 보호시설의 경우 미비한 곳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며 “정기적인 모니터링은 못하지만 인권위가 아무런 활동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함을 제작·보급하고 시설에 대한 인권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다수인 보호시설에서의 진정접수는 2002년 34건에서 2006년 705건, 2007년 1292건, 2008년 1989건으로 증가했다면서 “다수인 보호시설의 인권문제는 인권위가 중요하게 추진하는 정책”이라며 “그만큼 징계 권고도 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혔다.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입력 : 2009-01-08-13:44:10ㅣ수정 : 2009-01-08 13:4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