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조용하던 협상에 ‘의약품 특허’ 돌발변수

[단독] 조용하던 협상에 ‘의약품 특허’ 돌발변수
한-유럽연합 FTA ‘특허-허가 연계’
특허권자 문제제기땐 정부 허가 못받아
“국민건강권 직결”…유럽연합법 위반 지적

  김기태 기자  

  


  
국내 제약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특허-허가 연계’ 조항이 한-유럽 자유무역협정에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앞으로 유럽연합과의 협상과정에 굵직한 변수 하나가 추가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견줘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돼오던 협상과정에 새로운 고비를 맞은 셈이다. 특히 ‘특허-허가 연계’ 조항은 국내 제약업계는 물론, 국민 의약품 접근권과 얽혀 있어 커다란 파장이 예상된다.

■ 국내 제약업체에 ‘재앙’

특허-허가 연계 조항에 따르면, 국내의 제약회사가 후발 의약품을 개발할 때 특허권자가 문제제기를 할 경우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을 수가 없게 된다. 특허권의 침해여부는 통상 당사자 사이에서 조정되거나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 제도 아래에서는 의약품에 한해서 당국이 특허권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게 된다. 국내 후발 제약회사의 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법적장치인 셈이다.

실제로 우리 정부도 과거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의약품 협상 결과로 인한 손실의 약 90%는 특허-허가 연계 조항에 따른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당시 정부는 특허-허가 연계 조항으로 인해 후발 의약품의 시장진입이 평균 9개월 정도 지연되고, 특허분쟁 증가율이 40% 가량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하고, 이에 따른 국내 제약업계의 손실이 해마다 최고 38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대해 한미에프티에이범국민운동본부 등에서는 정부의 추산이 손실액을 지나치게 축소했다며 피해액이 8730억~2조2413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은 “특허-허가 연계 조항으로 인한 문제는 국내 제약 업체가 피해를 보는 수준을 넘어서 국민들이 저렴한 가격의 후발 의약품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제한된다는 점에서 국민 건강권과 직결된다”며 “그런 의미에서 한-유럽 자유무역협정의 파장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 미국·유럽에서도 ‘독소’?

이 조항은 미국과 유럽 내부에서도 지적재산권 관련 협정에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혀왔다. 미국은 2007년 발표된 이른바 ‘신통상정책’에서 특허 허가 절차 지연에 따라 일반인의 의약품에 대한 접근을 막는 독소조항이라며 이를 삭제했다. 이후 미국은 이후 콜롬비아, 파나마 등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이 조항을 담지 않았다. 유럽연합 역시 특허-허가 연계 조항이 저개발국 국가에서 후발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차단한다는 이유로 도입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다. 실제로 독일과 벨기에, 프랑스, 스웨덴 등의 국가에서 특허-허가 연계조항의 도입을 시도했으나, 법원이나 유럽연합의 개입으로 무산된 바가 있다.

이번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에서 특허-허가 연계 조항이 포함됐다는 유럽연합의 공식입장이 나오게 된 계기도 이 조항이 유럽연합의 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유럽의회의 지적에 따른 것이다. 캐서린 애슈턴 유럽연합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의 제약회사들이 한국에서 미국과 동등하게 특허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밝히면서도 동시에 “한국과의 에프티에이를 통해서 유럽연합의 규정이나 정책을 변경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나타냈다. 한국의 후발 제약회사가 유럽연합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