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보수가 봐도 거꾸로 가는 의료 민영화
경향신문 원문 기사전송 2009-06-23 00:09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정부의 영리병원 허용 방침에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얼마 전 “세계에 희한한 제도(건강보험제도)를 우리가 갖고 있는데 소중하게 갖춰 나가야 한다”며 영리병원 허용에 반대했던 그는 엊그제 “미국이 의료 민영화의 실패를 개혁하고 있다”면서 “(영리병원을 도입하려는) 우리는 거꾸로 가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이사장의 발언은 정부가 영리병원 허용을 밀어붙인다면 의료 민영화의 가속화로 건강보험제도가 붕괴될 수 있다는 보건의료계의 광범한 우려를 대변하고 있다. 정부는 안 한다고 해놓고선 지난달 ‘의료서비스 선진화’란 이름으로 영리병원 허용 방침을 밝혀 의료 민영화 논란에 불을 지폈다. 영리병원은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허용되어야 하며, 영리병원이 곧 의료민영화는 아니라고 정부는 강변한다. 하지만 공공의료기관이 10%도 안되고 건강보험 보장성이 60%대에 불과한 우리의 현실에서 영리병원 허용으로 인한 의료 양극화와 의료시스템 붕괴가 결코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니다.
의료 민영화란 영리병원과 민간의료보험을 활성화해 정부의 건강보험 재정부담을 시장에 떠넘기겠다는 발상이다. 미국이 그 길을 걷다 지금 파탄에 직면했다. 세계에서 의료에 세금을 가장 많이 쓰면서도 국민 7명 중 1명은 병원 문턱에도 못가는 곳이 미국이다. 미국 정부가 시장에 내팽개쳤던 의료부문을 국가가 끌어안으려 하는데, 이 정부는 의료비 지원을 늘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미국이 실패한 시장화의 길로 가겠다고 하니 ‘거꾸로 간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내로라하는 보수 정치인 출신이다. 그가 영리병원에 반대하는 것은 건보 이사장이라는 자리 때문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그는 국가가 의료비의 80% 이상을 부담하는 유럽 선진국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런 제도를 취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영리병원 도입과 의료 민영화 논란은 보·혁 이념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아프면 누구나 질 좋은 치료를 받도록 국가의 역할을 확대하는 게 의료 선진화다. 정부는 더 늦기 전에 발길을 돌려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