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바이러스의 습격, 신종플루② 신종플루와 ‘강제 실시’

“신종플루 치료제, 왜 한국은 생산을 주저하는가”
[바이러스의 습격, 신종플루②] 신종플루와 ‘강제 실시’
기사입력 2009-09-17 오전 11:26:19

     15일 국내에서 여덟 번째 신종플루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망자가 잇따르고, 언론을 통해서 사망자 카운트가 시작되면서 대중의 공포는 더욱 더 커지고 있다. 이번 신종플루의 치명률은 계절성 독감과 비교했을 때 비슷한 수준이거나 조금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신종플루의 높은 감염성을 염두에 두고 큰 우려를 표명한다. 잇따른 국내 사망자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고위험군은 이미 위험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병원성의 변종이 생길 경우 치명적인 전염병 사태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 정부는 항바이러스제 비축, 백신의 준비 등 의료 대응 체계가 매우 부족해 해 더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시민·사회단체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에 대한 ‘강제 실시권’ 행사가 정부, 국회에서 논의되기도 했으나, 파장은 미미하다. 또 백신을 계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시설 확보 등에도 정부가 준비 부족으로 백신 대란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신종플루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프레시안>은 연구 공동체 ‘건강과대안’과 함께 5회에 걸쳐 신종플루를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을 살펴본다. 이번에는 남희섭 <건강과대안> 연구위원이 신종플루 치료제 타미플루를 둘러싸고 논란이 된 ‘강제 실시’를 둘러싼 오해를 해명한다. <편집자>

바이러스의 습격, 신종플루

① “신종플루, 왜 ‘돼지독감’이라고 부르지 못하나”

신종플루 감염 환자가 늘고 올가을 대유행 경고가 나오면서 치료제와 백신 확보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치료제를 더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민·사회단체와 일부 야당은 강제 실시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정부 당국자나 정치인, 언론, 심지어 학자들까지 함부로 강제 실시를 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이 경고에 으레 따라붙는 설명들이 있다. 후진국이나 하는 것을 우리가 하면 국제적 망신을 산다거나 통상 마찰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함부로 강제 실시를 발동하면 제약 업체의 투자 심리가 위축되어 장기적으로 의약품의 개발이 저해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급기야 ‘강제 실시=특허권 정지’라는 웃지 못 할 등식까지 등장했다.

강제 실시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대부분 특허 제도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특허 제도를 절반만 이해한 탓이기도 하지만, ‘강제 실시’란 용어가 형성하는 잘못된 이미지에 갇힌 때문이기도 하다. 특허 제도는 발명의 보호와 발명의 이용, 두 가지를 목적으로 한다. 발명의 보호가 특허 제도의 전부인 것으로 오해하면 강제 실시는 불가피한 최악의 경우에나 가능한 얘기가 된다.

그러나 발명의 이용을 특허 제도의 핵심 목적의 하나로 이해하면 강제 실시는 발명의 이용을 도모하는 자연스러운 정책 수단이 된다. 어느 사회건 특허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특허 기술이 사회적으로 널리 이용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특허 기술이 사회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면 특허권을 인정할 근거는 사라진다.

강제 실시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쉬운 예를 들어보자. 서울시가 상습 교통 정체 해소를 위해 길을 하나 새로 내기로 결정했다. 길을 낼 곳에는 개인들이 소유한 토지가 있을 텐데,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토지 소유주와 협의하거나 수용 절차를 통해 보상금을 지급하면 서울시는 이 토지를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 수 있다.

신종플루와 관련해 얘기되는 강제 실시도 이것과 비슷하다. 국내 제약 업체도 항바이러스제를 생산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서 길을 새로 내라는 것이다. 당연히 특허권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 따르면 이 보상금은 강제 실시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한 정당한 보상금이어야 한다.

그런데 토지 수용과 강제 실시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서울시가 길을 내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면 그 토지에 있던 건물을 철거해야 하고 토지 소유자는 다른 곳으로 떠나 더 이상 토지를 이용할 수 없다. 보상을 받더라도 토지 소유자에게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특허 강제 실시에는 이런 희생이 생기지 않는다. 강제 실시를 하더라도 특허권자의 생산 설비가 철거되지도 않고 특허권자의 약 생산이 중단되지도 않는다. 타미플루의 경우 로슈가 한국에 수입 판매하겠다고 식약청의 허가를 받은 지가 10년 가까이 된다. 강제 실시를 하더라도 로슈는 한국 시장에 판매하기로 허가받은 타미플루를 계속 판매할 수 있다.

특허권도 정지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로부터 ‘정당한’ 보상금을 받을 권리가 있고, 강제 실시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른 제약사를 상대로는 여전히 특허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강제 실시로 인해 로슈가 치러야 하는 희생이 있다면 시장 독점을 통해 얻었던 독점 이윤이 줄어들고 공급량을 임의로 조정할 수 없게 되는 정도다.

강제 실시를 하면 통상 마찰이 생긴다는 주장은, 서울시가 수용하려는 토지를 외국인이 소유한다고 통상 마찰을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 정부가 그렇게 강조하는 ‘국제 기준’만 보더라도 강제 실시는 통상 마찰과는 무관하다. 국제 통상 문제를 관장하는 세계무역기구에서 최고의사결정권을 갖는 각료회의에서 2001년에 그렇게 결정했으니 8년이나 된, 그야말로 ‘확립된’ 국제 기준이다.

2001년 ‘도하 각료선언’에 따르면, 세계무역기구 회원국은 강제 실시를 발동할 권리가 있고 어떤 경우에 강제 실시를 발동할지 판단할 자유가 있다(선언문 제5(b)항). 이 도하 선언이 나온 배경은 바로 개도국의 강제 실시를 선진국이 통상 문제로 시끄럽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 신종플루 치료제 타미플루. “강제 실시는 후진국이나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강제 실시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AP=뉴시스
강제 실시는 후진국이나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강제 실시를 하면 국제사회에서 신뢰가 떨어진다는 주장이 맞는다면, 국제적인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을 나라는 미국이다. 전 세계에서 강제 실시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 일방주의 또는 미국 예외주의가 말해주듯 다른 나라가 강제 실시를 하지 못하도록 가장 많은 방해를 하는 나라 역시 미국이다.

미국법의 강제 실시 규정을 보면 “설마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미국 정부가 특허를 사용하기 위해 강제 실시를 할 때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미국을 위해서”란 제한이 전부다. 미국 정부와 계약을 맺은 민간 기업도 이 규정에 따른 강제 실시를 할 수 있다. 특허권자와 미리 협의할 필요도 없고, 특허권이 있는지조차 조사할 필요가 없다. 나중에 특허권자가 나타나면 보상금을 주면 그만이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지금까지 사용한 강제 실시가 얼마나 되는지 전체 통계가 아예 있을 수 없다. 보상금 합의가 되지 않아 특허권자가 소송을 하면 비로소 통계에 잡히는데, 1917년부터 1994년 1/4분기까지 279건의 소송 사건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미국법의 정부 사용을 위한 강제 실시 규정은 소위 ‘특허 선진국’에 공통된 사항이다. 영국 역시 ‘국가사무(Crown use)’를 위한 강제 실시가 가능한 법률을 두고 있다. 영국 특허법에는 의약품의 생산과 공급은 ‘국가 사무’라고 아예 못을 박아 놓았다. 영국의 국가의료서비스(NHS) 지정 병원에서 값비싼 특허 의약품 대신 값싼 의약품을 환자에게 제공하는 것도 ‘국가 사무’에 해당한다는 판례까지 있다. 독일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독일 정부가 판단하면 강제 실시가 가능하도록 했다. 프랑스에서는 특정 의약품이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의약품의 공급이 불충분하거나 가격이 너무 높은 경우 정부사용을 위한 강제 실시가 가능하다.

이들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의 특허법은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일 때에만 정부 사용이 가능하도록 적용 범위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 공공복리를 위해 토지를 수용하는 것에 비해 권리의 제한 정도가 훨씬 약한 강제 실시의 적용 요건을 이처럼 지나치게 엄격하게 하면, 이번 신종플루 사례와 같이 정작 필요할 때에는 제도를 제때 활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니, 특허법을 고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강제 실시’는 ‘특허의 공공 사용’ 또는 ‘특허의 사회적 이용’이라 고쳐 부르고, 특허법도 ‘발명의 보호와 이용에 관한 법률’로 명칭을 바꾸면 강제 실시를 둘러싼 불필요한 오해나 소모적인 논쟁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희섭 변리사·건강과대안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