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막힌 선택’ 강요받은 국민 / 우석균
정부는 신종 플루 국가예방접종계획을 통해 인구의 35%인 1716만명에게 신종 플루 예방접종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접종 대상은 고위험군을 모두 포함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번 예방접종계획이 실제 의미하는 것은 고위험군 중 올해 내에 예방접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1000만명뿐이라는 점이다. 즉 65살 이상 노인과 당뇨병, 천식 등 만성질환자들의 경우는 1차 정점기를 넘겨 올해 안에 예방접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예방접종 우선순위 문제가 ‘과학적’ 문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신종 플루가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11~12월 중에 1차 정점기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당장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에 초·중등학생 3명, 20대 1명, 40대 1명, 노인 5명이 숨을 거뒀다. 이런 상황에서 예방접종을 노인 및 만성질환자, 혹은 어린이 중 어느 쪽을 연내에 하는가의 문제는 사망자를 어느 쪽에서 나오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인과 만성질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방접종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접종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많은 나라들에서 최우선 접종 대상자인 6개월 미만 어린이의 가족들과, 만성질환자들 중에서도 먹는 약으로 치료하는 당뇨병 환자들은 접종 대상에서 아예 빠졌다. 병원 가기가 힘들고 질병이 많은 장애인과 저소득층도 접종 대상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자녀들은 어찌할 것인가라는 등의 질문은 우문일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 65%의 국민은 내년 2월 이후에나 각자 알아서 3만원 이상을 내고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나마 다행이다. 1회 접종으로 충분하다는 판정이 내려져서 망정이지 애초 예상대로 2회 접종을 해야 했다면 상황은 더 심각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한국 정부만 유독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4년 동안 그리고 올해 초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는 백신이 부족한 몇 안 되는 정부 중 하나가 되었다. 상당수 나라들처럼 인구 50% 이상 정도의 백신 분량의 연내 확보가 예상된다면 어린이와 노인과 병자 모두에게 동시에 백신을 주면 된다.
난파선에서 구명정이 모자라고 그런 상황에서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자리를 내준다면 이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정부가 국민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 임무를 방기하여 백신이 모자라게 된 상황에서, 생사가 갈릴 수 있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국가에 의한 선택은 과학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 이 상황으로 생명을 잃는 사람들에 대한 살인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는 이미 전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방역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대통령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또 정부의 잘못으로 수백 수천만명이 백신을 제때 접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 몇 명이 백신을 먼저 맞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리도 없다. 어린이를 먼저 살릴 것인가 노인과 병자를 먼저 살릴 것인가의 기막힌 선택을 강요받은 국민들의 “불안과 동요”를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백신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정부의 사과다. 또 국가의 책무인 1조원에 달하는 신종 플루 예방접종비용 및 검사, 치료비 부담을 국민들에게 전가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약속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