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삼성 앞에서 사라진 ‘MB의 법과 원칙’ 이건희만을 위한 사면

삼성 앞에서 사라진 ‘MB의 법과 원칙’
이건희만을 위한 사면
국익 내세워 “지도층부터 비리척결” 팽개쳐
집회·파업·용산참사 등엔 가혹한 잣대 적용
세종시에 삼성그룹 유치위해 ‘빅딜’ 추측도
한겨레         황준범 기자
        
» ‘특혜’ 주었으니… 이명박 대통령이 2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특별사면안이 의결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특혜’ 받았으니…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8월14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삼성에스디에스(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발행 사건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뒤 돌아가고 있다(사진 오른쪽).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논란이 돼온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 문제는 전례가 드문 ‘연말 단독 사면’이라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29일 실체를 드러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유죄가 확정된 지 넉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이 전 회장에게 특별사면·복권을 베풀어줌으로써, 입버릇처럼 외쳐온 ‘법과 원칙’이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겐 무디고 서민·노동자에게만 엄격한 ‘공권력 편의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임을 입증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3일 법무부·국민권익위·법제처 업무보고 때만 해도 강한 어조로 법과 원칙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는 법을 지키라고 하고 정작 위에서는 범죄가 저질러지면 국민들이 어떻게 보겠느냐”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국격’과 연결시키며 “지도층부터 공직자, 고위직, 지도자급의 비리를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까지 말했다.

그래 놓고 이 대통령은 불과 엿새 만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가적 관점에서 결심했다”며 이 전 회장 사면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청와대는 “국익을 고려해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현 정부 임기 중에 발생한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는 공직자와 기업인을 불문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고, 이는 지금도 변함없다”는 설명도 내놨다. 시민들의 집회나 노동자 파업, 용산참사 등에 대해선 가혹하게 들이대던 ‘법과 원칙’의 잣대는 온데간데없다.

공식적인 설명과 달리, 이 전 회장 연말 사면 방침은 꽤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고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전했다. 후폭풍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보안을 유지하면서 사면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지켜봐온 셈이다. 최근 1~2주 사이 이 대통령이 언급한 지도층 불법과 토착비리 척결 의지는 그래서 더욱 이중적이고 공허하게 들린다.

청와대는 이 전 회장 1인만 사면하는 방안과 다른 경제인들을 포함하는 방안을 고민했지만, 여러 명을 사면할 경우 ‘사면권 남발’ 비판이 일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결국 청와대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국민적 염원’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이 전 회장 단독 사면으로 결정했다.

청와대 안에도 이 전 회장 사면에 반대하는 의견도 소수지만 있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이 이를 강행한 것은 최근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경제 회복 조짐과 이에 따른 지지도 상승과 자신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면 단행 시점도, 원전 수주로 이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오르는 시점이자 새해 연휴 직전인 연말로 택했다.

한편에서는 이 전 회장 사면의 실제 이유는 세종시 수정과 관련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이날 논평에서 “삼성그룹이 미래를 대비한 새로운 사업으로 구상하고 있는 생명공학 분야를 세종시에서 시작하도록 하기 위해 사면복권이라는 은전을 베푼 것이라고 본다”며 “이번 사면은 이 대통령과 이 전 회장 사이의 ‘빅딜 사면’인 셈”이라고 비판했다.

정부 관계자는 “삼성그룹 일부의 세종시 이전은 이 전 회장 사면과는 무관한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내년에는 6월 지방선거도 있어서 상반기까지는 사면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가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이 대통령이 ‘재벌권력 1인을 위한 표적 사면’을 단행한 첫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정권’이라는 시중의 비판도 감수해야 할 것 같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