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촛불’ 수배자 “MB, ‘부패가 뇌관’ 곧 식물 대통령 될 것” 김광일씨 인터뷰
“1년10개월 동안 저항의 현장 함께 못해 아쉽다”
한겨레 허재현 기자
‘촛불’ 2주년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2008년 5월2일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촛불이 100일을 넘기고,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질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촛불은 결국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쇠고기 재협상이라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촛불은 이후 상처투성이였다. 연행자 3000여 명, 기소자 1500여 명이라는 숫자가 촛불의 아픔을 대변한다. 여전히 수많은 ‘촛불 재판’이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 경찰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촛불을 드는 것만으로 해산시키고 잡아간다. ‘촛불 잡도리’, ‘촛불포비아’라는 비아냥이 들린다.
사실상 촛불은 꺼졌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싸움을 이어가는 사람이 있다. 2008년 촛불을 이끌었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마지막 수배자 김광일(35)씨다. 김씨는 촛불의 거리행진 당시 대열의 맨 앞을 이끈 행진팀장이었다. 그는 “정당하지 않는 촛불 수사에 응하지 않는 것이 나의 의무”라며 수배자의 길을 걷고 있다. 경찰이 체포영장을 발부한 날이 2008년 6월27일니까 어느덧 1년10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김씨 체포에 걸린 경찰 포상금은 300만 원에서 천만 원으로 높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촛불이 꺼지면서 김광일이라는 존재는 촛불 사이에서도 잊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왜 지금까지 체포에 불응하고 있을까? 촛불의 마지막 수배자로서 그는 촛불과 지금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김씨의 눈으로 촛불의 지난 2년과 현재를 되짚어 보았다.
김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프랑스 ‘68혁명’ 당시 ‘저들의 악몽이 우리의 꿈이다’ 라는 구호가 나온 적 있는데, 이명박 정부의 악몽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거리로 나서야 한다”며 “그러지 않으면 역으로 저들의 꿈이 우리의 악몽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래는 김씨와 나눈 인터뷰의 주요내용이다.
어머니가 준 네 잎 클로버 고이 품안에
-한눈에 보기에도 예전보다 말라 보인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몸무게가 65킬로그램까지 빠졌다. 광우병대책회의에서 활동하던 때에 비해 10킬로 정도 빠졌다. 수배생활을 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면 나태해지기 쉬운데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며 운동을 하고 있다.”
-수배 기간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
“2001년부터 운동의 조직자로 활동하며 이론을 탐구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주로 한국 정치와 사회에 대한 책을 읽고 조사를 하면서 보내고 있다. 활동에 제약이 많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다.”
-수배생활에서 힘든 점은 무엇인가?
“사람을 못 만나는 게 힘들다. 가족들도 전혀 못 만나고 저항의 현장을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
-가족과 아예 연락을 못 하나?
“경찰의 추적 1순위가 가족이다. 경찰이 친가인 해남, 외가인 조치원까지 찾아와 친척들을 만나고 갔다고 하더라. 지금까지 가족과는 통화를 한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김씨는 2008년 조계사에서 농성할 당시 어머니가 준 네 잎 클로버를 품에 갖고 있다가 보여주었다. 그는 얇게 코팅된 네 잎 클로버를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한다고 말했다.
“수배는 이명박 정부가 채운 족쇄”
-수배생활을 하면서 변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누군가가 말을 건네 오는 것이 두려워졌다. 가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내는 것이 어색하다. 얼마 전 거리에 나갔다가 누가 전단지를 나눠주려고, 내게 인사하는데 깜짝 놀랐다. 수배생활이 내 (활동적인) 심성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다.”
김씨는 1년 전 책을 냈다. ‘촛불 항쟁과 저항의 미래’라는 책에 그는 촛불 집회를 조직했던 사람으로서 느낀 소회와 앞으로의 전망 등을 담아냈다. 수배중이던 사람이 책까지 펴내 당시 경찰은 당혹해 했었다.
-그때 낸 책은 많이 팔렸나?
“정확한 판매 부수는 나도 잘 모른다. 출판사에 연락을 해보지 못했다. 다만, 누리꾼들은 내 책을 보며 통쾌해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책은 왜 냈나?
“2008년 촛불 시위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거대한 시위였다. 그러다 2008년 7월 5일 50만 명이 모인 뒤 정부의 탄압이 강경해지면서 사그라들었는데 당시 운동의 무엇이 장점이고 단점이었는 지 정리해두고 싶었다. ‘우리가 그런 거대한 시위를 해놓고도 왜 요구사항을 제대로 관철해내지 못한 것일까’ 이런 답답한 질문에 답변하고 싶었다.”
김씨는 2008년 광우병국민대책회에서 행진팀장을 맡기 이전부터 역동적인 활동가로 시민운동 진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2001~2003년), 효순·미선 여중생범대위(2002년), 파병반대국민행동(2003~2008년), 탄핵반대국민행동(2004년), 한미 FTA 저지범국민운동본부(2006~2007년) 등에서 활동했고 반신자유주의단체인 ‘다함께’의 운영위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수배생활을 시작하면서 모든 운동에서 손을 뗐다. 묻고 싶었다. 수배생활을 선택한 원칙주의가 오히려 자신의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는 이 질문에 이전보다는 조금 느린 어조로 대답했다.
“정당하지 않은 수사에 응하지 않는 것이 나의 의무”
“족쇄 맞다. 사실상 이명박 정부가 내게 채운 족쇄다. 하지만, 2008년 촛불 시위의 한복판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로서 정당하지 못한 ‘촛불 수사’에 응하지 않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경찰 조사를 받는 것 자체가 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경찰 조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진행되는 지가 중요하다. 내가 만약 지금 연행돼도 난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과 함께 조계사에서 농성했던 광우병 대책회의 활동가들은 모두 조사받고 풀려나 각자의 공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다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실용주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내 자신도 공개적으로 활동하면 좋겠지만 정부의 탄압에 맞선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런 뜻으로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김광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행진팀장이란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있다. 당신의 수배생활이 아무런 효과를 못 내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당장 사람들이 날 얼마나 알고 있을까에 대해 나도 물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투쟁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모든 투쟁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의 인지 속에 벌어지는 게 아니다. 적당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이 간첩의 사주로 벌어진 일이 아닌 독재에 맞선 투쟁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는 데도 수년이 걸리지 않았나.”
“마르크스주의자가 행진을 이끌면 안 되나?”
-광우병대책회의에서 왜 행진팀장을 맡았나?
“2008년 5월 24일 첫 거리 행진이 시작됐다. 당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거리 행진을 두고) 논쟁만 있었던 상태인데 시민들이 먼저 나가버렸다. 이때 대책회의가 거리행진을 책임감 있게 주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행진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초기에는 이런 주장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당시 행진에 열의가 있는 일부 단체들에게 책임이 돌아왔다. 그런 상황이 28일까지 이어졌고 내가 거리 행진을 조직하는 총대를 멨다.”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다함께의 운영위원인 김광일씨가 행진을 이끈 것에 대해 시민들은 반감을 갖기도 했다.
“일부 그런 시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보수신문들이 주로 그런 논조의 기사를 썼는데 운동을 분열시키려는 주장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가 행진을 이끌면 안되는가 되묻고 싶다.. 1987년 6월 항쟁에서도 대학에서든 거리에서든 행진을 이끌었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모종의 혁명가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게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투쟁을 잘 이끌었는지,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과 잘 소통했는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 대통령 중도하차는 늘 현실적인 문제”
-당신은 2009년 6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 같다고 인터뷰했다. 하지만, 촛불집회 2년 뒤 이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율은 40%를 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보나?
“지속적인 지지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기복이 있을 것이다. 또 전임 정부들의 3년차 지지율과 별 차이도 없는 수치다. 2008년 초 지지율이 워낙 떨어져서 지금 지지율이 많이 올랐다고 보이는 착시현상일 뿐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YS 정부 말기의 모습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아래로부터의 저항 때문에 타격을 받고 권력층 사이에 내홍이 생겨 분열된 뒤 YS는 사실상 식물 대통령이 되었었는데, 이 대통령이 곧 그렇게 될 것 같다. 또 그의 아킬레스건인 부패 문제가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뇌관으로 존재한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의 중도하차 가능성은 늘 현실적인 문제라고 본다.”
-수치로만 보면 미국산 쇠고기는 지금 잘 팔리고 있다. 올해 1분기 수입량은 작년보다 56.5%나 증가해 1만 9천230톤이나 수입됐다. 또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은 한나라당 전북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사람으로서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난 2008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서 회의를 할 때도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은 별로 효과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대책회의를 주도하던 분들이 불매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려 했을 때 ‘그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서민들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슨 선택권이 있겠느냐고 봤다. 미국산 쇠고기 판매 증가가 촛불집회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정 전 장관의 지사 출마에 대해서는 정말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촛불은 정치적 대안 남기지 못해”
-촛불은 그럼 무엇을 남겼고 무엇을 남기지 못했다고 보는 것인가?
“촛불이 뭔가 퇴적물을 남길 것이라고 봤다. 그것이 이명박 정부의 위기를 가속화해 이 대통령의 정책 추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봤는데 이런 예상은 맞았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민들의 지지 속에 계속 이어졌다. 쌍용자동차 노조의 파업이 77일간이나 진행됐고, 언론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계속 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친서민 중도 정책’을 표방하고 나선 것도 이런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촛불이 남기지 못한 것은 정치적 대안이다. 당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진보적 정치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운동을 거기까지 끌고 가는 데에 좀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환멸의 대상이었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다시 올라간 것이고, 민주당이 일정 지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다.”
“동고동락했던 촛불 수배자들 어서 보고 싶다”
김광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행진팀장을 기억하고 있는 시민 3명에게 김씨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 지 물었다. 그들의 질문을 대신 김씨에게 전했다.
-<진실을 알리는 시민모임> 운영자 오승주씨는 수배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중압감을 이겨내는 게 힘들지 않는지 물어보더라.
“수배생활은 처음이지만 마음이 약해지거나 하진 않는다. 초심을 잃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규율 있게 생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국가에 저항하기로 결정한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촛불 수배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 스스로에게도 압력을 준다. 중간에 포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수 있다는 압력이 날 유지시키고 있다.”
-당신과 함께 수배생활을 했던 백성균 전 미친소닷넷 대표는 당신에게 이런 것을 물어보았다. 경찰 조사를 받은 뒤 활동을 하고 있는 대책회의 동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고 하더라.
“그분들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분들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개월간 동고동락했던 분들이라 내게 참 소중한 분들이다. 어서 보고 싶다.”
김씨는 이 얘기를 할 때 눈을 아래로 깔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그는 광우병 대책회의 동료를 보고 싶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본다고 말했다.
“나를 프락치로 의심할 때는 속상했다”
2008년 5월 말 촛불 시민들이 거리행진을 벌였을 때 김광일씨는 마이크를 잡고 거리행진을 이끌었다. 그러나 밤 12시께 시민들을 상대로 해산을 설득해 일부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다함께>의 행진 지도 방식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끝까지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을 왜 굳이 해산시키느냐’는 반발이었다. 이와 관련해 누리꾼 ‘권태로운창’이 뒤늦은 질문을 던졌다.
-누리꾼 권태로운창(나명수·48)을 기억하는가. 촛불집회 때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와 마찰이 많았다. 그는 ‘촛불집회 초기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거리 행진을 중단하고 해산 결정을 내리는 김광일씨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유를 이해하겠다’고 하더라. 당시 누리꾼의 이런 비판을 접했을 때 심정이 어땠는지 묻고 싶다고 하더라.
“사실 많이 섭섭했었다. 나를 ‘프락치’처럼 의심할 때는 속상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밤늦은 시각에 수십 명만 남은 상태에서 도로 연좌시위를 지속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권태로운창은 ‘우리 사회에 대해 회의적’이라며 ‘국민들이 너무나 뻔히 눈에 보이는 불의에도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신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고 하더라.
“나는 회의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투쟁을 경험한 뒤 이를 반복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저항의 양태는 변한다. 다른 방식의 항의 방법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이 2008년 촛불시위 때처럼 거리 시위일 수도 있고 대학의 점거 투쟁일 수도 있고, 공장 점거 투쟁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촛불에게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진보적 대안을 만드는 일이다. 운동이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저들의 악몽이 우리의 꿈이다”
김씨는 인터뷰 뒤 1968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의 구호를 빌어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설득했다.
“40여 년 전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68혁명에서 “저들의 악몽이 우리의 꿈이다” 라는 구호가 나온 적 있다. 이명박 정부의 악몽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거리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역으로 ‘저들의 꿈이 우리의 악몽이 될 수 있다.’ 나도 수배자의 신분으로서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워나가겠다.”
그는 이 말을 마친 뒤 오랫동안 굳어 있던 얼굴 표정이 풀렸다. 고단한 수배생활이지만, 그는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글/ 허재현 기자, 영상/ 김도성 피디 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