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백혈병’ 피해자, 20명 더 있어…최소 45명
“가족들 눈물…”집안 형편 탓에 대학 대신 삼성 보냈더니 백혈병”
기사입력 2010-05-13 오후 5:24:51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가 잇따라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촉발된 논란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삼성은 지난 3월 온양공장에서 근무했던 박지연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후 공장을 공개하고 재조사를 약속하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그 이후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산업재해로 의심되는 피해를 제보하는 삼성 노동자들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의혹을 더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13일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에서 ‘삼성 직업병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고 “박 씨의 죽음 이후 한 달 동안 새롭게 나타난 피해 제보자가 약 2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반올림이 파악한 피해 노동자는 45명으로 고 박 씨의 사망 이전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 중 31명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이들이며 20명이 백혈병·림프종 등 조혈계 암에 걸렸다. 이미 사망한 이들도 9명에 이른다. 반올림에 따르면 신원 확인이 아직 되지 않는 등 불충분한 제보로 명단에서 제외된 이들도 있어서 차후 더 많은 피해 노동자들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삼성은 아프지 않을 때만 가족?”
이날 증언대회에는 지난 2000년 7월 18살의 나이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11월 조혈계 질환의 일종인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려 9년째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유명화 씨(28, 여)의 가족들이 참석해 공장 입사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사연을 전했다.
이들에 따르면 유 씨는 온양공장에서 반도체 칩을 고온 설비를 사용해 검사하고 육안으로 불량 칩을 고르는 업무를 맡았다. 거의 완성단계에 가까운 반도체 칩은 각종 화학물질이 묻어 있어 고온 설비에서 검사를 마치고 나면 매스꺼운 냄새를 풍겼고 칩을 만진 손이 피부에 닿으면 발진이 일었다고 한다.
유 씨는 4시간 연속 근무로 하루 8~12시간씩 일하면서 근무 중 코피가 자주 났고 2001년 11월 입사 18개월 만에 눈 혈관이 터지면서 병원을 찾았다. 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을 받은 그는 한달 정도 치료를 거치고 이듬해 현장에 복귀했지만 증상이 악화되어 두 번째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약물치료는 효과가 없었고 2003년 2월 자동 퇴직처리 됐다.
이후 유 씨는 집과 병원을 오가며 7년째 투병을 이어오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유 씨의 아버지 유영종 씨(54)는 “현재 명화는 혈소판 수치가 1000이하로 떨어져 당장 골수 이식이 필요하지만 가족들의 골수와는 맞지 않는 상태”라며 “한 번은 난소가 터지면서 혈소판 주사를 맞을 때 배 안으로 계속 피가 새 갑자기 몸무게가 10㎏ 이상 불어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명화를 대학 대신 공장에 보낸 게 지금 너무 후회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유 씨의 동생 유명숙(22, 여) 씨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그는 “언니가 공장에 다닐 당시 전화 통화를 자주 했는데 작업장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동료가 생리불순을 겪거나 기형아를 출산한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다”며 “걱정이 돼서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집안 형편도 곤란한 처지였고 삼성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 씨는 이어 “20대 초반의 어린 언니가 첫 직장에서 이런 일을 당해 지금은 여자로서의 인생도 살 수 없게 됐는데 이 9년 동안의 인생을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라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삼성은 아프지 않을 때만 가족이고 아픈 가족은 내다 버리는가”라고 흐느꼈다.
▲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조형계 질환인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려 투병 중인 유명화 씨의 아버지가 피해 상황을 증언하는 도중 유 씨의 동생 유명숙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프레시안(김봉규)
투병 중인 전직 엔지니어 “숨진 직원들에 죄책감 들어”
이날 소개된 피해 노동자 중에는 유 씨와 같은 생산직 노동자뿐 아니라 과장 및 부장급 엔지니어 출신으로 투병 중인 이들의 증언도 있었다.
1996년 1월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가 지난달 퇴사한 김기영 씨(41, 남)는 2003년 12월 희귀병인 베게너 육아종증에 걸렸고 합병증으로 만정 신부전증까지 겹쳤다. 그의 상사였던 주교철 씨(50, 남)는 1983년 기흥공장 설립 당시 입사해 지난 2006년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반올림 측은 투병 때문에 이날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김 씨가 “그 동안 내부 사정과 삼성의 힘 때문에 입을 열지 않았지만 상사마저 백혈병에 걸리고 함께 작업했던 생산직 직원들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죄책감이 들어 지금에라도 나설 결심을 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지난 2005년 기흥공장 생산직 사원을 그만둔 후 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신송희 씨(31, 여)는 반올림 측에 “근무 당시 역겨운 냄새 때문에 자주 구역질이 나 공정 라인 안에서 마스크를 벗고 토하기도 했다”며 “2003년 발생했던 가스누출사고 당시 화재경보기도 울리지 않아 뒤늦게 나온 적도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올림은 이날 증언대회 이후 유 씨 등 피해 노동자와 2009년 백혈병으로 숨진 김경미 씨의 유족 등 5명의 집단 산업재해 신청을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다.
2005년 백혈병으로 숨진 황민웅 씨의 아내 정애정 씨(34)는 “이들 노동자가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노동 강도가 세고 생산량이 과중해 안전대책이나 표준화 작업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라며 “이러한 문제들은 지금처럼 정부가 지켜만 보고 언론까지 삼성 앞에서 약자로 남는 한 삼성 스스로 이런 사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봉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