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띠크 박정희가 ‘건강보험의 아버지’인가? (우석균)

박정희가 ‘건강보험의 아버지’인가?  
[Corée 특집: 건강권 논란 뛰어넘기]

[22호] 2010년 07월 12일 (월) 15:50:01 우석균/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info@ilemonde.com  

박정희 전 대통령이 ‘건강보험의 아버지’라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건강보험의 아버지와도 같다. 그는 집권 초기에 선언적 내용이긴 하지만 건강보험의 기틀을 잡았고, 1977년에 건강보험을 실질적 제도로 출발시켰다”(1)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현재 보수 쪽의 행보를 비난하면서 ‘박정희만큼이라도 닮아라’는 주장을 하는 개혁적 논객들에게서도 발견된다.(2) 박근혜씨가 ‘복지와 국민화합’을 차기 대선의 화두로 삼고, 정동영씨도 ‘역동적 복지국가’를 내세우기에 이런 주장은 앞으로 더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과연 건강보험의 아버지인가?

성공 뒤에 서 있는 여러 아버지들


    

복지제도가 미미한 한국에서 건강보험제도는 국민이 꼭 지켜내야 할 제도로 인식하는 거의 유일한 복지제도다. 이 때문에 박정희 시대 인사들의 회고록에서도 빠짐없이 다뤄진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의 관료나 정치인의 회고록류의 주장은 몇몇 인사들의 조언과 박정희의 결단에 따른 것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김종인은 “제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강력하게 건의했더니 다들 반대하고 난리가 났는데, 심지어 보사부 신현확 장관도 반대했다. (중략) 당시 학생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날 때인데,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서 (중략) 학생운동과 노동자들의 분배 요구가 맞물려 합쳐지게 되면 큰일난다. (중략) ‘의료보험제도라도 우선 도입하자’고 했던 것”(3)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런 회고담들은 사람마다 모두 말이 다르다. 예를 들어 김종대 당시 보사부 사회보험국장은 “의료보험 실시가 가능하다는 부처최고책임자(신현확 장관)의 확고한 결심을 바탕으로 제도 내용 및 시행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실시”하게 되었다고 하는 반면,(4) 이광찬 당시 사회보장개선심의위원회(사보심) 위원은 “사보심 연구위원들을 중심으로 (중략) 기필코 반영코자 노력했고 (중약) 의료보험 부분 계획은 보사장관에게 보고시 이번 4차 계획에서는 빼라고 하여 이 부분을 빼고 경제기획원에 제출”(5)했으나 박정희가 의료보험은 경제개발 4차 계획에 넣으라고 해 도입됐다고 회고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신현확 주도의 ‘박정희-김정렴-신현확’론이 있고, 신현확은 반대하는 와중에 김정렴·김종인 주도의 ‘박정희-김정렴-김종인’론이나 사보심 관여론 등이 있다.(6)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했다는 것과 당사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 외에는 일치하는 것이 없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건강보험제도가 현재 인기 있는 제도라는 것뿐이다. 성공한 제도에는 아버지가 많은 법이다.

이런 ‘영웅주의적’ 주장은 그들의 회고담일 수는 있어도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것은 별로 없다. 한국에서 공적 의료보험제도 도입이 논의된 것은 4월혁명 전후였고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가 도입을 공약했으나 실제로 도입된 것이 왜 16년 뒤인 1977년인지를 전혀 설명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여러 관련 당사자들이 증언하는 당시 사건 하나가 도입 배경을 설명하는 데 더 설득력이 있다. “4차 5개년계획 최종 보고회의 이틀 전에 청와대 안보상황 보고 자리에서 정보부(안기부) 판단관이 ‘가장 위험한 안보 취약 지대는 봉천동, 상계동 등의 판자촌 빈곤 주민들입니다. (중략) 일단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 되는 상황이어서 유사시엔 예측 불가합니다. (중략) 이들에 대한 의료보장 대책이 시급합니다’라고 건의”(7)하였다는 증언이 그것이다. 또 이 무렵에는 “북한의 무상의료제도에 대비한 남한의 ‘무의료 참상’에 관한 북한 삐라가 많이 날아왔다”고 한다.

등 떠밀려 도입한 건강보험

당시 박정희 정권은 남베트남 정권 붕괴(1975년 4월 21일) 등을 이유로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 두 달 동안 사회안전법, 국민방위법, 방위세법, 교육법 개정안을 통한 학도호국단 부활(및 대학교수 재임용) 등 4대 전시법을 통과시켰다.(8) 유신독재의 강화 조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냉전이 완화되고 전쟁 가능성은 희박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닉슨의 ‘핑퐁외교’ 이후 특별한 긴장관계가 없었고 남북관계도 긴장됐다는 증거가 없다. ‘무장간첩’도 1968년이 정점이었고, 1972년 남북 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를 긴장시킨 사건은 1974년 8월 15일 ‘박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 정도나 이후의 ‘땅굴 사건’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안기부 보고가 보여주는 것은 일부 논자들의 주장처럼 남북체제 경쟁이 의료보험 도입의 원인임을 보여주기(9)보다는 당시 노동자계급과 도시 빈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정권이 이를 심각한 체제 불안 요소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의료보험 도입에는 당시 노동자계급의 급증과 이들의 관리 필요성이라는 자본의 요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6년을 전후로 한국 경제는 이른바 ‘루이스 전환점’(10)을 통과해 무제한 노동공급 시장에서 탈피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기업 쪽도 노동력의 안정적 공급을 원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상당수 대기업에서 이미 “의료보험 실시 이전에 근로자 의료비의 50% 이상을 기업주가 부담”(11)하는 상황이었다.

노동자계급이 양적으로 성장했음에도 이들의 처우는 지독히 열악한 상황은 격렬한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을 낳았다. 1970년의 전태일 분신은 그 상징적 사건이었고, 1971년 경기도 광주단지 사태 등도 같은 맥락의 사건이었다. 1971년에는 대학생의 교련반대 투쟁,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수호 선언, 대학교수 선언 등이 있었고,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이 실질적으로 정권을 위협하게 된다. 당시 노사분규는 1970년 165건에서 1971년에는 1656건으로 10배나 폭증했다. 이런 민중운동과 지식인 및 학생 운동이 바로 유신독재 체제 선언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유신체제로 잠시 억눌려 있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은 1975년 이후 다시 급증하는데, 공식 통계만 보더라도 집단행동으로 번진 1966~71년의 파업 건수가 66건이었던 반면 1975~79년에는 불법적이었음에도 파업농성 시위가 연평균 109건에 이른다.

당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김종인이 잘 지적했듯이 노동운동과 반정부투쟁의 결합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의료보험 도입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약한 지 무려 16년 만에 의료보험을 도입한 것은 사회운동이 정권에 대한 실질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이들이 걱정했던 것, 즉 YH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과 반정부투쟁의 결합에 의한 부마항쟁으로 무너진다. 박정희 정권의 의료보험제도 도입은 “노사의 공동 부담과 공동 운영에 의해 일체감을 조성, 산업민주화를 가능케 하기 위한 것”(12)이었다는 점은 빈말이었으며, 정권에 실질적 위협이 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진짜 부모는 민중 자신이었다

이렇게 도입된 의료보험은 처음부터 철저히 기형적으로 설계됐다. 우선 정부는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기업이 50%, 노동자가 50%를 내 운영됐을 뿐이다. 또한 적용 인구나 보장성이 지극히 한정돼 500인 이상 기업의 노동자에게만 먼저 도입됐고, 건강보험 적용이 의료비의 30~40%에도 못 미칠 정도로 보장성이 형편없었다. 이에 더해 기업별 조합으로 운영돼 건강보험 재정이 기업의 자금줄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13) 당시 의료보험조합은 아예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주체가 돼 시행됐고, 사무실 자체가 전경련 건물에 있었을 정도다.(14) 병원비지출제도를 병원에 유리한 ‘행위별 수가제’로 채택한 것도 지금까지 극복되지 못한 한계다.

이런 ‘박정희표’ 의료보험의 한계가 일부 극복돼 현재 모습의 건강보험이 된 것은 두 번의 대수술을 거친 뒤였다. 1988~89년의 전 국민 건강보험 도입과 2000년 건강보험 통합이 그것이다.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전 국민으로 넓히기 위해서는 1987년 6월항쟁과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필요했다. 이후에도 대기업 ‘부자’ 조합과 도시와 농촌의 ‘빈자’ 조합을 통합해 국가가 직접 운영하게 된 데는 ‘의료보험 연대회의’가 주도한 10년간의 노동·농민·시민운동의 투쟁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건강보험은 아직까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국가재정과 기업 부담이 여전히 낮고, 건강보험 보장률도 60%대에 머물러 있으며,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행위별로 의료비를 지급하는 낭비적 지출 구조를 가진 것이다.

현재 박정희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의료 민영화’, 즉 의료의 시장화와 상업화를 통해 한국의 의료보장제도를 붕괴시키려는 것은 박정희를 잘못 계승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박정희를 계승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다. 박정희가 건강보험의 아버지라고? 그는 사회운동의 위협에 정권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전혀 책임지지 않는, 살아나가기조차 힘든 기형적 제도의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을 뿐이다. 이 기형적 건강보험을 여러 번의 대수술을 거쳐 지금 모습으로 만든 것은 오로지 사회운동의 몫이었다. 건강보험을 낳고 키운 진짜 어머니와 아버지는 민중이었고, 또 앞으로 건강보험을 튼튼하게 키워나가야 할 부모도 바로 이들이다.

글•우석균
의사, 보건정책학.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범국민운동본부 민영화저지 정책팀장, 한-미 FTA 보건의료대책위원회 정책위원장,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부대표.

<각주>
(1) 양상훈, ‘81억원짜리 미국 병원 청구서’, <조선일보>, 2009년 5월 6일.
(2) 이범, ‘박정희를 본받으라’, <한겨레>, 2009년 7월 12일.
(3) 신학림, 김종인 전 국회의원 인터뷰, <미디어스>, 2008년 7월 25일.
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34.
(4) <한국의 복지정책 결정과정>(조영재·나남·2008) 중 최수일과의 인터뷰(2006년 6월 9일) 재인용.
(5) 이광찬, <국민건강보장쟁취사>, 양서원, pp.62~70, 2009.
(6) 이 퍼즐의 답은 알 수가 없으나 신현확이 현재에도 막강한 대구·경북(TK) 세력의 대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는 의료보험제도 도입에 부정적이었다가 대통령의 지시 뒤 도입에 나섰다고 짐작될 뿐이다.
(7) 이광찬, 위의 책, p.69.
(8) 김형아 지음, 신명주 옮김, <유신과 중화학공업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일조각, pp.251~255, 2005.
(9) 김연명,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발달 및 형태규정 요인에 관한 연구’, <한국의료보장연구>, 보건과사회연구회, 청년세대, pp.107~108, 1989.
(10)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더 루이스의 이름을 딴 개도국 경제발전 단계 이론. 간단히 말해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공급보다 많게 되는 시기를 뜻하는데, 최근 중국이 이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고 주장된다.
(11) 김연명, 앞의 글, p.109.
(12) 김도영, <한국의 의료보험>, 삼연사, p.116, 1982.
(13)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의료보험 재정을 기업 자금으로 전용하다 적발된 사실이 여러 번 사회문제가 됐다.
(14) 전경련, <전경련 40년사 1·2·3>, 전경련,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