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세계의창 깨어진 약속 / 피터 싱어

[세계의창] 깨어진 약속 / 피터 싱어

  


  

»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생명윤리학

  

지난 2000년,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뉴욕에서 만나 밀레니엄 선언을 발표했다.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구촌 인구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약속이었다. 안전한 식수와 위생상태가 결여된 인구도 반감시킬 것,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편적이고 전면적인 초등교육 제공을 위한 노력, 어린이 사망률 3분의 2 감소 및 산모 사망률 4분의 3 감소, 에이즈·말라리아 등 주요 질병 퇴치 등도 다짐했다. 이런 다짐들은 ‘새천년개발목표’로 구체화됐다.
지난달 그 10년을 맞아 세계 정상들이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회의를 열
어 ‘약속 지키기’로 불리는 문서를 채택했다. 새천년개발목표를 2015년까지 이행할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유엔 보도자료는 그 문서를 ‘글로벌 행동계획’으로 지칭했지만, 계획이라기보단 열망의 표현에 가까웠다. 2000년에 만들어진 약속을 우리가 실제 지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예일대의 토머스 포그 교수(철학)의 지적대로, 목표를 조정함으로써 과제는 더 쉬워졌다. 2000년 이전만 해도 1996년 로마에서 열린 세계식량정상회담은 2015년까지 영양부족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반면 새천년개발목표는 기아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목표를 완화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 악화됐다. 밀레니엄 선언이 구체적인 목표를 다시 설정했을 때, 기아 인구율 반감의 인구 기준은 2000년이 아니라 1990년 수준이었다. 또 목표는 개발도상국에서의 기아 인구를 반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96년에 세계 지도자들은 2015년까지 영양결핍 인구를 8억2800만명 이하로 줄이겠다고 했으나, 지금은 극빈층 인구만을 13억2400만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다짐한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우리는 개도국의 기아 인구 비율을 반감시키려는 지구적 목표를 충족하기 힘들다. 식료품값 상승은 지금까지의 진척도 뒤집고 있으며, 지난해엔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인구가 10억명을 웃돌았다. 이런 가운데 선진국에선 동물 사료로만 수억t의 곡물과 콩이 소비되고, 비만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명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우리의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극빈층 인구를 반감하는 목표는 달성 가능하지만, 주로는 인구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에 힘입어서다. 아프리카에선 1990년대 경제침체기를 지난 이후 10여년간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극빈층 인구가 줄고 있긴 하지만, 2015년까지 그 비율을 반감할 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다.

임산부 사망이 줄고 있지만 아직 더디다. 더 많은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저렴한 항생제를 구할 수 있게 됐고 기대수명도 늘고 있지만, 보편적인 치료는 아직 멀었으며 질병은 여전히 확산중이다. 말라리아와 홍역 감소에 성과가 있었고, 그 결과 어린이 사망도 조금 줄었지만 현재 사망률의 3분의 2를 줄이겠다는 목표는 이루기 힘들 전망이다.

오랜 기간 부자나라들은 빈곤 감소를 약속했지만, 말을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물론 일부 중요한 진전도 있었고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했지만,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

지속가능한 극빈층 감소를 위해선 지원의 양적·질적 개선이 요구된다. 덴마크·룩셈부르크·네덜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극히 일부 나라들만이 국내총생산의 0.7% 이상을 대외원조에 지원하자는 유엔 목표를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무역 개혁과 기후변화에 대한 실질적 행동이 없이는 더 많은 지원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2015년까지 세계 지도자들이 약속을 지키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그들이 매년 수백만명이 불필요하게 목숨을 잃도록 방기하는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란 점을 뜻한다.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생명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