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의사’ 말대로면 한국 병원 70%가 저질
의사단체, ‘포괄수가제 반대’ 수술 거부…”선진국선 보편적 제도”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6-13 오후 2:45:14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들이 오는 7월 1일부터 일주일 간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는 질병군에 대해 입원 수술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10일 안과의사회가 백내장 수술을 거부하기로 한 데 이어 12일에는 외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등이 사실상 ‘수술 거부’에 동참하기로 했다. 2000년 의약분업 파업 이후 가장 광범위한 의사들의 ‘집단 파업’인 셈이다.
의사들이 반발하는 포괄수가제는 일종의 ‘진료비 정액제’다. 입원 환자마다 병원에서 천차만별로 달랐던 진료비를 의료기관 규모별로 하나로 통일하는 방침이다. 포괄수가제를 도입하면 주어진 예산 안에서 진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과잉 진료’가 줄어든다. 환자로서는 꼭 필요한 진료만 받게 돼 진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 정부로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고가의 ‘비급여’ 진료를 건강보험 안에 포함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 포괄수가제 반대 기자회견을 연 대한의사협회. 의협 소속 의사들은 오늘 7월 1일부터 일주일간 포괄수가제를 시행하는 질병군에 대해 ‘수술 거부’를 하기로 했다. ⓒ뉴시스
포괄수가제, 미국과 유럽선 이미 보편적인 제도
의사들이 반발하는 것과는 달리, 포괄수가제는 선진국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지불제도다. 캐나다·프랑스·영국 등 거의 모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이미 포괄수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고령화에 따라 증가하는 의료비를 제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가장 상업적인 의료 제도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조차 1983년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건강보험인 ‘메디케어’에서 포괄수가제를 도입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고령화와 의료비 지출 증가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 중 하나다. 최근 10년간 한국의 1인당 보건의료비 지출증가율(8.6%)은 OECD 회원국 평균(4.0%)의 2배가 넘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의료비가 증가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 보장성을 아무리 확대해도 그보다 더 큰 폭으로 고가의 비급여 진료가 늘어나는 탓에 우리나라 건강보험 보장성은 60%대에 머물고 있다. 비급여 진료를 통제하지 않고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OECD는 한국도 모든 의료기관에 포괄수가제를 도입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늘어나는 의료 지출을 제어하지 못하면 ‘지속가능한 의료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위기에 처한다는 경고다.
한국 71.5% 의료기관이 이미 자발적으로 참여
의사단체들은 포괄수가제를 반대하는 이유로 “진료의 질이 떨어지고, 의사들의 수익이 떨어져 의사들이 태업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든다. 대한의사협회는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면 의사들은 백내장 수술에서 싸구려 인공수정체 재료인 중국산 및 파키스탄 수정체를 쓸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보건복지부는 “의협이 주장한 중국산과 파키스탄 수정체는 현재 건강보험에 등재된 것이 없다”고 재반박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1984년 미국에서 처음 포괄수가제가 도입됐을 때 미국 의사들은 진료의 질이 떨어진다고 반발했다”면서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무수한 연구에서 포괄수가제로 의료의 질이 감소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증명됐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미 한국은 1997년부터 포괄수가제를 시범 도입했으며 현재도 전체 의료기관의 71.5%(의원 83.5%, 병원 40.5%, 종합병원 24.7%)가 이 제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의사단체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포괄수가제를 도입한 의료기관에서는 7개 질병군에 대한 진료의 질이 떨어졌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오히려 포괄수가제가 도입돼 진료수가가 평균 2.7% 올랐다고 발표했다. 의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진료 수익을 인상해줬다는 얘기다. 그 결과 전체 의료기관의 수익은 98억 원가량 늘어났고, 환자 부담은 100억 원 가량 줄어들 것으로 복지부는 예상한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병원협회는 포괄수가제 도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무 늦게 협소한 범위로 도입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포괄수가제를 너무 늦게, 그것도 협소한 범위로 도입했다고 지적한다. 이명박 정부가 늘어나는 ‘의료비 지출’에 제동을 걸지 않고서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판단에서 시행한 최소한의 방어책이 바로 포괄수가제라는 것이다.
우 정책실장은 “이번에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는 7개 질병군은 전체 질병군 중에 겨우 3%에 불과하다”며 “포괄수가제 도입 시 수가도 의사협회가 이미 합의했는데, 이제 와서 진료 수익이 줄어든다고 깬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우 정책실장은 또한 “의사들이 응급수술인 제왕절개와 맹장수술을 거부한다면 수술 지연으로 환자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며 “(응급 수술 거부까지는 안 하더라도) 대책 없이 진료를 거부하면 어쩌자는 건가”라고 맹비난했다.
73만 원이었던 제왕절개 수술비용, 33만 원 된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7월부터는 병의원급, 내년 7월부터는 종합병원급 이상의 전체 의료기관까지 맹장·탈장·치질·백내장·편도·제왕절개·자궁부속기수술 등 7개 질병군 입원환자에 대해 포괄수가제를 의무 적용키로 했다.
포괄수가제가 시행되면 환자들의 진료비 지불상식은 어떻게 바뀔까. 상급병실료, 선택진료비 등 일부 항목을 제외한 ‘비급여 진료’가 대부분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 안으로 들어오거나 제외된다.
예를 들어 제왕절개 수술을 한 산모 A 씨의 진료 내역을 보자. 행위별수가제에서는 진료비를 따로따로 문다. 처치수술료 62만 원, 마취료 11만 원, 주사료 25만 원, 입원료 41만 원, 검사료 13만 원, 기타 24만 원 등을 따로따로 물어 총 진료비 176만 원이 나왔다. 이중 137만 원은 건강보험이 내주는 금액이다. A 씨는 39만 원만 내면 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행위별수가제 아래서는 의료기관이 진료행위를 늘리려는 유인책이 생긴다. 병원에서는 A 씨에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특수 영양제, 빈혈제 등 비용 6만8000원, 특수반창고 비용 7만6000원과 자궁유착방지제 비용 20만 원을 더 청구했다. 비급여 진료비용 34만 원은 고스란히 A 씨가 더 내야하는 돈이다.
반면에 포괄수가제를 적용하면 치료 횟수와는 관계 없이 ‘제왕절개 진료비’에 대한 정액으로 148만 원이 책정되고, A 씨는 그 중에서 33만 원만 내면 된다. 나머지는 건강보험이 내준다. 행위별수가제에서 A씨가 낸 73만 원의 절반이 채 안 되는 셈이다.
/김윤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