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TRIPs 이사회 협상 무산에 즈음하여

[성명서] 민중의 건강권이 특허권에 우선하여야 한다!
- TRIPS 이사회 협상 무산에 즈음하여 –

지난 2002년 12월 20일, WTO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 이사회 협상이 무산되었다. 이 협상의 쟁점은, 지난 2001년 11월 14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서 채택된 ‘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the Doha Declaration on the TRIPS Agreement and Public Health)’의 6절의 이행에 관한 것이다. 선언문 6절은 TRIPS 이사회로 하여금 의약품 생산 능력이 부족한 국가에서 ‘강제 실시’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WTO 일반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구체적인 쟁점은 강제실시가 되어도 의약품 생산능력이 없는 국가에 대해서 약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의 대상국의 범위와 적용대상질병에 대한 범위를 둘러싼 것이었다. 미국를 비롯하여 유럽, 일본, 다국적제약협회는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의 수혜대상국을 명시하고, 대상질병을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등에 한정하자는 입장을 주장하였다. 반면 개도국, 제 3세계의 국가는 수혜대상국과 적용대상질병을 한정하는 것은 도하선언문의 취지에도 맞지않을 뿐 아니라 개도국과 제 3세계의 국가에서 필요한 약을 공급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극렬히 반대하였다. 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이사회가 끝날때까지 협상을 이뤄내지 못했다. 협상 결렬의 일차적인 책임은 개도국 민중의 건강권 보다는 자국의 제약 자본의 이해관계를 고집한 미국의 독선에 있으며, 이에 동조한 한국 정부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국과 개발도상국의 민중들이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등의 질병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나라들에 만연한 질병들은 사회의 기반까지 흔들 정도로 광범하지만, 열악한 의료 체계와 가난은 이들을 약이 있어도 복용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그리고, 의약품 특허를 통한 높은 의약품 가격이 의약품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어왔다. 특허권의 남용을 제한하고,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 ‘강제실시’이지만, 이 마저도 미국 등 선진국과 다국적 제약회사의 압력과 자체적인 의약품 생산 능력의 부족으로 실효성을 잃고 있다. 지난 도하 각료회의에서 채택된 ”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은 이와 같은 개발도상국 민중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제약 회사들은 이번 협상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을 뿐, 개발도상국 민중들의 고통과 건강권에 대해서는 일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의장 중재안 역시 대부분 미국 등 선진국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질병의 범위를 제한해야한다는 입장을 고집하였으며, 이에 대해 개발도상국들이 반대함으로써, 결국 협상은 무산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국제 정세에서 보여왔던 미국 정부의 자국 이기주의와 일방주의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또한, 도하 선언문이 채택될 당시에도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은 선언문을 특정 질병에만 적용되도록 축소하려고 하였으나, 최종 선언문은 특정 질병이나 국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중보건 전체와 TRIPS 협정’에 대한 선언으로 포괄하였다. 따라서, 이번 협상에서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의 적용대상을 특정 질병으로 제한하려는 시도는 도하선언문의 약속을 위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TRIPS 이사회는 공중보건에 대한 책임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질병대상의 범위를 협상의 타결 의제로 삼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를 놀라게 한 또 한가지 사실은 한국 정부가 협상 마지막날 미국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였다는 것이다. 다행히 협상이 무산되었지만, 한국 정부의 태도는 제3세계 민중뿐만이 아니라, 한국 민중들의 분노 또한 살만한 것이었다. 2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글리벡’ 투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민중들 역시 제약회사의 특허 남용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선진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민중들의 이해에 복무하는 것인지 윤리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제3세계 민중들의 건강을 담보로 미국과 거래하는 비윤리적인 협상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이 협상은 내년에 다시 재개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에만 집착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정부들과 제약회사들을 비판하며, ‘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의 취지에 맞게 개발도상국 민중들의 건강권 보장을 최우선의 목표로 협상에 임할 것을 한국 정부를 포함한 각 국 정부에 촉구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번 Trips이사회에서 표명한 입장을 철회하라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의 대상국과 적용대상질병을 한정하지 말라
-’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의 취지에 맞게 개발도상국 민중들의 건강권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라

200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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