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연속공개 서한 ⑤
지금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동북아중심병원이 아닙니다.
지난 10월 희귀병이 걸린 딸의 산소호흡기를 떼어 죽게 한 아버지의 일로 의료비에 대한 사회적 책임 문제가 공론화된 적이 있었습니다.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손녀딸에게 독극물을 먹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할머니의 슬픈 선택의 소식도 들어셨겠지요. 이것이 우리 건강보장과 복지의 수준이고 현실입니다. 대통령님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보편적 복지, 참여복지를 펼치겠다고 하셨지만, 여전히 현실은 나아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정부 정책의 방향과 우선 순위 설정이 크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을 만들어 동북아중심병원을 짓겠다고 합니다. 외국에 가서 의료비를 낭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국내에서 그 돈을 쓰게 해야겠답니다.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딸의 치료비를 만들기 위해 집을 팔고도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장. 병역면제를 위해 수천, 수억원을 들여 원정출산을 하는 사람들. 이 중 누구를 위해 보건의료정책을 만들고 집행해야 하는지, 너무나 분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부는 당연히 의료시스템을 바꾸고 건강보험을 튼실히 하여 질병으로 고통받고 진료비가 없어 경제적으로도 또 한번의 고통을 받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정책의 우선에 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동북아중심병원과 민간의료보험을 논할 때가 아닙니다. 동북아 중심병원 설립은 취약한 국내의료체계를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고, 잘못된 정책입니다. 동북아중심병원 설립 계획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동북아중심병원의 유치는 가뜩이나 취약한 우리사회의 국가보건의료제도의 근저를 뒤흔드는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한국의 보건복지현실은 참여정부가 대통령선거의 공약을 제시할 당시에 잘 지적한 것처럼 매우 열악합니다. 즉 공공의료기관의 비율이 OECD 국가의 평균비율이 75%인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10%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보장에 있어 공적 재정지원율도 45%에 불과합니다. 즉 의료보장의 보장성이 극히 낮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에게 급선무는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을 대폭 확충하고 의료보장성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북아 중심병원을 유치하려는 경제자유구역법은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고 영리법인을 허용하며 이윤의 국외송금까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5일 진행된 제25회 국정과제회의에서는 경제자유구역법 23조에 명시된 내국인진료 금지조항까지도 수정하여, 외국병원에서 내국인진료가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사회단체들의 계속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은 “국내외 자본과 최고 수준의 의료기술과의 접목을 통해 세계적인 ‘동북아중심병원’을 유치하고 선진국 수준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도록 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내국인 진료허용입장을 밝히려는 기자회견을 가지려다 사회단체의 강력한 항의 끝에 ‘논의후 결정’으로 발표는 하였으나 내국인 진료허용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있습니다.
좁은 국토에서 외국병원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며 이들의 본국으로의 과실송금을 허용하겠다는 것은 실질적인 의료시장개방과 동일한 효과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의료법 바깥의 사각지대를 만들어 일부 부유층은 외국병원을 이용하고 다수의 국민들은 재정이 더욱 악화된 국내의료기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형적 체계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공적의료보장체계에 의존하지 않는 계층과 의료기관의 존재는 보장성 50%에 지나지 않는 취약한 건강보험체계를 더욱더 취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는 참여정부의 의료보장강화와 공공의료기관비율강화라는 의료정책의 기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실익도 없고, 보험재정강화에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참여정부는 동북아중심병원을 유치하면 국외에서 진료를 받는 부분이 국내에서 해결되어 국내자금의 외부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이 병원에서의 진료를 건강보험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건강보험재정절감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논리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외진료의 상당부분은 원정출산에 의한 것이거나 일부부유층에 의한 패키지 여행상품에 의한 것입니다. 국내동북아병원에서 출산을 하면 외국국적을 준다면 모를까 원정출산을 어떤 방법으로 막을 것이며 국내의 병원이 외국여행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까? 게다가 과실 송금을 허용한다면서 어떤 실익을 바란다는 것입니까?
또한 보험재정절감의 주장은 그야말로 눈앞에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대표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보험혜택과 무관한 부유계층이 발생하면 이들은 공적보험보다는 민간보험을 선호하게 될 것이고 이는 남미 여러 나라에서 이미 명확히 현실로 드러난 것처럼 보험재정의 강화에 반대하는 사회세력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조치는 보험재정강화의 동기를 그 근저부터 흔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국내에 진출하려는 외국병원들은 민간보험도입까지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싱가포르의 허브병원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경우는 병원급 의료기관이 대부분 공공의료기관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차이를 무시하면서 우리나라와 싱가포르를 비교하는 것은 외국병원허용이 취약한 국내의료제도에 미치는 영향을 전혀 무시하는 발상일 뿐입니다.
민간보험도입, 취약한 국내보험체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조치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보건의료개혁의 과제는 노무현 정부가 애초에 주장했던 것처럼 의료보장성을 높이고 공공의료기관 비중을 늘이는 것입니다.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은 의료보장성의 강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공약사항으로 민간보험도입반대를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인 재경부장관은 틈만 나면 민간보험도입을 주장하고 국민들의 질병자료를 민간보험기업에 제공해야 한다는 반 인권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민간보험사안은 보건복지부사안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심지어 복지부장관까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민간보험도입허용을 비추는 발언까지 한 바 있습니다.
민간보험도입을 한 남미국가들의 예를 들어보면 대체로 국민의 15% 정도가 민간보험에 가입하고 나머지는 공적보험에 잔류하게 되어 결국 공적보험의 재정은 지극히 취약해져 의료보장률은 열악하게 되고 서민층의 의료이용은 지극히 제한됩니다. 대표적인 민간의료보험체계인 미국의 경우 국민의 15%가 아예 아무런 의료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하면서 GDP의 14%나 되는 재원을 의료비에 낭비하는 기형적인 보건의료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의료보장성이 너무나도 취약하여 자신의 딸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 중병에 걸린 가족과 동반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발생하는 현실에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이기는커녕 민간의료보험도입 주장이 참여정부에서 주장된다니 기막힐 따름입니다.
국민의 의료이용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비효율을 조장하는 것이 참여정부의 의료개혁은 아닐 것입니다. 참여정부는 스스로의 공약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발언을 일삼고 실질적인 민간의보도입 조치를 취하려는 국무위원을 해임해야합니다. 또한 공약대로 의료보장률을 임기 내에 80%까지 높이고 실질적인 본인부담 상한제를 실시하기 위한 예산편성을 해야합니다. 이것은 보건복지부의 입장도 중요하지만 정부 전체, 말하자면 대통령의 정책의지와 그 집행이 가장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있는 것은 의료보장강화에 대한 정부의 집행의지가 아니라 이를 실현하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예산편성만을 보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하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의료개혁이 아니라 의료개혁의 완전한 실종일 뿐입니다.
동북아중심병원의 유치나 민간보험도입과 같은 반건강적이고 반국민적인 정책이 의료개혁입니까? 노무현 정부는 의료보장강화와 공공의료기관 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개혁프로그램과 예산계획을 당장 제시하고 실행하여야 합니다.
2003년 12월 12일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건강세상네트워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노총 참여연대 한국노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