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붕괴로 가는 지름길
세계에서 의료 수준이 제일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언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면 노벨의학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1901년의 베링부터 올해의 액설과 버크까지 179명의 의학자가 노벨의학상을 차지하였는데 미국인이 91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의료비 역시 미국이 국내총생산(GDP)의 15% 가량을 지출하여 압도적인 1등이다. 프랑스, 영국, 일본 등과 우리나라는 대체로 6~7%를 의료비로 지출하여 미국의 절반 이하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의 건강 상태도 미국이 으뜸일까? 영아 사망률, 이환율, 평균수명 등 여러 건강지표를 살펴보면 미국은 1등은커녕 선진국들 가운데 뒤쪽에 처져 있다. 노벨의학상 수상자는 1명도 없고, 의료비 지출액수가 미국의 1/30도 안 되는 쿠바 국민들의 건강 수준보다 별로 나을 바가 없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체로 의료의 공공성이 확립된 나라일수록 국민들의 건강 수준이 높고, 반대로 의료를 시장에 의존하여 양극화가 뚜렷한 나라일수록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 역사와 현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45%에 머물고 있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0%까지 확대할 것과 8%에 지나지 않는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을 30%로(OECD 나라들은 평균 75%이다) 높일 것을 보건의료 분야의 핵심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출범 2년이 다 되도록 실현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방향키를 거꾸로 잡은 듯하다.
그러한 우려를 낳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 가지만 살펴보자.
지난 16일 국무회의는 〈경제자유구역법〉의 ‘외국인 전용의료기관’ 유치의 어려움을 핑계로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외국병원은 국내병원과 동일한 환자를 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병원보다 5~6배 비싼 진료비, 건강보험 제외, 영리법인 허용, 세제 및 자금지원 혜택, 환경 및 고용조건 규제완화 등 각종 특혜를 받게 된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의료시장이 개방되는 것인데, 정부의 왜곡과는 달리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의료의 공공재적 특성 때문에 의료시장 개방에 부정적이다.
이러한 외국병원이 누리게 될 특혜에 대해 국내병원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지금보다 획기적인 수준의 의료수가 인상과 규제완화를 요구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나아가 국내병원의 영리법인화와 건강보험 제외를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만족스럽지만 그나마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던 건강보험제도의 기반이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민간의료보험의 등장이 필연적이다. 일각에서는 영리병원과 민간의료보험의 장점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의 선도국인 미국의 몇가지 실례를 보더라도 그것이 허구임은 명백하다. 영리병원의 진료비는 비영리병원보다 3~11% 비싸다.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보다 의료진에 대한 인건비 지출이 적은데, 그만큼 의료진의 노동조건이 더 열악하며 그 결과는 환자들에게 전가된다. 그에 따라 중증 환자의 영리병원 사망률은 비영리병원보다 7~25% 높다. 우리나라 어느 생명보험회사는 지난해 2조원의 수입을 올렸는데, 보험가입자에게 지출한 돈은 6천억원뿐이다. 나머지는 회사와 투자자의 몫으로 돌아간 것이다. 원리적으로나 실제로나 민간의료보험이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해외원정진료를 흡수하리라는 점도 원정진료의 70% 가까이가 외국(특히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한 원정출산인 현실에서 설득력이 없다.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은 경제자유구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의료제도를 완전히 붕괴시켜 국민의 건강 수준을 더욱 악화시킬 최악의 조치다.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