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아직은 보이지 않는 ‘터널의 출구’
[결산] 회담 자체가 성과…미국 ‘BDA 결단’ 필요
2006-12-22 오후 9:39:03
13개월 만에 중국 베이징에서 재개된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금융제재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차기 회의 일정도 잡지 못한 채 휴회했다.
이번 6자회담의 쟁점은 북한의 영변 원자로 가동중단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등 미국이 제시한 초기이행조치와, 그에 따라 미국이 제공하는 상응조치를 어떻게 짝지을 것인지였다. 또 6자 본회담과는 별도로 북미 양자가 가진 금융 실무회의에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묶여 있는 북한 자금 2400만 달러를 어떻게 풀 것인지도 주요 쟁점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제재 해제가 선결조건”이라며 BDA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핵폐기-상응조치 논의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소위 선결조건과 본안 논의를 분리해 핵폐기 논의에 집중하려 했고 특히 상응조치 논의를 통해 제재 해제와 핵폐기를 연계시킨 북한의 전략을 흔들려 했다. 그러나 두 입장은 좁혀지지 않았고 5일간의 회담은 ‘혹시나’ 했던 기대가 ‘역시나’ 하는 실망감으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 아직은 엇갈리는 손. 6자회담에 참가했던 6개국 수석대표들이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과 포즈를 취했다. ⓒ뉴시스
’실질적인 핵폐기 논의’는 성과
그렇다고 해도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우선 6자회담이 열린 것 자체가 성과다. 이번 회담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위기지수가 한껏 올라가고 2차 핵실험의 가능성이 거론되던 10월 31일 개최가 합의됐다. 이로써 북한은 2차 핵실험을 ‘유예’했고 협상 국면으로 전환했다.
11월 중간선거 패배로 대외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던 조지 부시 미 행정부도 협상 외에는 별다른 수단이 없다고 판단해 그간 한사코 거부하던 북미 양자접촉을 10월과 11월 두 차례 가지며 협상을 시작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북한과 미국 모두 어떻게든 협상을 통해 풀겠다고 노력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평가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도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른 제재 국면에서 대화국면으로 전환을 의미하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두 번째 성과는 북미간의 금융제재 실무회의가 열렸고, 내달 뉴욕에서 다시 개최하기로 약속하면서 BDA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 3월 미국과의 금융제재 협의에서 제안했던 ‘비상설 협의체’가 사실상 출범한 것이다.
이는 ‘BDA 동결은 법집행’이라며 협상의 여지를 일축하던 미국과 ‘체제 붕괴를 꾀하는 적대시 정책’이라고 무조건적인 해제를 원하던 북한 양측이 양보를 함으로써 가능했다. 6자 본회담과 ‘동시에 그러나 별도의 장소에서’ 금융 실무회의를 연 것은 양측의 절충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가장 큰 성과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관해 실질적인 협의를 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제재 해제가 선결조건’이라고 하면서도 수차례 있었던 미국과의 회담에서 자신들의 초기이행조치에 미국이 어떤 상응조치를 할 것인가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했다.
미국은 동결(원자로 가동중단과 IAEA 사찰 수용)에는 체제 안전보장, 핵시설 신고에는 경제적·인도적 지원이라는 상응조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에 체제 안전보장이 동결에 대한 보상으로는 부족하고 경수로를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BDA 문제를 넘지 못해 손에 쥘말한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시퀀스(이행 순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향후 전망을 밝게 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BDA 문제만 풀린다면 급속도의 진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백학순 실장은 “비핵화에 대한 논의가 실질적이었고 미국의 접근 방법도 새로웠다”며 “최종 합의를 보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김근식 교수는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비핵화를 위한 초기조치와 상응조치는 과거보다 훨씬 전향적으로 오갔다”며 “BDA 때문에 ‘입구(초기 이행)’가 막혔지만 이것만 풀린다면 오히려 ‘출구(최종 목표)’까지는 쉬워질 것이라는 전망”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전망과는 달리 북한이 핵군축회담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물론 6자회담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핵폐기를 논의하자면 부득불 핵무기 숫자를 줄이는 핵군축회담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조건의 성숙’, 즉 금융제재 해제를 압박하기 위한 전술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게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설명이었다.
BDA 문제는 역시 ‘목에 걸린 가시’
그러나 BDA에 대한 북미협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는 것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회담 참가국들이 결국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지 못한 핵심 이유가 됐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BDA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조사를 조기에 종료해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합법으로 판명난 자금은 즉시 풀어주며 △불법이라는 증거가 뚜렷한 부분에 대해서는 범법자 처벌과 재발방지에 대한 약속을 북한으로부터 받아내고 △그 대신 중국 당국에 자료를 넘기며 사실상의 금융제재가 해제될 수 있는 퇴로를 열어줄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은 이와 관련해 어떠한 ‘결단’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회담의 진전을 어렵게 했다. 나아가 북한의 핵폐기를 강제하기 위한 협상카드로 BDA 문제를 쓰려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낳게 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핵문제를 진정으로 풀려 한다면 북한이 핵폐기의 선결조건으로 상정하고 있는 금융제재에 관해 일정한 양보를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설령 북한의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먼저 고백하고 나온다는 것은 아무런 상응조치 없이 핵을 폐기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만큼 금융제재를 하고 있는 미국이 ‘법집행의 문제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하지 말고 정치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케네스 퀴노네스 전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은 21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마치 부시 행정부 내 국무부와 재무부가 북한 문제에 있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것처럼 보이도록 애썼다”고 지적했다. 퀴노네스는 이어 “북한은 미국의 국무부와 재무부라는 두 개의 얼굴과 상대해야 했고, 따라서 이런 두 얼굴을 가진 부시 행정부와 협상을 해야 하는지 큰 회의를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미국 당국의 협상태도를 비판했다.
미국이 9.19공동성명의 이행 방안 마련이라는 대로(大路)를 놔두고 ‘초기이행조치’라는 ‘이면도로’를 타려 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지적도 나오고 있다. 초기이행조치에 나온 핵폐기 방식은 이미 9.19공동성명에 다 담겨 있는데도 왜 북한의 반발이 가능한 이행조치를 따내려 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동결이라는 북한의 ‘행동’에 따른 상응조치가 서면 안전보장이라는 ‘말’이었다는 것은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뉴욕 금융협의가 최대 변수 될 듯
핵시설을 동결할 경우 경수로를 지원해야 한다는 북한의 요구가 회담의 진척을 더디게 하고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9.19공동성명에는 북한에 경수로를 공급하는 문제를 ‘적절한 시기’에 논의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고 이 같은 표현은 북한도 수용했기 때문에 공동성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동결의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해야 한다고 9.19공동성명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무리한 주장을 했다. 이는 북한의 협상 의지에 의문을 표하게 할 소지가 있다. 전문가들은 차라리 경수로 요구는 일단 보류하고 국제식량기구(WFP)를 통한 식량 지원 등을 요구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있다.
또 ‘제재 해제가 선결조건’이라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던 북한의 경직된 태도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6자회담은 다자틀이기 때문에 북미가 핵폐기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라도 봤다면 나머지 4개국이 보증할 수 있음에도 북한이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향후 6자회담의 개최와 핵폐기 논의 진전 여부는 다음 달 뉴욕에서 열리는 북미 금융제제 2차 협의가 최대 변수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전망이다.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기획실장은 “미국 입장에서 한 번에 동결을 풀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숨고르기를 해서 뉴욕 접촉이나 그 사이의 낮은 단계의 접촉을 통해 기술적인 해법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한국의 ‘분발’, 이제부터 필요하다”
이번 6자회담에서 보여준 한국 정부의 역할은 몇 점일까?
6자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18일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핵폐기 이행조치와 그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에 대해 “모든 조치를 1 대 1로 연계하거나 행동의 순서를 지나치게 세분화하면 한 가지 조치의 지연에 이행과정 전체가 볼모가 될 위험이 있다”며 패키지 이행방안을 내놨다. 행동을 엄격하게 연계하기보다 이행계획을 몇 개의 큰 단계로 나눠 작성하고 이행하자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미국이 제안하는 안들은 우리 정부가 작년부터 제안했던 내용이라 할 수 있다”며 패키지 이행방안은 거기에 융통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 ⓒ프레시안
”6분의 1 역할에 머물러도 되나”
그러나 우리 정부가 핵폐기라는 ‘각론 아닌 각론’에만 집중했을 뿐 ‘금융제재 해제와 핵문제’라는 큰 틀에서의 대응은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6자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금융제제에 대해 “그 문제는 미국과 북한이 별도의 장소에서 논의하는 것이라서 회담 수석대표들이 논의할 얘기는 아니다”라며 시종일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금융제재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핵폐기 논의를 할 수 없다는 북한에 대한 대응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했다. 미국의 제안에 주석을 다는 역할밖에 못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
전문가들은 북미 간의 쟁점인 BDA 문제에 한국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정부의 역할이 축소된 근본적인 이유로 남북관계의 봉쇄 상황을 지적했다.
백학순 실장은 “중재를 하려면 북한과 협상 채널이 있어야 하고 지렛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는 상황에서 어려웠다”며 “자기 레버리지를 스스로 제거하는 자충수를 둬 우리의 목소리를 스스로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6자회담과 남북관계라는 두 바퀴가 같이 굴러가야 하는데 한 바퀴가 멈춰 있어 그야말로 6분의 1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를 시급히 복원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주문하며, 내달 열릴 2차 금융제재 북미협의에도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