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리 마을진료 참가후기
감상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낳다는 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동안 대추리를 생각하는 마음은 솔직히 미묘했습니다. 말로는 “한반도 전쟁기지화 반대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를 외쳤지만, 한편으론 “주민들의 생존투쟁일 뿐”이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추리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이라크에서나 있을 법한 건물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습니다. 학교건물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형체도 없이 벽돌들만 굴러나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상징하듯 마을입구에는 매향리에서 수거한 폭탄들이 여기저기 박혀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아저씨 아줌마들이 밝은 표정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잠시 우울했던 기분은 즐거운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감내하고 있던 마을 분들의 환대에 금방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이 왜 낯선 타지로 그것도 도시빈민으로 내몰려야 하는 지, 정말 화가 났습니다.
대추리 상황
잠시 노인정 앞에서 이러저런 감상에 젖어있는 동안 약대 동아리 늘픔 회원 8명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한의대생 동아리 길벗 3명과 인의협 회원 2명이 도착했습니다. 아 물론 보건의료반전평화팀도 2명이 참가했습니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각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마친 연후, 대추리에 상주하고 있는 평화지킴이로부터 마을 상황을 전해 들었습니다.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애초에 2008년까지 미군기지 이전 및 재편성은 불가능했다. 이전비용으로만 10조원 이상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와 미군 측에선 기초적인 마스터플랜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계획도 없던 국방부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주민들의 강제철거였다. 이제 다행히 국방부와 주민들 간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국방부의 태도는 여전히 막무가내다. 앞으로 대추리 주민대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요구할 것이다. 첫째 그동안의 폭력과 그로인한 희생에 대해 공개적인 사과를 선행해라. 둘째 대추리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집단적인 이주대책과 마을 공동체 유지를 보장해라. 셋째 마을을 지키고자 했던 분들에 대한 구속과 손해배상을 취하하라. 그러나 앞으로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대추리에서의 투쟁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사회각계각층에 알리는 일이라고 본다.”
마을진료와 촛불집회
마을진료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인의협 회원 2명과 약대생 늘픔 8명이 양방진료를 담당했고, 한의사 및 한의대생이 한방진료를 담당해 2시간 정도 진행했습니다. 보건의료반전평화팀은 자리가 협소해 진료에는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노인정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분들께 마을진료를 알리는 일에 자청했습니다. 경찰과 국방부의 괴롭힘에 못 이겨 마을을 등진 분들이 많은지, 마을은 한산했습니다.
진료가 끝난 후 저녁을 먹고 농협창고에 모여 대추리 촛불집회에 참석했습니다. 1월 14일, 오늘이 866일 째 대추리 촛불집회라고 김지태 이장님이 설명해 줬습니다. 그리고 5월이면 1000일째랍니다. 순간 전 죄스런 마음 뿐이었습니다. 이 왜진 곳에 고립된 채 노인들이 1000일 집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데, 나는 뭐했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1000일 동안 과연 며칠이나 대추리를 떠올렸는지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촛불집회가 끝나갈 즘 마을진료에 참가했던 진료단 모두가 주민들께 인사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마침 저 또한 발언 기회를 얻어서, “대추리 투쟁은 진행형이며, 보건의료반전평화팀이 앞서서 함께 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날 촛불집회에는 미국인 2명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제가 영어가 부족해 어디서 왔는지만 물었고, 저희들이 누군지 소개할 수 없었던 게 안타까웠습니다. 보건의료반전평화팀 명의의 플랭카드를 인편으로 전달하겠다고 하자, 마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꼭 걸어놓겠다는 인사말을 끝으로 모두 버스에 올랐습니다. “다음에는 반전평화팀 모두가 대추리를 방문해 국가와 전쟁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몸소 체험하는 자리를 가져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중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