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과연 자유와 해방을 갖다주는가?

신자유주의는 과연 자유와 해방을 갖다주는가?  

진보평론  제1호  
강수돌(고려대학교 교수/국제정보경영학부)  

【서평대상 서적】

* 김균 외(1996), 자유주의 비판, 풀빛
*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1997), 신자유주의와 유연화 공세,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노기연
* 김성구/김세균 외(1998), 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문화과학사
* 서울국제민중회의 조직위 편(1998), 신자유주의, IMF 그리고 국제연대ꡕ, 문화과학사
* 김성구(1998),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문화과학사
* 킴 무디(1999),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 사회진보를 위한 민주연대 옮김, 문화과학사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1999), 경제위기, 신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운동, 현장에서 미래를
* 이근식(1999), 자유주의의 사회경제사상, 한길사
* 알베르 자카르(1999), 나는 고발한다 경제지상주의를, 이영자 역, 다섯수레

지금까지 자본주의 경제 질서는 대략 세 가지의 흐름을 갖고 전개되었다. 첫째가 고전적 자유주의이고, 둘째가 케인즈주의(복지국가주의)이며, 셋째가 신자유주의이다.

우선, 고전적 자유주의는 아담 스미스에서 대표적으로 발견되는 바, 경제 과정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철저히 반대하며 동시에 독과점의 폐해를 강조한다. 결국 공정한 경쟁의 룰이 통하는 시장 메커니즘(“보이지 않는 손”)이야말로 자원의 효율적 분배와 국부의 증대, 그리고 복리 증진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근식의 ꡔ자유주의 사회경제사상ꡕ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및 법치주의의 바탕이 되는 근대적 사상인 자유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적 이익만을 대변하는 편협한 사상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며 “스미스 이후 경제학에서 대표적인 자유주의자 여섯 명을 지난 7년간 공부하여” 출판한 책이다. 여기서는 즉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밀의 진보적 자유주의,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 뢰프케의 인본적 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진화론적 자유주의, 프리드먼의 통화론적 자유주의, 뷰캐넌의 헌법적 자유주의 등이 상세하게 검토된 후 자유주의 입장에서 한국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는 일정한 시기가 지나자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 종말의 징후들은 여러 가지인데, 대표적인 것만 봐도 독점의 출현과 공정 경쟁의 억압, 시장 포화와 식민지 개척, 제국주의의 등장, 경제 공황의 발생, 세계 전쟁의 발발 따위이다. 이 모두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지긋지긋한 역사적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고전적 자유주의조차도 ‘모두에게’ 자유(해방)를 안겨다 준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돈벌이의 자유와 몸뚱어리(노동력)를 팔 자유가 핵심이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김균 외(1996)의 ꡔ자유주의 비판ꡕ이 눈길을 끈다. 이는 이미 ‘IMF 사태’ 훨씬 이전인 1994년부터 연구모임을 가지면서 하이에크, 오이켄, 롤즈, 버지니아 학파 등 현대의 주요한 자유주의자들에 관해 비판적 논의를 펼쳐 온 이론적 노력의 한 결실로, 우선 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대변자 중 한 사람인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밖에도 롤즈, 노직, 왈라스 등의 자유주의도 비판적으로 검토되는데,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론은 공동체론자의 비판에 대한 자유주의적 대안의 이론적 기초”이긴 하지만 “사회이론과 단절된 규범이론이 갖기 마련인 명백한 한계, 즉 현실을 바꾸는 힘의 부재라는 한계를 갖는다”(박순성). 또 일반균형이론의 기초인 “왈라스 모형은 서로 모순된 그러나 상호의존적인 두 가정을 전제로” 하는데, “원자화된, 고립된 개인 가정과 중립적 중앙의 가정”이 그것이다. 이때 “중립적 중앙”이란 왈라스에게 “시장”이라는 “제도적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이론”이야말로 “일반균형이론이 함의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접근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시장은 초월적 중앙의 개입을 피할 수 없”(백영현)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특히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은 원자화된 개인의 “개체 합리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데다 이를 수정하기 위한 “제한된 합리성, 절차적 합리성, 집단적 합리성” 개념들조차도 “시장을 통한 사후적 선별만을 강조하고, 상품생산 사회의 조정과정에 고유한 불안정성, 혹은 이해의 상호갈등의 질서적 해결만을 지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존 세계를 팽글로스적 상태로 변호하게 된다”(송원근). 최근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는 “국민국가의 약화와 ‘민주주의의 공동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시민사회의 정치적 주변화를 정당화-가속화시키는 인종주의, 민족주의 등과 결합하게 된다”(전창환). 결국 <비판>의 필자들은 “만약 이런 식으로 세 번째 천년을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라는 홉스봄의 경고를 공유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경제대공황과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등장한 케인즈주의(복지국가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고전적 자유주의와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인데, 말하자면 테일러주의와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대량생산 체제와 그에 기초한 고 이윤, 그에 기초한 고 임금과 고 복지, 그에 기초한 대중소비 체제가 절묘하게 잘 맞물려 돌아간 새로운 자본축적 체제에 다름 아니다. 고 복지와 대량소비는 다시금 노동자들을 체제 속으로 잘 통합시켰고 높은 동기부여 효과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순환’의 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하나는 대내적으로 노동자들이 높은 노동의욕과 높은 노동생산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고, 다른 것은 해외로부터 지속적으로 많은 잉여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국가는 이를 바탕으로 복지체제(공공부문)를 구축하였는데, 그로 인해 효율적 재정정책의 중요성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가 되자 이러한 전제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파편화된 노동과정에 침묵하려 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의 민족주의적 저항(“개발독재” 포함)도 커졌다. 나아가 범지구적 생태계 파괴도 심각할 정도로 진척되었다. 결과는 자본축적의 위기와 만성적 재정적자로 나타났다. 선순환이 ‘악순환’으로 뒤바뀐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 등장한 것이 1980년대 초의 영국 대처 정부와 미국 레이건 정부로부터 본격 출발하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이념이다. 역설적으로, 케인즈주의는 복지체제를 통해 노동자에게는 굶어죽을 자유를 주지 않았지만(이른바 ‘사회 안전망’은 이런 뜻에서 이중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들을 굶어죽지 않게 막는 측면과 함께, 사회 반란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굶어죽을 자유’까지 새로이 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신자유’일까? 현재 지구촌 인구 60억 중에서 15억 이상은 극도의 빈곤 속에 살며 영양 결핍에 고통 당한다. 제3세계에서만도 3억 이상이 극도의 기아에 시달린다. 그 잘 나간다는 미국에서조차 3천만 이상이 빈곤선 이하에 살며, 영국에서도 1/3의 어린이가 가난에 시달린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동조하지 않거나 그런 식으로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서는, 이라크나 발칸 사태에서도 보듯이 ’저강도 전쟁‘이나 ‘고강도 전쟁’을 통해 과감히 ‘청소’를 해 버린다. 알베르 자카르의 ꡔ나는 고발한다, 경제지상주의를ꡕ은 “승리를 구가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를 고발”하고자 알기 쉬운 용어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실업, 빈부 격차, 인구 폭발, 자원 고갈, 식량 부족, 환경 파괴 등의 문제 상황이 “이런 저런 악인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결국 경제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 때문에 나오고 있다고 본다. 저자는 “조절의 메커니즘이 없는 작동은 전속력으로 공전하다가 자기 파괴로 이르게 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무절제의 재현을 피하기 위해선 증권투기가들의 광란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본다. 동시에 우리는 “저항의 가능성을 믿”을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절망과 포기가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라 한다.

비슷한 논의들이 최근 한국에서도 분출한다. 김성구(1998)의 ꡔ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ꡕ는 “IMF 관리체제하에서 한국사회의 위기와 개혁 대안을 둘러싼 두 개의 길(신자유주의적 길과 진보적인 구조변혁의 길)간의 대립 논쟁”의 산물로 나온 것이다. 우선 저자는 “현재의 위기는 …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이론적 유효성을 확인해주는 계기”임과 동시에 “90년대이래 지식인들의(이론적) 청산과정을 현실에서 반박하는 것”이라 못박는다. 결국 “신식민지 종속적-독점적 축적” 구조를 청산하지 않으면 위기극복이 어렵기에, “이 길이 실현되어갈 수 있는 현실의 중요한 투쟁지점에 진보적인 정책으로써 개입하는 것, 그 투쟁에서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진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 대안이 진정으로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위기론에 관한 좌․우의 이론들을 비판하고 위기 극복에 대한 대안 논쟁에도 적극 개입한다. 특히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 빅딜, 민영화, 개방정책 등을 낱낱이 비판하면서 결국,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대안의 길”이라 정리한다.

“민주대안은 자본의 세계화의 경향을 인정하는 위에서도 근본적으로 현재 경제위기를 가져온 대외지향적이고 대외종속적인 축적구조를 내수지향적이고 자립적인 분업연관을 갖는 축적구조로 전환하는 것을 지향한다. 또 재벌의 지배체제를 사회적 또는 공공적 소유와 사회적 조절로 대체하여 시장과 자본의 지배를 제한하며 사회적 통제로 점차 대체하는 것을 지향한다.”

또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에서 1997년 여름, 신자유주의의 성격과 실체를 이해하고자 연속 세미나를 개최하고 토론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김성구/김세균 외(1998), ꡔ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ꡕ로 나왔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80년대 이후 가속화되는 “자본의 세계화”를 “이데올로기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 본다. 따라서 “세계화와 자유화라는 기본경향의 운동을 허용하면서도 국제적인 수준에서 그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실현하고 또 그 전제로서 국민적 수준에서 사회적 통제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대안이라 본다(김성구). 비슷한 맥락에서 김윤자는 “세계화 자체는 … 진보의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1995년의 멕시코와 최근 동남아에서의 통화폭락 사태”에서 보듯이 “세계화가 진행되는 자본주의적 방식”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문제는 자본의 운동을 사회 전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자국의 국가권력을 틀지워내는 일이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자본운동 또한 통제”하도록 하는 것이라 본다. 동시에 “소비와 욕구의 담론”을 “개인성과 주체의 문제에 천착하는 계기”로 삼아 “끊임없이 그 구조의 전화와 전복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하여 “새로운 투쟁의 지향점”을 존재론적으로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 “산 노동에 내재한 전복의 힘”을 불러내어 “노동의 중심성”을 재확인하되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자기문제”로 끌어안아 “저항의 정치” 속으로 포괄해내는 대안적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형성되는 정치사회적 배경은 어떤가? 같은 책에서 최형익은 선진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출현하게 된 “독특한 정치과정”을 영국, 스웨덴을 사례로 해명하는데 “전통적 사민주의 노동운동은 한편으로 완전고용, 실질임금 상승, 짧은 노동시간, … 권력에의 참여를 획득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노동조합의 탈급진화를 통해 자본주의적 소비구조, 기술 진보 및 정치적 지배형태에 대한 포괄적 승인이라는 반대급부를 자본측에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만 용인되는 것”이라 못박고, 마침내 “계급협조의 제도화” 시기가 끝날 무렵 노동운동은 위기에 빠졌고 그리하여 범지구적 신자유주의 공세를 현실로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선진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과오를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타 나라들에서 노동운동의 미래 진로 모색에 필요한 교훈을 찾고 있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의 「유럽통합과 유럽좌파운동」은 (이미 ‘신자유주의적 지배연합’으로 전화된 사민주의를 제외한) 유럽의 진보세력들이 유럽통합 프로젝트에 대해 갖는 입장을 수동적 수용, 전략적 선택, 완전한 반대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고, 현재 “유럽 좌파운동세력의 입장이 ‘사회적 유럽’이란 테마를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신자유주의 관철의 정치적 조건과 마찬가지로 이를 극복할 조건들도 탐구된다. 이에 남구현은 “영국의 인두세에 대한 저항, 이탈리아의 연금삭감에 대한 대중투쟁, 독일판 고통분담에 대한 노조의 저항, 프랑스의 공공부문 투쟁” 등 “노동자와 국민 대중의 저항이 보수적 반동을 막아”내기도 한 점에 착안, “이제까지의 이윤추구와 경쟁의 논리에 기초한 세계시장에서의 강제를 넘어서 새로운 대안적 세계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전지구적 차원의 자본/제국주의 관계의 지양”을 위한 토대라고 강조한다. 특히 김세균은 “일국 수준에서 다른 나라의 운동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투쟁의 전형을 창출하는 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세계적 의의를” 지닐 만큼 중요하고, “노동운동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로 피해를 입고 있는 다른 근로대중과의 민중적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지배연합에 저항하는 새로운 노동자-민중 블록을 형성”해야 함을 강조한다. 한편, 이종회는 자본의 이윤율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나온 케인즈주의 전략이나, 70년대 말 “노조를 공적(public enemy)으로 몰아세우면서, 경제적 위기를 노조의 탓으로” 돌리면서 등장한 대처리즘/레이거노믹스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전략, 그 어느 것도 구조불황이나 이윤율 위기 돌파에는 실패했으며, 결국 “유명무실해진 국가적 조절장치와 과잉축적된 화폐자본”으로 상징되듯 “자본운동은 안팎으로 그 한계에 봉착”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영미 식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진보세력들이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닌 현재의 지형을 변화시키기 위해 “변혁적 시각” 정립이 필요하며, “진보운동에서 노동자 중심성”을 확보해야지만 ‘분자적 혁명’이나 ‘개인적 탈주’ 전략이 가지는 오류의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한국에서 정치세력들에 의한 ‘개혁’이란 것은 “신자유주의 물결에 의해 발생한 문제를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대처하려고”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는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성격과 그 대치점을 분명히” 하고 “노동중심”의 확보 위에서 민중 연대와 국제 연대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과연 정치경제적 범주에만 머무는가? 그 사회문화적 관련성은 어떠할까? 이에 강내희는 신자유주의가 “‘유연적 축적’이라고 하는 자본의 새로운 전략과 관련을 가지면서도 최근의 문화적 변동과 깊은 물질적 관련”을 갖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자연 자원들이나…인간관계들, 나아가서 지식의 생산이나 예술적 창조 행위 등 자본의 직접 영향에서 벗어나 있던 인간활동 등이 상품으로 전환되거나 상품관계…에 포섭되는 경향”, 즉 “문화의 산업화” 경향이 강화되며, “디자인이나 광고와 같이 소비를 촉진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정보기술의 발전”에 의해 “시공간의 압축”과 “정보의 전자화”가 가능해짐으로써 “삶의 탈지역화”와 “기업문화의 사회적 확산”이 심화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보이는 수많은 “탈구현상들”과 “사회문화운동의 ‘전선’ 이동”에 착안, 모든 삶의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과 같은 인간의 권리를 최대한 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며, “지식인의 활동도 … 보편적 형태보다는…전문적 영역을 실천의 장으로” 삼되 “다양한 실천들의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복잡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또 “(자본의) 유연화 국면을 ‘타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지금처럼 포디즘에 따른 조직 구도를 고수하기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논의를 한걸음 더 진전시키면서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한다.

보다 실천적인 입장에서 신자유주의를 해부하는, 서울국제민중회의 조직위원회의 ꡔ신자유주의, IMF 그리고 국제연대ꡕ는 1998년 9월에 열린 서울국제민중회의의 성과물이다. 모든 참석자는 “신자유주의는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략으로 개인, 계급, 국가와 지역 사이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과 역사의 주체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음을 선언한다” 등 9개 항목에 이르는 결의를 하였다. 특히 홀거 하이데는 “우리 인간의 진정한 바램과 욕구”는 “인간적으로 대접받기”이기에 “하나의 ‘생산요소’ 같은 것으로 대우받기를 싫어한다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출발한다. 결국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살아있는 연대”인데 그것은 “경쟁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이탈하는 것이며 분열을 깨부수는 것”이다. 이어 콜린 하인즈는 ‘지구적으로 지방을 보호하자’(PLG)는 운동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신보호주의의 입장에서 대안적인 구상을 적극 제안하고 있다.

멕시코의 저항군 사빠띠스따를 지원하는 그룹에서 온 디아나 다미안은 IMF 체제하의 멕시코 민중의 상황과 주체적 대응에 관해 생동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특히 사빠띠스따의 투쟁은 ‘권력’이나 ‘민주주의’에 관해 이론적으로도 새로운 시각을 보여 준다. 그 외에도 태국의 ‘가난한 자들의 모임’, 프랑스의 실업자 운동 ‘유로 마치’, 지구적 민중행동(PGA), 아펙반대 민중회의, 아시아여성위원회 등 각국 민중들의 투쟁과 국제적 연대 네트워크의 활동이 소상히 소개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노동운동계에 유명한 ‘Labor Notes’의 편집장으로 북미 노동운동의 혁신을 위해 노력하는 킴 무디는 ꡔ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ꡕ 속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허구성 및 한계를 폭로하고 생산 지점에서의 세계화 방식인 ‘린 생산’이 가지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이 전세계적 착취를 위한 도구로 되었음을 고발하고, 신자유주의 물결에 대한 개별적 저항들을 ‘국제적인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활성화하여 노동 측에서 총체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한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한국의 노동상황에 비추어 논의하고 있는 책도 있다.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1997)의 ꡔ신자유주의와 유연화 공세…ꡕ는 이미 ‘IMF 사태’ 이전부터 광범위하게 전개된 신자유주의적 공세와 각 나라 노동운동의 대응을 차분히 살피면서 노동자 대응 방안까지 비교적 쉬운 필체로 논의하고 있다. 특히 사회 전반에 대한 자본 전략뿐만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기업 내부의 유연화 공세까지 자세하게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또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가 98년 9월말에 창립3주년을 맞아 개최한 심포지엄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희망으로!: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운동>에서 발표된 발제문과 토론문, 기조발제, 그리고 토론내용 등이 99년 1월, 같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98년 노동운동의 최대 쟁점 다섯 가지 즉, 노동시간단축과 생활임금보장 투쟁, 실업문제와 실업자운동, 자본의 구조조정과 노동운동, 노사정위원회와 사회적 합의, 노동운동의 주체형성 등에 대해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쟁점들을 정리하고 있다. 또 기조발제문에서는 전체 토론을 아우르는 본질적 문제들을 정리하면서 노동운동의 올바른 대응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기조발제자는 “우리의 현실은, 절망하려면 상식에 따르고 희망을 찾으려면 상식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며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희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사태의 본질을 옳게 파악”할 것을 촉구한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사실상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온 김대중 정부 1년 반 사이에 시장과 국가가 모두 강화되고 또 상호 강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소외되는 것은 민초들의 삶의 질과 풀뿌리 민주주의다. 20% 승리자의 삶의 ‘양’은 증대할지언정 삶의 질은 척박해진다. 80%는 삶의 질과 양, 모두가 엉망이 되었다. 또 주주(자본가)들의 민주주의(?)는 보호될지언정 논밭에서,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뺑이 치는’, 80%의 일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많이 ‘뺑이만 칠 뿐’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의 상황만은 아니다. 멕시코, 태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브라질 … 등등 ‘IMF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기수 미국에서조차 비슷한 경향이 발견된다.

신자유주의는 요컨대,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노조에 대해 ‘군기’를 잡고, 다른 편으로는 통일된 ‘세계 시장’을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이때 ‘신자유’란 이미 정경유착과 경쟁과정에 의해 독과점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크게 두 주체, 즉 거대한 독과점 체제(초국적기업) 및 금융체제(세계금융시장)가 IMF나 세계은행이라는 기구를 등에 업고서 더 이상 민족국가의 개입과 노동운동의 개입 등을 받지 않고 ‘자유’로워지려 하기에 나온 이름이다. 그것도 더 이상 국가나 민족 같은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그러나 필요에 따라 마음껏 ‘이용’해 먹으면서) ‘지구 전체’를 무대로 돈벌이의 자유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과연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와 경제계, 노동계에서는 최근까지만 해도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격적 논의가 전개된 적이 거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른바 ‘IMF 사태’가 터짐으로써 우리는 그러한 본격적 논의를 비켜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앞서 살펴본 책들은 그러한 본격적 논의
에 중요한 이론적, 실천적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대안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분명코 “대안은 있다!” 그렇다면 과연 대안의 돌파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지배적인 논리대로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를 바로 잡아(정신 개혁) 예전과 같은 경쟁력을 다시 드높이는 길인가, 아니면 많은 사회운동의 논리대로 ‘제도 개혁’을 통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을 발견하는 길인가? 문제는 현재의 삶의 구조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는 가이다. 생각건대, 정신 개혁을 하든 제도 개혁을 하든 ‘경쟁력’을 높여 세계시장의 점유율을 높임으로써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은 그 자체로 한계가 명백히 드러났다. 이것이 ‘경쟁의 한계’이다. 그것은 첫째, 경쟁이라는 게임의 원리는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가르는 분열의 원리이며, 둘째 승자가 되더라도 자자손손 승자가 되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승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 건강과 인격, 공동체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과정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과 분열을 토대로 하는 현 시스템의 근본 원리 내지 패러다임의 전환, 그리고 노동(일자리) 개념의 근본 혁신에 관한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온갖 제도 개혁과 그에 기초한 경쟁력 강화 조치는, 불행히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을 신자유주의의 구렁텅이 속으로, ‘20대 80의 사회’로 몰고 갈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삶의 원리, ‘새로운 풍요’를 찾아 나서야 한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문제제기, 다른 편으로는 더 이상 시장 경쟁(market)이나 국가 관료(plan)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지 않는 진정한 제3의 길, 즉 우리 내면에 있는 ‘삶의 자율성’(autonomy) 회복을 통한 ‘대안 만들기’가 절실한 때이다. 진정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신자유주의’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겠고, 진정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신자유주의’에게 더 이상 여유를 주어서는 안되겠다. 그런 뜻에서 시간이 없다.

2003-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