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계화 운동 – 시애틀 워싱턴 프라하 제노바

1. 시애틀 및 워싱턴 행동의 전사(前史)

세기말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1999년 11월 ‘시애틀 전투’. 그리고 2000년 4월의 워싱턴 행동.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에서 벌어진 ‘세계화 반대’ 운동은 우리에게도 이미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상당히 익숙해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조정된 연대행동이 국제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계기는, 지난 97년~98년 활발하게 진행된 다자간투자협정(MAI) 반대투쟁과 ‘쥬빌리(Jubilee) 2000’을 중심으로 한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이었다. 다자간투자협정(MAI)은 지난 95년부터 OECD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국제투자규범인데, 현재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한일․한미투자협정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각국 시민․사회단체 및 노동조합은 MAI가 ① 투자자의 권리를 정부․지역사회․시민․노동자 그리고 환경의 권리보다 훨씬 우위에 놓고 있으며, ② 해외투자자에 대한 민중들의 민주적 통제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③ 해외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등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강력히 저항하였다. “MAI에 대한 NGO 공동 성명서”가 1998년 2월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었고, 여기에 약 68개국 565개 단체들이 서명했을 정도로, 그 저항은 광범위하고 강력했다. 결국 초국적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은 98년 10월 공식적으로 ‘협상의 중단’을 선언해야만 했다. 한편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은, 영국에 기반을 둔 ‘쥬빌리(Jubilee) 2000’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외채탕감운동은 “희년(Jubilee)에는 너희들 가운데 가난한 자는 없을 지어다”라는 성경 구절로부터 최초 아이디어를 얻었으나, 그 근저에는 제3세계 ‘발전’과 ‘빈곤’ 문제는 ‘외채’ 문제의 해결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출발했다. 외채탕감운동은 “1998년 11월 17일 로마에서, 38개국 쥬빌리 2000 단체들과 12개 국제조직이 모여, 상환불가능한 외채, 실질적으로 이미 상환한 외채, 부적절하게 기획된 정책과 프로젝트로 인한 외채, 부정한 외채와 독재정권에 의해 발생한 외채를 2000년까지 탕감할 것을 요구”하는 ‘쥬빌리 2000 캠페인’을 발족시키면서 본격화된다. ‘쥬빌리 2000’은 1998년 영국과 1999년 독일에서 열린 G7+1 정상회담 때 수만의 시위대를 동원하여 제3세계 외채탕감에 대한 부유한 국가들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러한 시위는 1999년 G7+1 정상회담에서 ‘중채무빈국(HIPC) 외채탕감 계획’이 채택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위의 두 가지 투쟁 사례는 ‘반(反)세계화 투쟁’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즉, ‘반세계화 국제연대 투쟁’을 ‘추상의 영역’에서 ‘현실 투쟁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계기였으며, 가시적인 투쟁 성과물을 쟁취함으로써, 각국 민중들에게 금융세계화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세계화는 필연적이며 불가피하다’는 이데올로기적 강요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행동이 시애틀과 워싱턴으로, WTO와 IMF/세계은행 반대투쟁으로 계승된다.

2. 시애틀 리포트

“협상은 결렬되고, 회의는 끝났다”, “WTO 대표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 도시에서 탈출하기를 원했을 뿐이다”.
- 1999년12월4일 『시애틀타임즈』 보도

11월 30일 세계 각국에서 달려온 전 세계 노동자-민중운동의 활동가들이 시애틀의 중심가를 완전히 점거한 채 WTO 각료회담장을 완전히 포위하면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는 초국적자본의 지배를 강요하는 WTO체제에 대한 강력한 경고임과 동시에, “세기의 투쟁”이었다.
거리에서는 각료회의 기간내내 집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WTO 반대 대행진”이 열렸던 11월 30일, 국제항만노조(ILWU)는 시애틀항과 타코마항을 완전히 폐쇄시켜 버리고, 조합원 전원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또한 학생과 직접행동주의자들은 각료회의장 주변을 인간사슬로 에워싸고, WTO 공식대표단의 출입을 봉쇄하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수많은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농민, 원주민들도 시위에 참여하여, “WTO는 가라! WTO 뉴라운드 출범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11월 30일 WTO 회의장 주변의 경찰저지선을 중심으로 시위대가 집결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오전 10시 시내 북쪽에 위치한 메모리얼 스타디움에는 2만여 명의 노동조합원들이 모인 가운데 AFL-CIO(미국노총)가 주최하는 대규모 노동자집회가 열렸다. 세계 144개국의 노동조합과 50여 개의 미국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노동자들은 2시간의 집회를 마친 후, 중심가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WTO에 대한 AFL-CIO의 어정쩡한 입장, 즉 WTO체제의 개혁과 노동계의 참여보장에 한정된 지도부의 요구는 WTO체제의 직접적 피해자로서 보다 강력한 행동을 요구하는 일반 조합원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과 좌파 노조들은 지도부의 일방적 지시에 따른 회군을 거부하고,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여 경찰저지선에 온몸으로 부딪히기도 했다.
세계무역기구와 자유무역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외부 선동가들’이 아니라 바로 시애틀 시민들이였다. 이들과 시애틀에 모인 반무역기구 그룹들은 몇 년간 전지구적 시민사회운동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과 그에 따른 무역기구 출범이, 이 기구와 이 기구가 추진하는 무역자유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민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농민 노동자 학자 소비자 사회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이 비정부 네트워크는 무역기구의 ‘자유무역지상주의’를 거부하는 데서 입장을 공유한다. 그들은 자유무역지상주의가 자본과 상품의 이동에 대한 장애물들을 제거해 자기이익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세계의 경제․정치 규칙들을 뜯어고치려는 초국적기업들의 움직임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긴다. 많은 개발도상국 정부들도 이런 생각을 공유한다.
이런 운동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9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자간투자협정(MAI) 채택이 좌절되고, 미국 의회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신속협상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 점이다. 미국 의회가 이런 조처를 취한 것은 다자간투자협정이 ‘다자간 혼란’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보수․우익 그룹들과, 미국의 진보적 비정부기구들 사이에 사실상의 연대가 이뤄졌던 데 힘입었다.
시애틀 각료회의는 원래 새로운 다자간자유무역협상의 출범을 목표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회의는 출발부터 삐그덕거렸다. 11월 30일, 오전 10시에 열리기로 했던 개막식이 수만의 시위대들에 의해 취소되어 버린 것이다. 본격적인 협상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핵심쟁점에 대한 각국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질 않았다. 농산물 시장의 추가개방 및 농업보조금의 실질적인 삭감, 생명특허와 유전자조작농산물의 교역 문제를 다룰 ‘생명공학 작업반’ 및 ‘무역과 노동기준 관련 작업반’ 설치 여부, 신통상의제(투자, 경쟁정책, 정부조달투명성)의 뉴라운드 포함 여부 등 대부분의 이슈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었다. 또한 제3세계 국가들은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자유무역체제의 혜택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WTO의 기존 협정들에 대한 평가와 개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한번 합의되었던 기존협정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개정될 수 없다고 버티면서, 심각한 입장 차이를 노정하게 되었다.
11월 30일의 전 세계 노동자-민중투쟁은 WTO개막식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폐막식 마저 취소하면서 합의안을 도출하려는 미국측의 의도가 무색하게 최종합의를 무산시키는 강력한 압박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시애틀 라운드”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 힘은 ‘거리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협상대표단의 일원인 돈 본커(Don Boker)는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들은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3. 시애틀, 그 후 : 워싱턴·프라하까지

워싱턴

‘4월 16일 새벽 6시. 각국 대표단의 입장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가 예정돼 있던 펜실베니아 거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천 명의 시위대들이 차가운 비를 그대로 맞은 채 대열을 만들고 있었다. 온통 검은 복장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을 비롯해 크고 작은 깃발들과 ‘저항’을 의미하는 하얀새 모형들이 새벽 공기 속에 나부꼈다. 서툴지만 흥겨운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 한 대표단이 인간띠로 이어진 시위대열을 뚫고 나가려고 시도했다. 순식간에 주위의 시위대들이 그 대열로 속속 합류했다. 어깨 걸고 저지선을 튼튼히 구축했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같은 뜻을 지니고 선 사람들 속에서 마음은 한없이 든든하고 따뜻했다. 어느 새 워싱턴의 아침이 밝아 왔다.
전 세계적 네트워크 조직인 ‘50년이면 충분하다’는 IMF와 IBRD 창립 50주년이던 1994년 이래 매년 봄. 가을 회의 때마다 2~3백 명 규모의 시위를 벌여 왔다. 지난 1월 ‘50년’은 지난해 11월의 시애틀 투쟁 다음의 반세계화 국제 연대 활동의 장으로 ‘워싱턴 시위’를 제안했다. 곧바로 4백50여 개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이 ‘전지구적 정의를 위한 총동원’이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단체와 활동가들이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은 ‘50년’ 대표 적키 조로헤 제후의 말처럼 “전적으로 시애틀 시위의 성공 덕분”이었다.

- IMF․IBRD 반대 세계 NGO 워싱턴 시위 참관기 (강은지, 『사람이 사람에게』기자,
월간『말』 2000년 6월호) 中

2000년 4월 16~17일 미국 워싱턴에 모인 시위자들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의 봄철 연례회의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커다란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워싱턴 시위는 마치 베트남 전쟁에서 68년의 구정공세와 비슷하다. 설날을 기해 펼쳐진 베트남인들의 공세는 어떤 지역을 탈환해서가 아니라 침략자들의 전쟁승리 의지를 치명적으로 꺾어놨다는 점에서 베트남인들의 승리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시위자 수는 3만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1300명은 경찰에 체포되기를 자청했다. 언론매체들은 1주일에 걸쳐 브레튼우즈 기구로 통칭되는 IMF와 IBRD의 현재 모습, 그리고 두 기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두 기구에 대한 ‘워싱턴 봄 공세’를 조직한 사람들은 시위가 끝난 뒤 일제히 승리를 선언했다. 지난해 같은 회의 때 시위자 수가 단지 25명뿐이었던 점에 비춰 “기적적인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미국인들의 정치의식에 두 기구의 문제점을 각인시켰다”는 평가도 나왔다.
워싱턴의 대규모 시위를 가능하게 했던 최대 요인은 시애틀 시위의 성과였다. 시애틀 시위는 뉴라운드를 출범시키기에 앞서 의제설정을 목적으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를 좌초시켰다. 이는 광범위하게 잠재돼 있던 세계화에 대한 분노를 겉으로 표출시킨 벼락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계무역기구뿐 아니라 IMF와 IBRD도 기업 주도의 세계화를 촉진시키는 주역으로 인식된 것은 당연했다. 반면 IMF와 IBRD의 ‘기술관료들’ 사이에서는 그들 직장의 정통성과 신뢰성에 대한 위기감이 크게 고조됐다. 이들은 지난 몇 달간 자신들이 포위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런 느낌은 워싱턴의 대규모 시민불복종운동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IMF와 IBRD의 오만함과 파괴적인 기능을 폭로하는 데 오랜 세월 노력해 온 사람들로서는 워싱턴 시위와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동안 IMF와 IBRD는 파괴불가능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일립스 광장의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IMF나 IBRD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워싱턴에 오지 않았다. 두 기구를 개혁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공룡과 같은 이 두 낡은 기구를 폐쇄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때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던 모습은 아직도 현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은 그동안 뒤집어진 게 분명하다.

- 월든 벨로, 2000년 5월 7일, 『한겨레신문』

프라하

9월 26~28일, 체코 프라하에서는 제55차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의 연차총회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이 대회는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열렸던 춘계총회를 이어 매년 하반기에 열리는 추계총회이자, 181개 회원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금융계 인사 등 1만 6천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그러나 26일 공식 개막된 연차총회는 27일, 예정보다 하루 서둘러 막을 내렸다. IMF 대변인은 “회의 대표들이 예상보다 빨리 일을 진행, 예정을 앞당겼다”며, “조기 폐막은 반세계화 시위와 상관이 없다”라고 궁색하게 변명하였지만 26일 밤의 격렬한 반세계화 시위를 피해 일정을 앞당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350여 개 단체, 1만2천여 명의 격렬한 세계화 반대 시위가 180여 개국 정상과 대표들이 참석한 ‘자본주의 대회동’을 서둘러 끝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프라하 총회는 비상사태나 다름없는 긴장상태 속에서 치루어졌다. 체코 당국은 대회시작 전부터 1만 1,000여 명의 경찰과 5천여 군병력, 최루탄 발사기와 장갑차, 물대포, 헬리콥터 등을 동원하여 시내곳곳에 배치하는 등 경비를 강화했고, 각급 학교과 극장들은 문을 닫았다. 이처럼 개막된 총회의 주요 의제는 IMF 구제금융제도 개혁, 구조조정의 성공을 위한 정책협의 강화, 중채무․최빈곤국가(HIPC)들에 대한 외채 경감 등 두 국제금융기관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잡혀져 있었다.
국제 시위대는–워싱턴 시위의 연장선상에서–제3세계 외채 지불 거부,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중단, IMF․IBRD의 해체 등을 주요 구호로 내세우면서 양대 기구와의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하였다. 시애틀에서의 WTO 반대집회, 워싱턴에서의 IMF․세계은행 춘계총회 등 미주 지역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시위의 바톤을 이어받아, 유럽 지역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동유럽 지역에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적인 다양한 사회운동들도 집결하였다.
그렇지만 WTO․IMF․IBRD 국제금융기구들을 비롯한 각종 국제행사들을 방해하거나 무산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전술들이 채택된 것은 오래지 않은 현상이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행사들에 대응하기 위한 한시적인 국제 네트워크들이 구성되고, 서로 다른 이념과 투쟁 목표를 갖고 있는 집단들이 서로 얽혀 시위를 조직하는 것은 특히 그러했다.
시애틀-워싱턴-프라하에서의 ‘직접행동’은 구조화되려는 틀들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였다. 기존의 각종 사회운동 단체들이 주체가 되었던 대개의 대항회의가 NGO들이 동반자의 위상으로 ‘로비 전략’을 펼치는 장이었다면, 최근에는 제3세계의 나라들이 현재 겪고 있는 외채․빈곤의 문제를 세계적으로 직접 호소하고, 국제금융기관들을 전술적 타겟으로 하여 그 반대투쟁을 확산시키는 장으로서의 의미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상들이 등장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다자간투자협정(MAI)이었다. 기업과 해외투자자의 권리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MAI의 파괴적 위험성은 사회 각 부문 전반에 걸쳐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세계적인 수준의 연대투쟁의 활성화는 이후 세계화 반대를 공동의 목표로 하는 국제연대투쟁의 가능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흐름들에 대해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세계화 반대 투쟁에 나서고 있는 각각의 운동단체들이 너무나도 다채로운 이념적 스펙트럼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바, 일관성을 갖는 공동의 전망들을 만드는 게 가능하겠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진작부터 나오고 있었다. 또한 네트워크형 조직, 운동형태들이 개방성과 유연성이라는 장점만큼이나, 전략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음에 따라 일사분란한 투쟁전술들을 펼쳐나가기 어렵다는 지적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장기적인 운동의 전망이 현존하는 운동들의 단순합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면, 세계화 반대투쟁을 일관된 맥락에서 최후까지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어디로부터 나올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될 터이다. (물론 사회운동간의 연대와 조정은 언제나 항상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투쟁의 발전 경로에 있어서, 그 역할은 제3세계의 기층 민중운동으로부터 나오리라 예견할 수 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최근까지 일종의 ‘선도투쟁’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던 국제금융기관 반대 투쟁이 각각의 지역 또는 국가로 환류되고, 노동자․민중운동이 수행하거나 수행할 구조조정 반대 투쟁과 정치적으로 결합되는 게 긴급한 과제인 것이다.

4. 반세계화운동의 현황

시애틀 투쟁을 출발점으로 반세계화운동은 강력하게 전개되어 왔다. 서울, 퀘벡, 제노바에 이르기까지 세계화와 관련된 국제기구의 회의가 있을 때마다 다양한 반세계화 운동 세력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국제회의가 있는 곳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 급진 종교세력 등 성격이 다른 세력들이 혼재하는 시위대가 등장하였다.
IBRD는 반세계화 시위를 우려하여 2001년 6월말 바르셀로나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연례 개발경제회의를 취소했다. 회의가 열리면 현지 비정부단체, 무정부주의자, 분리주의자, 공산주의자 및 세계 각국에서 초청된 운동가를 합쳐 3천 명 이상이 가두시위를 벌일 예정이었다.
G8 정상회담이 열렸던 이탈리아 제노바에서는 회담기간 내내 10만 명의 시위대가 격력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1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고 2백여 명이 부상했으며, 외국인 1백여 명을 포함해 280명이 체포되었다. 사망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위는 더욱 거세졌으며 독일, 그리스, 스페인 등 인근 국가에서도 세계화와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반세계화 시위와 9․11테러의 영향으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워싱턴에서 개최키로 했던 제56차 IMF/WB 연차총회를 취소했다.
반세계화운동이 발전해 감에 따라 내부의 차이도 드러나고 있다. 우선 세계화를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하면 거부, 대안, 개혁의 세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거부진영은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 세력이고 급진적 주장만큼이나 저항의 형태도 격렬하다. 대안진영은 탈물질적 대안가치를 추구하고 대중적 저항을 추구한다. 개혁진영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민주적 세계화’를 주장하고 구체적 프로그램을 제시함으로써 저항의 실현가능성을 담보한다. 투쟁방법과 관련해서는 폭력의 사용을 용인할 것인가, 기존 제도를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쟁점이 되고 있다. 다자간 기구나 지역간 기구회의, 정상회담 등이 열릴 때 나란히 개최되는 민간단체회의가 공식 채널과 협력, 비판, 갈등 중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입장의 차이가 있다.
반세계화운동의 우파진영에는 서구의 노동조합과 NGO들이 있다. 미국의 AFL-CIO는 세계화 반대운동을 자국 노동자의 일자리 유지와 연관시키는 측면이 있다.
반세계화운동의 왼쪽에는 여러그룹이 있는데 우선 극좌적 무정부주의를 꼽을 수 있다. 흔히 ‘흑생그룹’이라 불리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흐름이다. 좌파에서 중요한 흐름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기반을 둔 ‘제4인터내셔널’이나 영국의 ‘사회주의연합’, 그리고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등이다.
반세계화 운동세력들이 자본가․선진국들 중심의 세계경제포럼 WEF 등에 대항하고 세계화의 대안추구를 위해 추진한 것이 2001년 2월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제1차 세계사회포럼 WSF 이다. 이 사회포럼은 브라질 비정부기구들이 처음 제안하였고, 급진적 반자본주의 진영, 세계금융 및 무역제도 폐지론자, 제3세계 채무말소론자 등 급진적 진영(제4인터내셔널, 프랑스 혁명공산주의동맹당, 월든 벨로의 포커스 지구 남반부 등)과 지역적 지구적 수준에서의 케인즈주의적 합의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진영(브라질 기업가들의 상파울루 그룹, 르몽드 디플로마크의 베르나르카상, 룰라 등 브라질 노동자당 우파, 프랑스 사회당 일부 등)이 참여하여 조직되었다. 대표단으로 등록한 인원이 5천 명, 기타 참여인원 2망여 명으로 대회 분위기는 대체로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것이었으나 참가세력의 이질성으로 공동선언문 등은 발표되지 않았다.5. 반세계화 운동의 몇 가지 특징

최근의 반세계화 운동에서 보여진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그 구성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들 수 있다. 특정 부문 이슈(여성, 환경, 인권, 소비자, 건강 등)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던 세력들이 ‘세계화 반대’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시애틀과 워싱턴의 수만의 시위대들은, 전통적인 좌파세력(노동운동 및 좌파정당)에서 진보적 교회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도시/농촌공동체 및 원주민운동, 여성운동조직, 청년 및 장년 조직, 에이즈인권활동가, 보건의료운동, 장애인 로비단체, 소비자운동 그리고 환경운동까지 실로 다양했다. 이러한 현상은 ‘반(反)세계화 동맹’을 매개로 한, “대중운동과 NGO, 프롤레타리아 활동가와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 여성과 남성, 환경주의자와 노동자”간의 결합 가능성을 시사한다.

둘째, 앞서 언급했듯이 내부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반세계화의 논리에 있어 다양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일례로 워싱턴 시위의 공식구호는 IMF와 IBRD의 개혁도 해체도 아닌 ‘회의 저지’였다. 여기에는 시애틀 시위 때 일정부분 드러났던 반세계화 운동의 한계가 놓여 있는데 ‘50년이면 충분하다’의 소렌 앰브로즈는 이 대목을 “통합적 세계화의 세 축을 이루고 있는 WTO, IMF, IBRD를 개혁할 것인지 해체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의 합일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낮은 수위로 구호를 결정했다.”고 정리했다.

셋째, 남반구 NGO 및 사회운동 세력들 간의 연대가 강화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제적인 연대행동은 북반구 NGO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최근 남반구 사회운동 및 대중운동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투쟁에 기반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함으로써, 그 지형이 변화하고 있다. 가장 상징적인 예는, 외채탕감운동을 주도해 온 ‘쥬빌리 2000 캠페인’의 분화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이의 핵심적인 쟁점은 ‘외채탕감의 조건(conditionality)’과 ‘탕감 대상 외채의 규모와 범위’ 등이다. ‘외채탕감 조건’에 대해 특히 남반구 사회운동세력들이 반발하고 나서는 것은, 그것이 혹독한 긴축재정, 수출주도성장 전략 등 IMF 구제조건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넷째, 개방성과 유연성을 지닌 네트워크형 조직, 운동형태들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전략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음에 따라 일사분란한 투쟁전술들을 펼쳐나가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지만, 투쟁은 지속되었고 1~2년에 걸친 공동행동의 계획을 함께 논의하여 결정해 가는가 하면 안정된 조직력을 지닌 거대한 움직임으로 드러나고 있다.

다섯째,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네트워크 및 자율적 동원체제의 형성과 발전 역시 최근 국제연대운동의 경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시애틀과 워싱턴 투쟁의 경우, 상당히 많은 대중들이 어떠한 NGO나 대중조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인들이 참여했고, 풀뿌리 운동이 국제적인 연결망을 갖춤으로써, 자신들의 투쟁을 세계화시켜내고, 곧바로 국제적인 연대행동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