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우리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먼슬리 리뷰] 지식기반 경제에서의 직업 정체성
이 글은 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대학에서 국제노동학 교수로 재직 중인 어슐러 휴스(Ursula Huws)가 미국의 평론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최근호에 기고한 글의 전문 번역이다.
이 글에서 휴스는 이른바 ‘지식기반 경제’의 세계적인 확산과 그에 따라 초래되는 ‘직업 정체성’의 붕괴가 인간의 노동과 노동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성찰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에서 사회적 현안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나 ‘일자리의 해외이전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휴스는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사이버타리아트〉의 저자다. 이 번역의 원문은 www.monthlyreview.org/0106huws.htm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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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얼른 알아보기 어려울 때 우리는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게 된다.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소규모 부족사회를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사람의 직업일 것이다.
유럽의 여러 문화권에서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이 가족의 성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슈미트, 에레로, 르페브르 등의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선조는 대장장이이고, 웨인라이트, 바그너 등의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마차 제조공의 후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뮐러는 방아꾼의 후손, 불랑제는 제빵공의 후손, 게레로는 군인의 후손이다. 북미의 전화번호부를 들여다보면 포터(짐꾼), 부처(백정), 카터(마부), 쿠퍼(통 제조공), 카펜터(목수), 피셔(어부), 셰퍼드(양치기), 쿡(요리사) 등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서 발원한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남아시아에서도 노동의 분업이 진전되면서 여러 사회구조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됨에 따라 누구나 직업적 정체성을 부여받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수드히어 비로드카르(Sudheer Birodkar)는 이렇게 설명했다.
“직업의 전문화는 4대 바르나(카스트) 중 하위 2개의 바르나인 바이샤와 수드라가 다양한 자티(각 카스트 안에서의 직업상 구분)로 나뉘는 데 핵심 요소였다. (…) 직업에 대한 카스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추방당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자티가 차마르(신발 만드는 사람)인 사람은 평생 차마르로 살아야 했다.
차마르인 사람이 쿠마르(항아리 만드는 사람)나 다르지(옷 만드는 사람)가 되려고 한다면 차마르 집단에서 추방당할 수 있었고, 설사 그가 신발 만드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카스트에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수공 기술에 기반을 둔 직업 정체성 구분은 자동화의 영향과 공장 시스템의 도입에 따라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관계에는 노동자들을 서로 간에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무차별적인 대중으로, 다시 말해 노동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로 전락시키는 일반적인 경향이 내재돼 있다.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능과 그런 기능을 갖춘 노동자가 얼마나 희소한가는 그런 기능을 갖춘 노동자들이 사용자들(그런 기능을 갖춘 노동자가 자영업자라면 고객들)을 상대로 더 높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협상할 수 있는 능력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따라서 여러 용도에 두루 사용할 수 있는 범용의 기능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최대한의 대체가능성이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는 노동계급의 존재는 자본에 이익이 된다. 범용의 기능만을 지닌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데는 비용이 적게 들고,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노동자들이 말썽을 부리면 사용자들은 그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다.
특정한 기능, 지식, 경험의 소유를 중심으로 형성된 직업 정체성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수수께끼다. 이런 직업 정체성은 한편으로는 노동자 조직화의 기본단위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넓은 계급의식의 발달에 장애물이 된다.
노동자 조직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특정한 직업 정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 속에서 자라나왔다. 이때 직업 정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은 강력한 내적 연대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내포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집단의 효력이 강력한 경계와 진입장벽에 근거한다는 의미에서는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도제제도를 비롯해 특정 직업으로의 진입을 제약하는 메커니즘 중 일부는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하던 길드와 같은 제도적 형식들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길드의 조합원들은 공식적인 입회식에서 동업자들끼리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고, 조합원들 간의 유대관계는 강화하지만 외부자들은 배제하는 여러 관행적 행사나 행동에 참여해야 했다.
길드 이후에 나타난 다른 많은 직업 기반 집단들 중에서는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를 판정하는 기준에 성별과 인종을 제한하는 요소를 포함시킴으로써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한 사회적 동질성을 보이게 된 경우도 많았다. 이로 인해 직업 기반의 집단이 보다 넓은 범위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성격도 갖게 됐다.
그러나 직업 기반 집단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되고 사용자들에 휘둘리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전체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가 더 높은 임금이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얻어내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더 폭 넓게 보면, 직업 기반 집단들은 인구 전체에 혜택이 돌아가는 생활보호 입법이나 복지제도의 도입을 촉진하는 운동을 주도할 수 있다. 직업 기반 집단의 이런 역할은 특히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직종별 노사교섭보다는 산업별 노사교섭이 발달하도록 유도해 온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 자본주의에서 발달한 복지국가들은 그 형태가 다양하고 서로 다른 특색을 보였지만 공통점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런 복지국가들이 이루어낸 성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대량생산의 생산성 이득 중 일부를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도록 사용자들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노동자 조직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였다는 점이다.
그런 결과 중 하나로 사용자들과 국가가 일종의 타협, 즉 공장 등 작업장이 언제라도 노동자들에 의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데 대한 불안감을 갖지 않고도 작업장을 운영해나갈 수 있도록 노동자들이 배려해주는 대신 사용자들과 국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완화한다는 타협을 하는 데 동의했다. 노동자 조직의 형태는 나라마다 달랐다.
영국에서 지배적이었던 직종별 노조와 같은 직업 기반의 노동자 조직도 있었고, 강한 직업 정체성을 가진 노조 지도자들이 이끌고 보다 포괄범위가 넓은 노조에 기반을 둔 노동자 조직도 있었다. 이와 동시에 노동시장이 성별과 인종별로 뚜렷하게 나뉘기도 하고, 그 밖의 여러 다른 요인들에 의해 노동시장이 더욱 세분되기도 했다.
노동 기능은 노동자들 스스로에게만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게 아니다. 노동 기능은 자본에게도 역시 그 의미가 모호하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필수적인 변화의 원동력이 되는 혁신의 과정은 노동자의 기능을 필요로 하는 데서 매우 모순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어떤 작업이 자동화되기 전에는 그 작업의 모든 과정을 자동화하고 표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과정의 각 단계를 반복해 수행하는 기계장치의 프로그래밍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누군가의 전문성과 경험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단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지식과 경험, 기능이 일단 활용되고 나면 그것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그 대신 더 저렴하고 기능이 떨어지는 노동자들을 새로 도입된 기계장치를 돌리는 일에 투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넓게 보면 노동자의 기능에 대한 수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고, 그 생산의 과정을 설계하고, 새로운 목적에 맞춰 제품과 생산과정을 다시 조정하고, 자본주의의 수레바퀴가 계속 원활하게 굴러가도록 해주는 많은 제품과 서비스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콘텐트를 서로 주고받거나 제공해주고, 사람들을 돌보고 교육하고 정보제공을 하고 기분전환을 하게 해주는 제품과 그 제품의 생산과정을 창출하고 설계하는 데 인간의 지식, 손재주, 창조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노동기능도 그 일부는 좀 더 적은 수의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그리고 기능의 수준이 보다 낮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수행될 수 있도록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을 컴퓨터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에 집어넣는 과정에 말려든다.
예를 들어 기술지원 부서에서 일하는 전문 도우미 노동자들은 고객으로부터 자주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데이터베이스에 집어넣도록 요구받는다. 이런 사측의 요구는 보다 하위의 일선 직원들도 그런 대답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강의를 전자학습(e-learning) 방식으로 전환시키라는 요구를 받는 대학교수의 지식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작업을 수행하는 일이 정형화되어 특별한 기능 없이도 누구나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상품화 과정 중에서 그 다음 단계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노동자’ 집단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점점 더 기술적으로 복잡한 자본주의의 발달이 노동자들에게 ‘기능박탈(deskilling)’을 초래하는가, 아니면 ‘기능재습득(reskilling)’을 초래하는가 하는 논란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혁신의 과정이 지닌 특징이다.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 발달하는 과정의 각 단계에서 ‘머리’와 ‘손’의 분리가 거듭 새로이 이루어진다. 어느 한 집단의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를 정형화하기 위해서는 그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대한 종합적 지식을 갖춘, 흔히 그 수가 보다 적은 노동자 집단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변화에 저항하거나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화함에 따라 부단히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나고, 기존의 직업들은 형태가 바뀐다. 직업 정체성은 배타적인 동시에 내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지속적인 구축과 해체의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용자들은 한편으로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잘 교육되고 창조적인 노동자의 공급이 계속 이뤄지도록 보장받아야 할 필요성,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의 가치를 저렴하게 만드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동시에 충족하는 균형 잡기를 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사용자가 다른 기업들에 비해 우월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노동자의 기능과 지식에 대해 재산권에 입각한 통제력을 보유할 수 있기를 원하기도 한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노동시장이 작동하는 형태가 결정되는 데 노동 기능이 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의 사회는 고전적인 계급적 양극화로 그려진 사회의 모습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변해왔다.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재화와 자본의 순환과정을 통제하며 국가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지령하는 부르주아와 점점 더 동질화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 사이의 양극화로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더 낮은 임금만 받고도 고분고분한 태도로 동일한 노동을 해줄 수 있는 실업자 산업예비군 중 누군가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의 인식에 의해 단속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현실 사회는 이런 그림보다 훨씬 복잡하다.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 점점 더 복잡하게 전개됨에 따라 이런 그림과는 반대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즉 매우 다양한 노동 기능들에 대한, 부단히 변화하는 수요가 창출되며, 그런 노동기능들 가운데 다수는 산업발전 과정의 특정 국면이나 특정 부문, 특정 경영과정, 특정 제품, 심지어는 특정 기업에서만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필요한 노동 기능이 다양화하고 고용계약상의 의무나 지리적 위치의 측면에서 더욱 더 다양하게 노동분업이 이뤄지더라도, 산업예비군은 노동자, 사용자, 국가 사이의 타협(이는 흔히 ‘포드주의 타협’이라고 불린다)이 붕괴했거나 심각하게 긴장된 최근의 노동시장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절한 개념이다.
노동시장에 대한 이런 이해를 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노동시장의 작동에서 직업 정체성과 노동 기능이 하는 역할에 대한, 좀 더 다양하게 차별화된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점점 더 복잡해지고 격동하는 경제에 생겨나는 틈새를 메우는 데 필요한 범용의 기능을 노동인구가 갖추도록 하는 데에서 국가가 하는 역할과, 직업 간 경계선을 흐리게 하고 조직화된 노동의 힘을 잠식하는 데에서 그런 범용의 기능이 하는 역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분석을 하기 위한 출발점 중 하나는 노동이 거래되는 시장, 즉 노동시장 그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노동시장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도 물론 여러 가지가 있다. 노동의 특성과 자본의 특성에는 극도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며, 이런 점은 노동의 거래를 재화나 서비스의 거래와 매우 달라지게 만든다.
노동시장에 제공되는 기본단위인 인간의 육체는 힘과 인내력, 민첩성에서는 물론이고 몇 시간이나 일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있어서도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점은 자본과 원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한 얼마든지 계속 더 많이 이용될 수 있는 기업의 다른 자원들과 다른 것이다. 노동은 자본처럼 물리적 이동성을 갖고 있지 않다.
자본이 제멋대로 얼마든지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자유무역의 시대에도 노동은 다른 나라에 존재하는 기회를 이용할 능력이 크게 제약돼 있다. 당신이 산 채로 다른 나라로 가서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얻는 것보다는 아마도 당신이 죽은 뒤에 시체가 국경을 넘는 것이 오히려 쉬운 경우가 많다.
노동시장은 독점이나 수요독점(노동력의 구매자가 하나만 있는 경우), 카르텔, 기업끼리나 노동자끼리의 다양한 연대, 국가의 개입, 노동인구의 성별, 인종별 구분을 심화시키는 가용 노동시간이나 이동 상의 제약(예를 들어 임금이 지급되지 않아도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한 많은 요인들에 의해 왜곡된다.
남성에게만, 백인에게만, 또는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특정한 직업들의 문호가 열려 있는 노동시장은 결코 자유시장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직업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노동시장에서 순수한 경쟁이 발달되는 것을 가로막는 요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도로 복잡하고 갈수록 글로벌화하는 기술적 노동분업 속에서 사용자들이 특정한 기능을 갖춘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노동시장 이론화의 시도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내부 노동시장과 개인의 노동력 분석(Internal Labor Markets and Manpower Analysis)〉(1971)이라는 획기적인 저서에서 저자인 피터 되린저와 마이클 피오레는 이중 노동시장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모델에서는 직업이 대체로 두 개의 카테고리, 즉 ’1차 노동시장’ 또는 ‘내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직업과 ’2차 노동시장’ 또는 ‘외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직업으로 나뉜다. 두 저자에 따르면 내부 노동시장은 내부 규칙의 체계에 의해 외부 시장의 힘과 격리된다.
사용자들이 특정한 작업관행에 맞춰진 특정한 노동 기능을 필요로 하는 경우 그 사용자들은 충성도 높은 노동자들을 유지하기 위해 더 높은 임금, 연금, 휴일, 기타 일련의 부가혜택을 포함한 유인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
아울러 두 저자는 내부 노동시장은 특정 기업에 국한된 지식에 크게 의존하는 내부 승진경로를 갖고 있으며, 고도로 구조화되고 위계적인 형태를 띠는 게 보통이라고 말한다.
이런 내부 노동시장에서는 사용자들이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달성하기 위해 기업 내부의 자체 교육훈련에 기꺼이 많은 투자를 한다. 달리 말해 내부 노동시장의 임금 및 노동조건의 수준은 순수한 형태의 외부 노동시장에서 실현되는 임금 및 노동조건의 수준과 다르다.
내부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지점들은 통과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통과해 내부 노동시장에 진입한 노동자들은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된다. 외부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암묵적 타협은 이런 내부 노동시장의 상황과 매우 다르다.
외부 노동시장에서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장기간의 약속을 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고도의 헌신성과 생산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되린저와 피오레가 위의 책을 쓰던 1960년대 말에는 전형적으로 내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노동자는 공무원 또는 IBM이나 제너럴모터스와 같은 대기업의 노동자였고, 전형적으로 외부 노동시장에 속하는 노동자는 수위, 작가, 그리고 자신의 노동 기능을 다양한 고객에게 제공하는 자영업 형태의 노동자였을 것이다.
이런 이중 노동시장 모형은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경제사회들 사이의 복잡한 임금차이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는 점이 곧 분명하게 드러났다. 되린저와 피오레의 통찰은 다른 분석가들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다중 노동시장’ 또는 ‘분절 노동시장’ 모델로 발전했다.
분절 노동시장이라는 개념은 국가적인 교육 시스템, 노동보호 입법, 노동자들의 조직화 방식을 포함한 여러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임금과 노동조건이 서로 다르게 형성된 다수의 노동시장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돌이켜보면 되린저와 피오레, 그리고 두 사람을 따른 사람들에 의해 묘사된 내부 노동시장은 현실의 경제 속에서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의 한 특정한 국면, 즉 2차대전 이후 타협의 시기에 특히 잘 들어맞은 이론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타협의 시기가 종식됐다는 선언이 자주 들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 시기를 구성한 요소들이 미래의 자본주의에도 계속 유용하거나 필요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타협의 시기가 전성기를 이미 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그 시기가 어떻게, 왜 붕괴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의 타협이 황금기의 실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대규모 조직들 내부에서 그 필수적 ‘핵심’과 자본 사이에 이뤄진 특수한 타협이 유효하게 기능했던 것은 그런 타협이 모든 노동자들에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능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귀족들이 자신들의 힘을 발휘해 노동계급 중 많은 부분에 폭넓은 이익을 가져다준 역사적 순간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보다는 내부 노동시장에 소속된 행운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스스로 알고 있었고, 2차 노동시장에서의 삶은 어려울 수 있다는 인식에서 질서를 수용하고 지켰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런 식의 포섭과 배제의 패턴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의해 강화되기도 했다.
둘째, 2차대전 이후의 모델은 보편적이었던 게 아니라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 포섭과 배제의 나라별 형태는 노동자 조직이 발달돼 온 각국의 특수한 방식과 더불어 각국의 특수한 산업구조와 역사에 의해 형성됐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개별 산업부문 차원의 단체협약을 촉진했고, 이는 곧 ‘내부 노동시장 타협(insider deal)’이 특정 산업부문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예컨대 영국처럼 직종별 조합이 강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타협의 형태, 즉 특정 직업집단에만 타협이 적용되는 경우와 다른 것이었다.
이는 또한 기업 차원의 단체교섭이 지배적인 곳에서 특정 기업에만 타협이 적용되는 형태와도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타협의 형태는 복지체계의 유형, 투자의 형태, 정부 개입의 정도와 방식, 교육훈련 및 취업자격 체제 등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가 직업들이 규정되는 방식에 다시 반영된다.
데이빗 코츠(David Coates)는 이런 차이들이 경제 전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포괄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내부 노동시장 타협’은 ‘외부 노동시장 타협’의 여러 유형들에 의해 보완됐다는 것이다.
이는 곧 2차대전 이후 타협의 붕괴도 나라별로 각기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나라별 차이를 부분적으로나마 모델화하기 위해 로즈메리 크롬프턴(Rosemary Crompton)의 도표를 일부 수정한 위 도표를 이용해서 이중 노동시장 이론을 성 및 계급의 이론과 통합시켜 설명을 시도해 보겠다.
이 도표는 나라마다 노동시장이 다른 형태를 보인다는 점을 분석하는 데, 특히 지금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겪고 있는 급속한 구조적, 기술적 변화의 시기에 노동시장이 나라별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고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이 도표는 내부 노동시장과 외부 노동시장을 양 극단의 노동시장으로 보고 그것을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표시하며, 그 사이에 중간적인 유형의 부문별 노동시장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어 이 도표에는 또 하나의 측면, 즉 노동 기능이라는 변수가 추가된다.
이 변수는 위, 아래로 표시된다. 이처럼 두 개의 축으로 이뤄진 도표를 이용하면 임금이 지급되는 노동이라면 그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어딘가에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높은 임금을 받는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무원은 오른쪽 위의 코너 B 근처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다양한 고객을 위해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프리랜스 회계사의 노동 기능 수준도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무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높겠지만, 도표에서 그의 위치는 코너 A쪽으로 달라질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코너 D 근처에는 대규모의 안정된 기업조직에 새로 취직한 신입직원이나 견습직원을 비롯해 견습 우편물 분류사처럼 직업 사다리의 맨 밑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이 위치할 것이다.
그리고 왼쪽 아래의 코너 C 근처에는 과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과 같은 계절적으로만 고용되는 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 일시적으로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 하는 노동자 등이 위치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물론 그 중간 곳곳에 중간적인 노동 기능의 노동자들이 위치하게 된다.
조합주의 정치, 역사적으로 강력하게 유지돼 온 내부 노동시장, 교육훈련에 대한 사용자들의 상당한 투자, 엄밀하게 정의된 직업구분, 사용자 기반의 플랜과 연계된 복지제도가 존재하는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노동인구의 상당한 부분이 도표의 오른쪽에 편중돼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형적인 직업경력의 궤적은 코너 D에서 출발해 사용자가 제공하는 교육훈련을 거치고 기업 내부의 규칙을 따르면서 점차 코너 B로 상승해가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보다 자유주의적인 노동시장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은, 보다 큰 비중의 노동인구가 도표의 왼쪽에 몰려 있는 형태일 것이다.
이렇게 도표의 왼쪽에 위치한 사람들은 자영업 형태의 노동을 하는 개인들, 그리고 기업 내부에서 승진할 기회나 당장 취업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교육훈련을 받을 기회를 거의 누릴 수 없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기 어려운 임시직이나 파트타임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형태의 노동시장을 가진 나라에서는 기본적인 고등교육 이상의 자격을 가진 노동자들은 그런 자격을 자신이나 부모의 비용으로 획득한 것이다. 이런 형태의 노동시장을 가진 나라에서는 코너 C 근처에 위치한 다수의 무차별적 불안정 노동자 대중과 코너 A나 B 근처에 위치한 소수의 특권층 노동자 사이에 생활수준의 큰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이상의 두 가지 모델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용상의 지위보다는 개인의 시민권에 더 밀접하게 연계된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교육훈련은 공적으로 제공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높은 수준의 기능을 가진 노동인구가 도표의 위쪽 절반 영역에 많이 위치하고, 코너 C나 D 근처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노동자들만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이와 달리 공식부문의 노동자 수가 아주 적다. 다시 말해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코너 A와 C가 위치한 도표의 왼쪽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사 공정성을 제고하는 규칙이 있다 하더라도, 이 모든 형태의 노동시장 각각에서 실제로 모든 인구에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백인 남자인 거주자가 일반적으로 코너 B가 들어 있는 사분면을 지배할 것이고 이주자, 유색인, 여성은 코너 C가 있는 사분면에 주로 위치하게 될 것이다.
이 도표는 노동시장을 정태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으로서만 유용한 게 아니다. 이 도표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조직적 리스트럭처링이 노동자들에게 상이하게, 동태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방식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용자들로 하여금 노동비용을 줄이도록 하는 유인은 어느 나라에서건 동일할는지 모르지만, 그에 따른 리스트럭처링의 모습은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
조합주의 국가의 노동시장에서는 고용된 노동자들이 강력한 조합이 사용자와 체결한 노사협약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내부 노동시장의 경계선이 분명하고, 따라서 노동자 각 개인이 내부 노동시장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가 분명하다.
이런 나라에서 내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공식적인 취직 절차를 통하는 것이고, 가장 일반적인 퇴출의 방식은 공식화된 해고나 퇴직의 절차를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부 노동시장 안에 들어와 있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복지혜택의 대부분이 고용상의 지위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퇴출당할 경우 잃어버릴 것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퇴출당하는 데 대해 격렬히 저항하며, 내부 노동시장에 자신이 갖고 있는 발판을 잃기보다는 직장에서 자기가 맡고 있는 일자리에 대해 급격한 리스트럭처링이 이루어지는 것을 수용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다기능(멀티태스킹)화로 불리는, 전통적 직업구분의 붕괴를 수용하는 것도 그같은 리스트럭처링 수용의 한 형태다.
이런 나라에서는 노동자가 일단 실업자가 되면 다른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다. 이는 노동기능이 특정한 산업이나 기업에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용자들이 장기간의 고용계약을 해줘야 하는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를 기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나라에서 보수가 괜찮은 일자리에 안정적으로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자가 이탈하는 경로는 도표에서 ‘실업’이라고 쓰인 화살표의 방향으로 가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가 적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내부 노동시장이 훨씬 덜 보호되고, 노동자의 입장에서 내부 노동시장에 들어 있다는 것의 편익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나라에서는 사용자들이 상황변화에 대해 정규직 고용을 비정규직화하는 것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임시 고용이 풀타임 고용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데에 점점 더 많이 이용되고, 여전히 필요하긴 하나 항상 필요하지는 않은 기능만을 갖추고 있는 직원들은 파트타임 노동자나 프리랜스 노동자로 전환하도록 권유되며, 노동의 아웃소싱이 점점 더 많이 이용된다.
따라서 이 경우 내부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는 과정은 도표에서 ‘비정규화’라고 쓰인 화살표의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의 비정규화는 미국과 영국 외에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와 같은 나라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서도 실업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실업이거나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경향이 덜한 경우가 많다. 그 대신 이들 나라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은 마치 포드자동차의 기계장치에 녹이 스며들어 번지는 것처럼 노동시장 전체에 고용의 위태로움이 확산되면서 노동조건이 전반적으로 나빠지고 고용의 안정성이 점차 악화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들이 중요한가? 경제 전문 언론매체의 독자들은 독일에 500만 명의 실업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유럽의 노동시장 정책이 ‘경화’되었거나 ‘경직적’이기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기사에 익숙할 게 뻔하고, 보다 리버럴한 유럽 언론매체의 독자들은 자기착취의 집단행동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한 채 늘 과로하는 ‘앵글로색슨’ 국가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린 기사에 익숙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식은 노동자들 사이에 단합을 촉진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많은 수의 실업자 대중과 기간제 노동자를 비롯한 한시적 노동자 대중은 어느 정도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즉 실업자와 한시적 노동자는 둘 다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노동시장에서 보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임금수준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운동을 제약하는 산업예비군이라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현대 경제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내고 있고, 그러는 가운데 다양한 생산요소들이 투입되며, 모든 작업은 아니더라도 많은 작업들이 단순한 근육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달리 말해 노동의 기술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이제는 대부분의 직업이 각각 특정한 노동기능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각의 직업이 요구하는 특정 기능을 갖추지 못한 산업예비군은 쓸모가 없다. 그런데 많은 작업들이 요구하는 특정한 노동 기능의 대부분은 한 세대 전에 요구되던 노동 기능, 즉 20세기 후반에 직업 정체성을 형성시킨 노동 기능과 같지 않다.
선반공, 식자공, 재단사, 그래픽 디자이너, 영화 편집자, 교정원, 천공기사, 오디오 타이피스트(테이프에 녹음된 소리를 들으면서 그대로 타자하는 사람), 전화교환원과 같은 직업들은 과거에 베를 짜던 사람이나 필경사와 같은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됐거나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는 일의 모습이 바뀌어버렸다.
이런 변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보기술(IT)이다. 컴퓨터의 이용이 상이한 생산과정들, 산업들, 기업들 사이에 남아 있던 많은 차이들을 모두 다 없애버린 것은 아니지만 상이한 생산과정들, 산업들, 기업들에 필요한 정보를 조직화하고 조작 또는 활용하는 데 표준화된 절차를 도입했다.
일상적인 노동에서 실제로 컴퓨터를 이용하는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사용자들은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고 실제로 컴퓨터를 작동시킬 줄 아는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 집단과 협상해야 하는 입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용자들 가운데 일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소수 컴퓨터 도사들만의 배타적이고 신비화된 영역이었던 1960년대에 그런 협상을 해야 했지만, 지금의 사용자들은 그 누구도 그런 입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이 컴퓨터를 잘 다룰 줄 알게 하기 위한 교육훈련에 스스로 큰 투자를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노동자들이 풍부하게 공급되어,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런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고, 필요 없게 되면 얼마든지 해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 수요가 급증할 때 필요한 노동 기능을 구하지 못해 손발이 묶일 수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노동자들의 풍부한 공급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흥미롭게도 19세기의 상황이 지금과 비슷했다. 당시 산업과 국가경제, 제국주의 국가의 조직화가 복잡하게 되자 글을 읽을 줄 알고 셈을 할 수 있는 노동인구가 필요해졌다.
국제무역을 하는 데 따르는 모든 거래와 관련된 송장과 영수증의 처리를 담당할 사무원들이 필요해졌고, 누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했는지를 기록해뒀다가 그것을 토대로 임금계산을 하는 일도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육체노동자도 읽고, 쓰고, 간단한 산수를 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됐다.
그래야만 그들도 작업지시를 받고 재고량을 세는 일 등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능을 소수의 노동자들만 갖추고 있다면 그런 기능이 그들에게 얼마간의 협상력을 갖게 해주어 사용자들의 운신공간을 좁혔을 것이다. 물론 시간엄수, 강도 높은 노동,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존중 등의 가치관이 이미 주입된 새로운 노동자들이 작업장에 원활히 도착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들이 소비자로서도 글 읽기와 셈 하기 능력을 갖추는 것이 도움이 됐다. 그래야만 그들이 갈수록 더욱 더 화폐에 의존하는 경제 속에서 현금을 다룰 줄 알고, 공적인 신호를 읽을 줄 알고, 어느 상품을 살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던가?
기본적인 학교 교육을 보편적으로 실시하면서, 권위가 존중되고 강력한 노동윤리가 권장되며 무단결석이나 시간 안 지키기가 엄하게 징벌되는 분위기 속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런 기능이 보편화되면 그런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 누구도 시장에서 추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에는 노동 기능의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는 수사가 좀 다르다. 이제 사용자들은 디지털 기기 이용능력이 있고, 자발적 동기부여가 돼 있고, 팀플레이를 잘 하고, 소프트 스킬(soft skill)을 갖추고 있고, 피고용경쟁력(employability)이 있고, 기업가적 정신을 갖추고 있는 노동자들을 원한다.
또한 사용자들은 기술과 시장이 변화함에 따라 새로 필요해지는 노동기능을 학습할 자세가 돼 있는, 흔히 ‘평생학습의 의지가 있다’고 표현되는 사람들을 요구한다. 아울러 사용자들은 특정한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익숙하게 잘 다루고, 글로벌 시장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객들과 의사소통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기능, 능력, 적성, 노하우를 어떻게 조합해 갖춘다 하더라도 그것이 안정된 직업 정체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사실들은 지금의 세계에서는 직업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내 직업의 일부로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직업에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에서는 각각의 직업에 대한 규정이 무한히 신축적으로 되어, 노동자가 물러앉아 “마침내 나는 숙련된 상태가 됐고, 인정받는 직업을 갖게 됐다. 이제부터는 좀 느긋한 자세로 이 직업을 계속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에 결코 도달할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의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 국면에서는 19세기에 노동자들이 글 읽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보편적으로 필요하게 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새로운 범용의 태도와 능력들을 갖추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19세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국가기관들은 그런 범용의 태도와 능력을 갖춘 노동자들을 사용자들에게 원활하게 공급해주는 일에 적극 나섬으로써 사용자들을 돕고 있다. 19세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런 일이 어느 한 나라의 국경 안에서만, 또는 서로 경쟁하는 몇몇 제국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인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뿐이다.
자본주의는 늘 새로운 시장을 찾아 해외로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새로운 노동공급 원천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이 두 가지 필요조건은 서로 분리되기 어렵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러나 세계은행이나 유럽연합(EU)과 같은 초국가적 기구의 교육정책이나 그런 기구의 지원을 받는 개별 국가의 교육정책은 ‘지구적 지식노동자 산업예비군’을 창출하는 것을 명시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런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지구적 지식노동자 산업예비군이 창출되는 과정에서, 그런 지식노동자가 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어느 정도 배타적으로 가진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 누리던 비교우위는 파괴돼버렸다. 이런 식으로 지식노동자 집단을 창출하는 시도는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조합주의 모델을 유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정부가 ‘노동기금’을 다수 설립하고 이를 통해 지역별로 사용자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실업자들에 대한 교육훈련을 실시한다. 한스 게오르크에 따르면 이 나라의 레오벤 시에서는 교육훈련을 받는 피교육생의 38%가 실업자가 되기 전에 일하던 회사로 복귀한다.
이와 관련해 질리언은 오스트리아의 노동기금은 사용자들에게 노동력의 저수지 역할을 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노동기금은 사용자가 다시 노동자를 공급해줄 것을 요구하게 되는 시점까지 납세자의 비용 부담으로 노동자를 재교육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도표에서는 이런 일이 코너 D 근처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심하게 훼손되기는 했으나 아직은 내부 노동시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곳으로의 진입에 대해 국가가 사용자들과 함께 규제에 나선다. 이보다 규제가 덜한 경제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교육훈련이 각 개인의 비용 부담과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도표에서 보면, A-C 축에 놓이는 비정규 노동자들, 그 가운데 특히 왼쪽에 치우쳐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런 과정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용자들에 대한 국가의 보조금 지급이 교육훈련에 직접 지출되는 방식이 아닌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국가가 수행하는 역할이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본다면 국가의 보조금 지급이 구인광고 및 노동자들의 디지털 기기 이용능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초점이 옮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럽연합의 전 지역에서는 ‘유럽 컴퓨터 드라이빙 라이선스(ECDL, European Computer Driving License)’라는 자격이 강조되고 있고, 이 자격의 소지자는 기초적인 컴퓨터 이용능력을 갖춘 것으로 대우받는다.
국제적 수준에서 보면,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교육비 원조가 글로벌 지식기반 경제의 육성과 갈수록 더 명시적으로 관련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를 이른바 ‘케이 포 디(K4D, Knowledge for Development)’와 긴밀하게 연계시킨다.
이런 원조 프로그램은 교육의 개혁을 통신망의 확장과 기업가 정신의 권장, 그리고 기업, 연구소, 대학 등의 효과적인 혁신 시스템 도입과 연결시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유럽연합의 개발도상국 원조 프로그램도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의 2001년도 정책 중 하나인 ‘제3세계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 정책’은 “인적자원 관리를 개선하고, 경쟁적인 세계경제 속에서 유럽연합을 교육, 훈련, 연구개발의 강력한 주도기구로 만드는 것”을 교육정책의 목적으로 꼽았다.
이런 개발도상국 원조 프로그램들은 피원조 국가들에 대해 국가 단위의 자격체계를 해체하고 국내 교육훈련을 국제적인 교육훈련 과정에 연계시킬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적인 교육훈련 과정은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의 대학에 의해 운영되는 교육훈련 과정을 프랜차이즈해갈 것, 초등교육 기관에서 영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칠 것 등을 요구할 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 이용능력, 피고용 경쟁력, 기업가 정신 등을 강조한다.
초국적 기업들은 노동 기능의 지구적 표준을 설정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나 SAP와 같은 초국적 기업들은 자사의 소프트웨어 제품 사용에 관한 자격 코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자사 제품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초중등학교나 대학에 하드웨어나 통신장비를 기부하기도 한다.
유럽연합에서는 e유럽(eEurope) 정책의 실행계획에 따라 2005년에 새로 가입한 10개 국과 아직 가입을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등 3개 국에 대해 컴퓨터 과학 분야의 전체적인 학업성취도에 관해 여러 가지 목표들이 설정됐고, 이밖에도 인터넷 접근성의 수준과 전자상거래의 이용도와 같은 다양한 지식사회 지표들에 관한 목표들도 설정됐다.
헝가리, 체코공화국, 폴란드,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을 위해 비용이 적게 드는 ‘후방 지원부서(백 오피스)’의 역할을 이미 떠맡고 있다. e유럽 정책 관련 문서에서 ‘제3의 국가들’이라고 언급된 나라들은 이보다 더 외곽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알바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연방, 마케도니아공화국,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그루지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러시아연방,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몽골,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모로코, 시리아, 튀니지, 팔레스타인이 그런 나라들이다.
이런 나라들은 영어권에서는 인도, 필리핀, 바베이도스, 프랑스어권에서는 튀니지, 모로코, 마르티니크, 스페인어권에서는 도미니크공화국, 멕시코, 콜롬비아와 같은 처지가 되어간다.
지구적으로 정보노동자들이 바닥으로의 경쟁에 휘말려 있는 상황에서 이런 나라들은 정보노동 아웃소싱의 역외 대상지가 되고 있다. 이런 나라들에는 대용량 통신 인프라가 갖춰져 있을 뿐 아니라 글로벌 언어를 말할 줄 알고 표준화된 글로벌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돌릴 줄 아는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과정이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사용자들은 이런 나라들을 넘나들며 일자리를 이 노동자로부터 저 노동자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부단히 옮길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글로벌 소싱이란 사업상 고객의 수요에 맞춰 필요한 작업들을 다수의 여러 장소에 분산 배치해 각각 현지의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도록 하는 ‘노동의 복잡한 혼합 및 연결’ 체제를 가리킨다.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국내의 일자리가 해외로 옮겨지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국내의 일자리가 제거되는 데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산업예비군이 존재하는 목적은 모든 일자리를 다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규율을 강요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선진국 노동시장의 전체 규모에 비하면 해외로 장소를 옮기는 일자리의 수는 실제로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선진국의 사용자들은 주된 고객들이 본거지를 두고 있는 곳, 즉 국내에서 필요한 노동 기능을 갖춘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대부분 민감한 ‘핵심’ 연구개발 작업은 해외로 옮기기를 꺼린다. 그런가 하면 콜센터와 같이 해외이전이 많이 일어나는 작업 부문들은 전체적으로 확장의 과정에 있는 경우가 많다.
기업들은 자신의 제품을 사줄 국내시장도 필요로 하지만, 국내에 대량실업이 존재한다면 그런 국내시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 시장은 중국이나 인도의 시장보다 여전히 몇 배나 더 크다. 실업은 분명히 발생하고 있고 실업에 의해 현실의 비참이 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리의 해외이전이 가져오는 가장 강력한 효과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일자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이전이 가능한 일자리에 고용될 수 있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노동 기능을 전 세계에 걸쳐 수십만 명의 다른 사람들도 역시 갖고 있음을 안다면 직업 정체성을 토대로 조직화를 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가 얼마든지 해외로 이전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면, 이런 의식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데, 그리고 잔업 등의 추가 노동을 거부하는 데 강력한 잠재적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노동자들의 삶의 안정성과 협상력이 파괴될 수 있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창조성과 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고, 때로는 고도로 전문화된 노동기능을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이런 것들이 고정적이고 안정된 직업 정체성 속에 존재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이처럼 직업 정체성이 파괴되는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현됐던 고임금-고소비의 타협이 종국적인 죽음을 맞고 일자리의 안정성도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속에서 또 한번의 변전을 겪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조직화된 노동이 보호주의와 인종주의에 밀려 붕괴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아니면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창의성과 능력이 국가별로 쳐진 전선을 가로질러서 새로운 형태로 노동의 조직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미래에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때 우리는 그때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번역=이주명 기자)
어슐러 휴스/영국 런던메트로폴리탄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