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와 ‘약’은 투기 대상이 아니다”
[기고] 특허에 가로막혀 약을 구할 수 없는 환자들
2008-03-12 오전 7:52:13
“중국의 경제발전으로 밀의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고, 옥수수가 필요해서 밀 경작 면적을 줄였으며, 석유값이 올라서 재배 원가가 뛰었고, 미국과 유럽 날씨가 좋지 않아 작황이 나빠졌다”라는 게 요즘 국제 밀가루 가격 상승의 ‘공식적’ 이유다.
밀 가격 올라서 웃는 것은 초국적 곡물회사뿐…농민에겐 이익 없다
밀의 수요가 증가하는데, 그리고 더 증가할 것이 뻔한데, 밀 경작 면적은 줄였다는 이야기다. 중국의 식량 시장은 일찌감치 ADM이나 카길 같은 다국적 곡물 기업들의 일대 격전장이었다. 게다가 옥수수 재배나 밀 재배나 그 공급의 90%를 5대 곡물회사가 장악하고 있는데 그걸 모른 채 옥수수만 길렀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또 석유값도 오르고 미국과 유럽날씨는 좋지 않았는데, 다른 곡물은 왜 그만큼(2008년 2월의 밀가루 값은 18개월 전과 비교해 3배가 오른 것이다) 오르지 않은 것일까?
한파로 작황이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높은 가격에 이익을 얻은 농민은 많지 않다.
이미 1년 전에 거대 곡물 기업과 지금 거래되는 값의 반값에 계약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수출을 줄인다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는 카길과 같은 초국적 곡물 기업의 엄청난 자금이 투자되고 있다.
밀 가격 주무르는 초국적 곡물 기업…우연히 뛴 밀 가격
한마디로 말해서 밀가루는 거의 이들 거대 곡물 기업들이 주무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밀가루 값이 이렇게 급등하면서 이들의 어마어마한 냉장창고에 비축한 밀가루가 금가루가 되었고 그간 반응이 시원치 않았던 유전자 조작밀의 소비를 불러올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유전자 조작부터 밀의 생산, 유통, 밀가공식품라인까지 밀가루 가치 창출의 전 과정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곡물 기업의 개입은 없는 것일까? 이들은 그간 개발도상국들에게 곡물을 덤핑해 오면서 가난한 나라들의 농업을 망가뜨렸다. 지속적으로 가격이 하락하던 밀은 갑자기 가격이 뛴 것이다. 우연히도.
이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토지를 엄청난 비료와 농약으로 오염시키면서 싼 노동력을 이용해서 밀을 생산하여 수출한다. 물론 돈을 제대로 지불하는 나라에 한해서다. 1976년에 콩고가 곡물대금결제를 미루자 카길은 가차 없이 공급을 중단해 버렸다.
신약 개발, 제약 업체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의약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초국적 제약사인 로슈는 2004년도에 우리나라에서 보험약으로 등재한 후제온이라는 에이즈 약을 한 병도 우리나라에 들여와 판적이 없다.
왜 팔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우리나라가 매긴 약값으로 약을 팔면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 약을 개발하려고 들어간 돈이 엄청나니 그에 대한 ‘정당한’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정말로 로슈의 후제온은 그들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의약품은 그간의 화학적, 물리적, 생물학적 연구성과를 이용해서 만든다. 진공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신약과 유사한 화학물질들의 생리활성들이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되어 있었고, 그 의약품을 적용할 인체와 병원체에 대한 생리적 연구가 축적되어 있으며, 의약품의 용해 흡수와 관련한 물리학적 정보도 구축되어 있었다.
그 모든 기술은 인류전체의 시간과 노동의 산물이다. 이와는 별도로 이 물질의 발견과 임상실험에는 막대한 공적 자본이 투여되었다. 왜냐하면 의약품은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공익적 목적을 가진 실험에 사회적 투자가 용인되는 것이다.
특허로 생명을 옭죄는 초국적 제약회사 “비싸면, 약 사지 마”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인류전체의 노력,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만든 공적 자금을 투여 받아 만들어진 그 약은 특허라는 절차를 거치면서 그 약의 미래와 그 약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은 오롯이 특정 제약회사의 것이 된다.
그때부터는 엿장수 마음이다. 초국적 제약기업은 가난한 나라의 천연자원을 몰래 빼돌려 거기서 얻은 성분에 특허를 걸고 그 성분을 가난한 나라사람들에게 임상실험하여 돈 많은 나라에 판다. 비싸다고 아우성치면 안 팔면 그만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러한 다국적 기업들이 원료의 생산, 개발, 유통, 마케팅에 이르는 전 과정을 통합하고 있으며, 지적재산권 등의 새로운 보호막을 가지고 시장을 독점하고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약값 절감 정책 밀어붙이면 투자 철수할 수도…”)
이것이 소위 지금의 ‘자유무역’이다. 그리고 그 자유무역의 결과는 식량이든 약이든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이 원하는 곳에 그들이 원하는 가격으로 팔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관련 기사 : 무역자유화의 이득? 근거가 불투명하다)
에이즈 약 ‘후제온’을 한국에서 살 수 없는 이유?
▲ 한 시민단체 회원이 다국적 제약업체의 기자 회견장에서 “사람들이 에이즈 때문이 아닌 의약품 접근권이 없기 때문에 죽어간다”는 내용이 적힌 티셔츠를 들고 있다. ⓒ프레시안
국내에 들어와 있는 모든 에이즈 약에 내성이 생겨 사경을 헤매던 친구는 후제온이 필요했다. 로슈가 이 약을 팔지 않기 때문에 외국에서 한 달분에 200만 원을 주고 사와야만 했고, 이를 감당할 수 없어 국제원조기구(Aid for AIDS)로부터 힘겹게 약을 지원 받았다. 여전히 국제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그 친구는 지금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아직 자기네 약을 우리나라에 공급한 적이 없는 로슈는 한국정부에 가격을 인상해 달라고 신청해 놓았는데, 잘 안 되는 것 같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후제온은 계속 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는 일개 제약기업이 국민에게 필요한 제품을 판매하지 않는데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수많은 신약들도 우리는 그저 부르는 대로 돈을 줘야만 한다?
초국적 제약회사의 폭리와 건강보험 적자
그러나 단언컨대,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해보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강제실시’를 시행할 수 있고, ‘병행수입’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렇게 독점을 부여하는 특허에 대한 대안적 제도를 마련할 수도 있다. 소극적으로는 여러 형태의 패널티(벌칙)를 전횡하는 기업에 부과할 수도 있다.
(‘강제 실시’ 처분은 국가가 특정한 제품에 대해 특허를 부여하기를 거부할 권한이다. 약값이 비싼 이유는 특허권 때문인데, ‘강제 실시’ 처분이 내려지면 염가에 약을 공급할 수 있다. ‘병행수입’은 같은 약이 나라마다 다른 가격에 팔리는 경우 더 싸게 파는 국가에서 사오는 것을 가리킨다.) (☞관련 기사 : “제약 특허권은 살인 면허인가”…태국의 ‘의약품 강제실시’에 맞선 美 제약업체 횡포)
돈이 안 남아서 후제온은 한국에서 못 팔겠다는 로슈의 2007년도 전세계 매출은 약 40조 원에 달하며, 순익은 그 25%인 약 9조 4천억 원을 기록했다. 그렇게 장사해서 남은 돈이다.
반면에 그 기간 동안 국민건강보험은 747억 적자를 냈다. 언제까지 우리의 생명을 사기업들의 이윤에 저당 잡혀야 하는가. (☞관련 기사 : 가난한 환자에겐 ‘짠돌이’, 미국 회사엔 ‘큰 손’)
더불어 로슈는 환자들의 목을 죄며 ‘약을 얼마에 줄까’라는 비열한 낚시질을 그만하고 당장 약을 내놓는 게 순서다. 그것이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그렇게 높은 이윤을 누리고 있는 제약사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다.
변진옥/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