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와 가상의 치아파스: 마술적 사실주의와 좌파
(Real and Virtual Chiapas: Magic Realism and the Left)(역1)
주디스 애들러 헬먼(By Judith Adler Hellman)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0년호에서.
1994년 1월1일 봉기 전까지 치아파스는 주변부에서도 주변부에 있었다. 이 땅이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에는 아즈텍과 마야 제국 두쪽 모두의 경계지역에 있었다. 또 명목상 독립됐으나 비참하리만치 가난한 중앙 아메리카의 평범한 시골 곧 과테말라의 최북단 지방이 될지, 아니면 멕시코의 최남단 주로 편입돼 사실상 내부 식민지가 될지도 불분명했다.
Until the uprising of 1 January 1994, Chiapas stood at the periphery of the periphery. It was a land marginal to both the Aztec and the Mayan empires and, at the time of independence from Spain, unclear as to whether it would become another miserably poor, nominally independent Central American country, the northernmost province of Guatemala, or the southernmost state – and, in effect, internal colony – of Mexico.
인구가 300만명 약간 넘는 치아파스는 지금 ‘세계의 배꼽’이 되었다. 잉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서울을 쿠즈코(Cuzco)라고 불렀듯이 말이다. 이 땅은 너무나 역동적인 동시에 눈길을 끌어당기는 사건들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5만명의 이탈리아 시위대를 로마의 포폴로광장으로 뛰어나오게 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치아파스 연대단체 네트워크가 전세계를 띠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수십개의 인터넷 사이트가 알토스 데 치아파스(Altos de Chiapas)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추적하는 데 헌신하며, 5천명의 외국인이 이 땅이 펼쳐 보이는 드라마에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참여하려 이 고지대에 쫙 퍼졌다. 그리고 1998년 4월에는 45개 미국 단체 대표들이 연대네트워크를 결성하기 위해 워싱턴시에 모였다.(1) 요컨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과 연대하는 것을 정치적, 사회적 헌신의 핵심으로 삼는 열정적인 활동가들이 전세계에 널려 있다. 그들은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도전을 선언한 것으로 평가한다. 또 그들은 사파티스타를 전자 통신을 이용한 정치의 혁명적인 방법을 개척한 대표주자로 본다.
With just over three million people, Chiapas has now become the “navel of the world” – as the Incas called their capital, Cuzco. It is the setting of events so moving and compelling that they can bring 50,000 Italian protesters into Piazza del Popolo, while the networks of Chiapas solidarity groups ring the world, dozens of websites are devoted to following the ins and outs of events in the Altos de Chiapas, a reported 5,000 foreigners have fanned out over these highlands to participate in one way or another in the drama as it unfolds, and by April 1998, representatives of 45 US-based organizations convened in Washington D.C. to establish a Solidarity Network.1 In sum, in countries around the globe there are energetic activists for whom a central political and social commitment is solidarity with the Zapatista Army of National Liberation, the EZLN. They consider Subcomandante Marcos and the EZLN to have articulated the most impressive challenge to neoliberalism and they see the Zapatistas as the foremost exponents of a revolutionary way of doing politics through electronic communication.
치아파스의 드라마가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많은 멕시코 국외의 진보 인사들이 관심의 초점을 치아파스에 두게 만드는 매력은 뭘까? 초기에 마르코스의 통렬한 관찰, 자기반성적인 지혜, 날카로운 지각은 외국인들을 마법에 걸고 놀라게 했으며 수백만명의 멕시코인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때에 따라 영웅적이고, 분석적이고, 반역적이고, 재미있고, 엄숙한 마르코스의 풍모 뒤에는 사건을 아주 멀리서 볼 때 느끼는 매력이라는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피에를루이지 술로(Pierluigi Sullo), 니노 리시(Nino Lisi), 마르첼로 빌리(Marcello Vigli)가 이탈리아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Il Manifesto)의 지면을 통해 지적하고 논쟁했듯이, 치아파스와 관련한 이탈리아에서의 거대한 대중 동원, 대규모 탄원서 서명, 아크테알(Acteal)에서 벌어진 학살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 참가는 “좌파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뜻한다.”(2)
Why is the drama in Chiapas so compelling? What is the appeal that has led so many progressive people outside Mexico to make it the focus of their attention? In the early days the caustic observations, self-reflexive wit, and biting perception of Marcos held foreigners spellbound and surprised and charmed millions of Mexicans. But beyond the figure of Marcos – heroic, analytic, rebellious, amusing and solemn by turns – stands the appeal of the events as seen from a great distance. As Pierluigi Sullo, Nino Lisi, and Marcello Vigli all note and debate in the pages of the Italian daily, Il Manifesto, the vast mobilization around Chiapas in Italy, the avalanche of signatures on the petitions of protest, and the massive participation in the national demonstrations protesting the massacre at Acteal “mean something important for the left.”2
그러나 이것이 정확하게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럽과 캐나다와 미국 좌파 일부의 치아파스에 대한 강박 관념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의 맹렬한 애착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치아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이 느끼는 매력은, 마르코스의 발언이 쉽게 번역될 수 있고 모든 사건을 설명하도록 쉽사리 재구성될 수 있고 게다가 모든 개인적 및 집단적 요구에 관한 말로 재구성하기 쉽다는 점에 있나? 마이클 로위(Michael Lowy)는 “이것은 마술, 신화, 유토피아, 시, 낭만주의, 열정, 거친 희망, ‘신비주의’, 믿음이 실린 운동이다. 이는 또한 오만과 유머와 풍자, 스스로에 대한 풍자로 가득하다.”고 열정적으로 썼다. 이는 비참하리만치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의 투쟁이 전혀 다른 환경에 있는 이들에게 주는 매력의 상당 부분을 열거한 것이다. 그가 스스로 지적했듯이, “‘매력에 다시 사로잡힘’(re-enchantment)을 되살려내는 이 능력이 사파타주의(Zapatism)로 하여금 치아파스 산맥 넘어 멀리 있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는 이유의 한가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
But what, exactly, does it mean? What accounts for the European, Canadian and American left’s ferocious attachment, not to say obsession, with Chiapas? Is the appeal to those so far from Chiapas based only on the ease with which Marcos’s utterances can be interpreted and reshaped to cover every event, to speak to every personal and collective need? When Michel Lowy writes with enthusiasm, “It is a movement freighted with magic, with myths, utopias, poetry, romanticism, enthusiasms and wild hopes, with ‘mysticism’ … and with faith. It is also full of insolence, humour, irony and self-irony,” he has catalogued many of the elements of the appeal that the struggle of miserably poor, vulnerable people have for those whose circumstances are so different. As he himself notes, “This ability to reinvent the re-enchantment of the world is no doubt one of the reasons why Zapatism is so fascinating to people far beyond the mountains of Chiapas.”3
외부인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이 엄밀히 말해 환멸한 이들의 ‘매력에 다시 사로잡힘’ 추구 때문이 아니라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혁명적 변화 전망이 없는 데 낙심해 제3 세계의 혁명 대의를 받아들인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가 가진 것과 비슷한 충동일까? 국내의 투쟁에 참여하고 힘을 쏟는 대신 외부 사람들의 투쟁에 개입하는 것의 현대판인가?
If the appeal to outsiders is not strictly a search for “re-enchantment,” by the disenchanted, is it perhaps an impulse similar to that of Sartre and de Beauvoir who, disheartened by the prospects for revolutionary change in their own society, embraced the cause of revolution in the third world? Is it a contemporary case of involvement with people’s struggles elsewhere in the place of participation and personal investment in the struggle at home?
의심의 여지없이 외부인이 남부 멕시코에서 벌어지는 일에 느끼는 매력의 상당 부분은 이 사건이 명백하게 극단적이라는 데 있다. 이 사건은 권력자와 권력 없는 이들, 순수한 이와 불순한 이들, 정직한 이와 타락한 이들의 직접 대결로 보인다. 흔히 모호함(더 심하면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으로 가득찬 세계에 제기된 이런 이미지들의 세련된 단순함을 생각하면, 혼란스럽게 만드는 세부 사실에 직면하는 걸 뺀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건 놀라울 게 없다. 간단히 말하면, 많은 외국인들 사이에 현재 치아파스에서 활동하는 세력들의 지독한 복잡함을 인식하는 데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다.
Unquestionably much of the appeal to outsiders of the events in southern Mexico lies in the apparent extremity of the case. It appears as a direct confrontation between the powerless and the powerful, the pure and the impure, the honest and the corrupt. Given the elegant simplicity of these images in a world normally filled with ambiguities (or worse, postmodern relativism!),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re are progressive people around the world who would do anything to support the struggle in Chiapas except learn the confusing details. In short, there is a great resistance on the part of many abroad to acknowledge and integrate into their analysis the immense complexity of the forces at play in Chiapas today.
이 글에서 나는 상황을 단번에 너무나 폭발적으로 만들고 단호한 의지를 갖는 데 강한 걸림돌이 되는 많은 복잡함을 따져볼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사건의 단순화를 부르는 환원주의를 드러내보일 것이다. 그리고 군대와 준군사조직의 폭력과 인권 탄압을 전세계에 중계함으로써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구한 측면도 있지만,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 무대의 배우들에 대한 현저히 ‘평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는 전자 통신의 양면적인 기능을 분석할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즉각 나타나는 이 평면적인 그림은(4) ‘진짜’(real) 치아파스를 극히 일면적으로만 닮은 ‘가상’(virtual) 치아파스를 구성한다. 진짜 치아파스는 그 지역 사람들은 물론 외국 활동가들, 인권 운동가들, 사파티스타인민해방군 동조자들, 심지어 우연히 찾아간 방문객조차 이곳 남멕시코 땅에 발을 딛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In this essay I propose to examine a number of the complexities that make the situation at once so explosive and so resistant to resolution. In doing so I will identify the reductionism that produces a simplified version of events that is necessarily misleading. I will then analyse the very mixed role of electronic communication which has, on the one hand, saved countless lives by relaying information on military and paramilitary violence and human rights abuses around the world, but has also provided a remarkably “flattened” picture of the actors and events in Chiapas. This picture constitutes a kind of “virtual” Chiapas that is instantly available to us on a computer screen,4 but which bears only a very partial resemblance to the “real” Chiapas that Chiapanecans themselves or foreign activists, human rights workers, EZLN sympathizers, or even casual visitors would find on the ground in southern Mexico.
마지막으로 나는 가상 치아파스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행위가 안고 있는 정치적 위험을 강조할 것이다. 국제 반신자유주의 세력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강화시키는 이미지, 상징, 표어 묶음을 수천마일 떨어져 있는 이들이 붙잡고 있다고 무슨 해악이 있겠는가? 이렇게 물을 수 있으리라. 확실히 하건대, 이런 열정의 상당 부분은 해롭지 않다. 또 많은 해외 사파티스타 지지단체들이 자국내에서 투쟁을 벌임으로써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노력을 지원할 필요성도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진짜 치아파스에서 벌어지는 투쟁이 지닌 호소력과 근본적으로 다른 매력을 가상의 치아파스가 좌절한 좌파들에게 제시한다는 점도 보일 것이다. 진짜 치아파스에 살고 있는 진짜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가상의 치아파스를 가장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정치적 성숙함을, 그리고 모호함에 대한 더욱 강한 인내를 요구한다. 이는 현재 좌파 정치학의 심각한 문제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치아파스에 대한 뜨거운 연대가 성립하려면 명백하게 탄압받는 동질적인 인디오 집단이 필요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인디오들은 하나같이 선하고 순수하며, 다면적이지 않으며, 복잡한 개성이라고는 없고,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 관계를 지닌 성숙한 사람들이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단순화하려는 충동은 이해할만 하지만, 나는 컴퓨터 화면에 표시되는 치아파스와 땅 위의 실제 상황을 구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제시할 것이다.
Finally, I will highlight the political perils of intense involvement with a virtual Chiapas. What harm, we might ask, is done if people thousands of miles away seize upon a set of images, symbols, and slogans that consolidate their sense that they form part of an international force that confronts neoliberalism? To be sure, there is no harm in much of this enthusiasm and, indeed, many foreign Zapatista solidarity groups are explicit on the need to support the effort in Chiapas by pursuing struggles closer to home. However, I will show that virtual Chiapas holds a seductive attraction for disenchanted and discouraged people on the left that is fundamentally different than the appeal of the struggles underway in the real Chiapas. Solidarity with the real people who inhabit the real Chiapas requires far greater political maturity and tolerance for ambiguity than the most passionately dedicated support for virtual Chiapas. It reflects a severe problem in the contemporary left’s politics that energetic solidarity for Chiapas often seems to require unambiguously downtrodden indios who are homogeneously good and pure, not multi-faceted, fully developed people with varied and divisive interests, not to mention complex individual personalities. Understandable as the urge to simplify may be, I will show that it is politically important to distinguish between the Chiapas on our computer screens and the actual situation on the ground.
동의하는 지점들 (Points of Agreement)
물론 몇가지 측면은 논란의 여지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 예를 들어, 사파티스타 봉기의 배경에 대한 믿을 만한 설명들은, 국민 대다수가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사는 천연자원이 특히 풍부한 땅이라는 역설과 비극적 불균형을 당연히 강조한다.(5) 이 멕시코의 내부 식민지에서 적당한 피난처도, 적합한 음식도, 마실 물도, 전기도 없는 사람들이 목재, 옥수수, 콩, 가스, 기름, 수력발전을 멕시코 다른 지역에 ‘수출하고 있다.’
There are, or course, some aspects of the case about which there is little or no controversy. For example, all reliable accounts of the background to the Zapatista uprising necessarily emphasize the ironic and tragic disparity of a land exceptionally rich in resources populated by the poorest people in what is still a country comprised, in the majority, of poor people.5 In this internal colony, a population that is substantially without proper shelter, adequate food, drinking water, or electricity, “exports” timber, corn, beans, gas, oil, and hydroelectric power to the rest of Mexico.
치아파스 봉기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분석에서 또 다른 공통점은, 멕시코시티의 중앙 정부가 수세기 동안 소홀히 다루던 이 지역에서 최근 몇십년 사이에 많은 정부 지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급격한 경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루이스 에체베리아(Luis Echeverría) 대통령(1970-1976)의 인민주의적 프로그램은 치아파스에서 정부의 입김을 크게 강화시켰고 공화국의 변두리였던 이 곳의 공공예산 지출이 10배나 늘게 했다. 아주 짧은 기간에 실시된 야심찬 사업으로 치아파스의 정치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뒤바뀌었다. 이 사업은 도로와 댐 건설, 석유 사업, 상업용 커피 경작, 축산과 낙농업에 투자하는 동시에, 멕시코 다른 지역과 치아파스주 내부 다른 지역의 땅 없는 농민들을 라칸돈(Lacandon) 밀림으로 이주시키는 ‘식민화’ 계획이다. 이런 정부 정책은 마침 중남미 전쟁 및 그 전쟁으로 생긴 대규모 난민 때문에 남부 멕시코 전체의 고용구조가 바뀌던 바로 그 때 치아파스 주민들을 세계 경제 구조 속에 몰아 넣었다.
Common as well to all serious analyses of the causes of the upheaval in Chiapas is a focus on the recent decades of rapid economic change stimulated by a mass of state-sponsored programs that followed centuries of neglect by the central government in Mexico City. The populist program of President Luis Echeverría (1970-1976) required a vastly expanded state presence in Chiapas and precipitated a tenfold increase in public spending in this previously marginal corner of the Republic. Within a very brief period, both the political economy and social structure of Chiapas were transformed by ambitious projects: investments in roads, dams, petroleum extraction, cultivation and commercialization of coffee, development of cattle and milk industries, and “colonization” schemes to move landless peasants from other parts of Mexico and other regions of the state of Chiapas into the Lancandon rainforest. These state policies pushed Chiapanecans into the world economy, even as the wars in Central America and the refugee flows they produced, altered the structure of employment throughout southern Mexico.
당연히, 이 변화는 여러 원주민 부족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일부는 더욱 가난해졌고, 다른 부족은 생계용이 아닌 (상업용) 농업, 교통, 건설, 기름, 목축, 낙농업 분야에서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경제, 사회적 변화가 유발한 불안정은 곧이은 석유 호황의 붕괴로 더 커졌다. 그런데 석유 호황은 (치아파스) 중심부 고원지대의 많은 원주민들을 멕시코만 해안지역의 임금 노동으로 끌어들인 요인으로 작용했다.(6) 80년대 내내, 석유 호황과 불황이 유발한 사회적 긴장은 연이은 정치, 경제적 충격으로 더욱 깊어졌다. 1982년 외채 위기가 들이닥치고, 이어 커피값이 폭락했으며, 마지막으로 카를로스 살리나스(Carlos Salinas) (1988~1994)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어진 것이다. 이 정책은 치아파스 주민들에게는 주로 옥수수 및 기초 농산물 생산자에 대한 가격 지원의 폐지와 헌법 27조 수정이라는 형태로 영향을 끼쳤다. 헌법 27조 수정은 멕시코 농촌의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핵심이던 땅 분배 프로그램을 북미자유무역지대 참여에 따른 양허 차원에서 중단하는 내용이다.(역2)
Naturally, these transformations touched different groups of indigenous people in different ways, further impoverishing some, while opening to others alternatives to subsistence farming and new sources of income in transport, construction, oil, cattle and dairy production. And soon the disequilibrium produced by these economic and social changes was intensified by the crash of the oil boom that had drawn so many indigenous people from the central highlands into wage labour on the gulf coast.6 Over the next decade, the social tensions produced by the oil boom and bust were deepened by a series of political and economic shocks: the debt crisis of 1982, the fall of coffee prices, and, finally, the neoliberal program of President Carlos Salinas (1988-1994) which, for Chiapanecos, principally involved the elimination of price supports to corn and basic grain producers and the alteration of Article 27 of the Constitution, a concession to Mexico’s NAFTA partners that spelled the end of the land distribution program that had been the key element in maintaining social peace in the Mexican countryside.
그래서 치아파스 무력 충돌의 간접 원인과 직접 원인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 틀은 이런 연속적인 변화에 중심을 두게 된다. 가장 유용한 분석들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급속한 침투와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뒤이은 개입 철회를 원주민에 대한 인종적 탄압이라는 배경에 비춰 판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인종적 탄압은 스페인 정복 때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줄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또 이런 분석들은, 역사적으로 치아파스 지주들의 과두정치가 인종차별적 담론 주도와 주도(州都)인 툭스틀라 구티에레스(Tuxtla Gutiérrez)에 있는 제도혁명당(PRI) 지구당 장악이라는 두가지 통제 수단을 경제, 사회, 정치적 지배의 강화에 이용한 것도 강조한다. 이런 조건에서 중앙 정부의 개입은 치아파스 과두정치의 주도권에 도전했지만, 통제력의 밑바탕을 허무는 데까지 가지는 않았다. 반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경제적 변화가 만들어낸 사회 격변은 원주민과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 혼혈) 농민의 전투성과 자각을 재촉했다. 사건에 대한 거의 모든 설명이, 1994년 사파티스타 봉기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의식의 각성이다.
Thus, the framework for understanding the remote and immediate causes of the outbreak of armed conflict in Chiapas centres on this series of changes. The most useful analyses inevitably set this rapid penetration of capitalist relations and the hyper-involvement and subsequent withdrawal of the state against a background of racist oppression of the indigenous population that began with the Spanish Conquest and continues in most respects unabated to the present day. Moreover, such analyses emphasize the way that the landed oligarchy of Chiapas historically utilized both a racist discourse and control of the PRI, that is, the Institutional Revolutionary Party’s apparatus in Tuxtla Gutiérrez, the state capital, to reinforce its economic, social, and political domination. Under the circumstances, the intervention of the federal government challenged the hegemony, but ultimately did not undermine the control, of the Chiapanecan oligarches, while the social upheavals created by the economic transformations of the 1970s and 1980s stimulated a new militancy and consciousness among both indigenous and mestizo peasants. In virtually all accounts of the events, it is this heightened consciousness that provides the precondition for the Zapatista uprising in 1994.
투쟁성은 두가지 형태를 통해 표현됐다. 첫째 형태는 사무엘 루이스(Samuel Ruíz)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교구의 현지 활동에서 자라났다.(7) 가톨릭 활동은 1960년대에 전도사들을 훈련시켜 고지대에 파견한 뒤, 성경을 원주민어로 번역하고 그들의 말로 설교하며, 자신들의 억압에 대해 발언하도록 유도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8) 이 풀뿌리 활동은 1974년에 첫번째 원주민의회를 성사시켰는데, 원주민의회에는 300여 지역사회에서 1250명의 인디언 대표들이 모였다. 이 의회를 처음엔 멕시코 정부가 후원했다. 하지만 사무엘 루이스 주교와 전도사들은 의회를 장악해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내는 통로로 활용했다. 해방신학의 새로운 개념을 전하면서, 지역사회가 스스로 대표를 뽑고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말로 개념화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콜리어(Collier)가 지적했듯이, 의회는 “밑으로부터의 조직화 모델을 제시했고 독자적인 농민 단체들이 이 모델에 의지하게 됐다.” 의회는 또 사파티스타의 논의보다 정확하게 20년 앞서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9)
This militancy found two forms of expression. The first grew out of the outreach activities of the Catholic diocese under the leadership of Bishop Samuel Ruíz.7 Their activities began in the 1960s with the training of catechists who fanned out across the highlands, presenting the Bible and sermons translated into indigenous languages and urging the people to talk about their oppression and to consider their rights.8 These grassroots efforts culminated in 1974 in the First Indigenous Congress which brought together 1,250 Indian delegates from more than 300 communities. Informed by the new concepts of liberation theology, the Congress was sponsored by the Mexican state, but appropriated by Bishop Samuel Ruíz and the catechists as a means to give voice to indigenous communities, encouraging them to select their own delegates and conceptualize their problems in their own words. As Collier notes, the Congress “provided a model of bottom-up organizing upon which independent peasant organizations subsequently drew,” and offered the opportunity to give expression to the grievances of indigenous Chiapanecans in terms that precisely prefigured the discourse of the Zapatistas twenty years later.9
두번째 유형의 전투성은 종종 급진적인 전국 조직과 연계된 농민 조합의 형태를 띠었다. 1968년 10월 철저한 탄압에 직면했던 도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중심이 돼 새로운 좌파세력을 구성했다. 이 조직은, 장기적 관점에서 대중적인 농민운동과 도시빈민운동을 조직하는 고된 작업이 멕시코시티를 장악한 정치 지배층의 주도권에 도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신념을 반영한다. 첫번째 원주민의회가 민족적, 언어적 경계를 넘어 연대하고 자신들의 불만을 파악해 명백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뚜렷이 보여준 직후, 이런 조직 형태가 치아파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10)
The second type of militancy took the form of peasant unions, often tied to radical national organizations. Organized in many cases by veterans of the urban student movement that had been savagely repressed in October 1968, these new formations of the left reflected the belief of so many former student activists that only through the long-term, painstaking development of mass movements of the poor in the countryside and in urban shantytowns would it be possible to challenge the hegemony of the political elite entrenched in Mexico City. These organizations appeared in Chiapas shortly after the First Indigenous Congress demonstrated so clearly the capacity of indigenous people to come together across ethnic and linguistic lines and to grasp and articulate their own grievances.10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이런 조직적 시도의 역사는 놀랄 것 없이 연대와 분열의 역사이다. 마오주의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독자적인 농민운동가, 가톨릭 선교사와 전도사, 복음주의 개신교도간의 협력 이야기이면서 경쟁 이야기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항 농민조직 지원을 통해 조직 파괴를 꾀한 멕시코 정부에 맞서는 가운데 이뤄졌다.(11) 사파티스타운동은 명백히 이런 조직들의 활동이 자연적으로 성장, 발전한 것이다. 이 사실은, 선구자들이 원주민 지도자를 세우고 밑에서부터 조직을 구성하도록 이끄는 걸 기본 원칙으로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파티스타는, 과거 수많은 조직들이 결국 선택한 체제 타협에 대한 반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다.
The history of this organizational effort in the 1970s and 1980s is – not surprisingly – a history of alliances and schisms. It is a tale of collaboration and cooperation, but also of rivalry between and among maoists, communists, trotskyists, independent agraristas, Catholic missionaries and catechists, and Evangelical Protestants – all set against the cooptive efforts of the Mexican state to sponsor its own competing peasant organizations.11 The Zapatista movement is clearly an outgrowth of the activities of these predecessor organizations. It reflects the commitment of these precursors to the basic principle of stimulating indigenous leadership and organization from below. However, zapatismo also represents a reaction against the compromises with the system in which so many of these organizations eventually became involved.
그래서 사파티스타 운동의 기원을 종교적 조직화 시도와 세속적 조직화 시도, 이 두가지에서 찾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사파타주의의 성격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이(12) 한가지 명백하게 공감하는 게 또 있다. 그 공감대란, 지지 기반 형성 방식의 차별성에 대한 것이다. 사파티스타는 10년 이상 동안 치아파스 고지대의 다양한 종족들로부터 넓고 강력한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일단 혁명적 운동을 일으킨 뒤 주변에서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려 하는 전통적인 게릴라 거점 방식과 달리, 사파티스타는 활동 영역 전체에 걸쳐 수천여 마을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이런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조직운동가들은 오랜 전통의 멕시코 민족주의 원칙에 의지했다. 또 “수십년 동안 집권당의 전유물이었던 멕시코 혁명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13) 전통 깊은 급진적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이들은 치아파스의 가장 억압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멕시코 전체의 박해받는 사람들을 겨냥한 담론을 개척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전세계의 활동가와 지지자들을 소집함으로써,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제적 대중의 비판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대변했다.(14)
Thus there is little disagreement about the origins of the Zapatista movement in these two earlier organizational efforts, religious and secular. Moreover, for all the different interpretations regarding the nature of zapatismo,12 there is a clear consensus that a distinguishing characteristic of the movement is the way in which, over a period of more than a decade, it slowly constructed a wide and solid base of support among an assortment of ethnic groups in the highlands of Chiapas. Unlike the classic guerrilla foco that hopes to attract a following after revolutionary activity has been launched, the Zapatistas were firmly supported by thousands of adherents in villages throughout their zone of operations. To build this base, the EZLN organizers drew upon longstanding principles of Mexican nationalism and they “breathed new life into a revolutionary history of Mexico which, for decades had been appropriated by the ruling party.”13 Drawing on these traditional radical themes, they developed a discourse that spoke not only to the most downtrodden people in Chiapas, but to disadvantaged Mexicans throughout the republic. Eventually, in 1995, with the convocation of activists and supporters from around the globe, the Zapatistas came consciously to represent and to articulate internationally popular critiques of neoliberalism.14
멕시코 정부로부터 모순적인 대응들을 유발한 것 또한 이 봉기를 규정하는 특징이라는 게 명백하다. 치아파스의 경제, 정치 엘리트들은 정부로부터 이 운동을 깰 확실한 대응책을 끌어내려고 힘을 합쳐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살리나스나 그의 후계자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는 화해정책을 택하지도, 그렇다고 억압정책을 선택하지도 못했다. 또 협상을 하지도, 군사행동을 취하지도 못했다. 대신 상황에 따라 그 때 그 때 가능한 대응책을 추구했다. 일관된 정책이 없다는 것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전례 없는 환경과 관련이 있다. 멕시코 정부로서는 이 사건을 국내 문제 또는 지역 문제로 규정하길 원했지만, 기술 덕분에 전세계 사람들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국제적 여론을 형성하며, 사건을 평가할 수 있었다. 전자 통신의 혁명과 마르코스의 예외적이리만치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술은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냈으며, 이 연대는 운동의 지속과 운동가 각 개인의 생명 유지에 기여했다.(15)
It is similarly clear that a defining characteristic of the uprising has been the ambivalent response it has elicited from the Mexican state. While the Chiapanecan economic and political elites rallied quickly to pressure for some definitive action to dismantle the movement, neither Salinas nor his successor, Ernesto Zedillo, has managed to settle upon a policy of accommodation or repression, of negotiation or military action, but rather both have pursued all of these possible responses at different times. This lack of a consistent policy is, in turn, tied to the unprecedented circumstances created by the technology that allows people around the globe to follow events as they unfold and to weigh in as a force of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concerning an event that the Mexican state would prefer to define as a national or local affair. The revolution in electronic communication and the exceptionally effective communication skills of Marcos have fostered an international solidarity that has, in turn, promoted both the survival of the movement and the personal survival of its members.15
복잡함(The complexities)
그래서 반란을 촉발하고 멕시코 정부의 심히 모순된 대응을 부른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 또는 사파티스타가 직접 분쟁지역을 넘어 다른 멕시코인과 세계의 동조자들을 자신들의 더 넓은 운동에 결합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에 대한 분석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국제적 지지 세력을 동원한 부분으로 넘어가면, 흔히 알려진 치아파스 상황은 복잡한 현실을 아주 단순화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그림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잘못된 쪽으로 유도한다. 치아파스의 투쟁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계속 펼쳐지는 사건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힘든 처지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아래 제시하겠지만,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투쟁을 지원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Thus we find very little disagreement among analysts about the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conditions that gave rise to the rebellion, the largely incoherent response of the Mexican state, or the success of the Zapatistas in reaching beyond the immediate zone of conflict to incorporate other Mexicans and sympathizers from around the world into their broader movement. However, when we turn to the accounts available to this mobilized international community of supporters, we find that what is generally communicated about the situation in Chiapas is a highly simplified version of a complex reality. While this picture is not intentionally distorted, it is ultimately misleading in ways that leave those who sympathise with and support the struggle in Chiapas in a very weak position to understand and analyse the events as they unfold. At times, as I will show below, it even makes it difficult to support the struggle in meaningful ways.
치아파스의 복잡한 상황 가운데 정치적으로 중요하지만 외부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빠졌거나 무시된 것으론 어떤 것들이 있을까?
What are some of the politically important complexities of the Chiapanecan situation that have been lost or ignored in transmission to outsiders?
땅 보유(Land tenure)
치아파스의 원주민과 빈농들의 복지를 염려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 지역 땅의 56%가 개인 소유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주 반복되는 이 통계는 오해를 유발하는데, 왜냐하면 개인 소유 땅이 몇몇 대지주들에게 집중된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인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대농장을 징발해 땅을 요구하는 농민들에게 줄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토지개혁법에 따른 임대용 ‘집단 농지(에히도, ejido)’(역3)로 개인 소유 땅을 활용할 수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16)
Almost everyone concerned for the welfare of indigenous people and poor peasants in Chiapas has learned that 56 percent of the land is in private hands. This oft-repeated statistic is misleading because it usually presented in a way that suggests that the private holdings are all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 few large landlords. The corollary to this supposition is that these estates could be available for distribution to the landless in “ejidos” under the agrarian reform law if the political will existed to move forward with expropriation of large haciendas and the distribution of land to petitioning peasants.16
불행하게도, 이 농민운동적 희망 사항은 동 치아파스 곧 사파티스타의 근거지인 로스 알토스(Los Altos)와 라칸돈 셀바(Lacandon Selva)의 분쟁지역에서 실현될 수 없다. 이 지역에는 ‘분배할 수 있는’ 땅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17) 동 치아파스에는 기존 대토지 소유자(latifundios)와 신 대토지 소유자(neolatifundios)가 지난 30년 동안 거의 사라졌다.(18) 일정한 땅은 초기 토지개혁 및 분배 과정에서 나뉘어져서 집단 농지 임대 형태로 분배됐다. 또 1980년대에 연방정부는 159개 농민 정착지에 분배하기 위해 사유지 8만 헥타르를 사들였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 수력발전소 건설에 따른 서 치아파스 주민의 동 치아파스 이주,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다른 14개 주와 연방 직할 지역에서 온 땅 없는 농민들의 정착, (국제 환경운동 단체와 라칸돈 마야(역4) 보호운동가들의 압력에 따른) 생태보전지 지정 등으로 해서, 이 지역 땅 상당 부분은 조각조각 나뉘어서 분배됐다. 그래서 이 지역 대지주들은 땅 강제수용에 저항하느니 자신들의 땅 일부를 주변 농민들에게 팔아넘기는 게 낫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됐다.(19)
Unfortunately, this agrarista dream cannot come true in the conflict zone in Eastern Chiapas, that is, Los Altos and the Lancandon Selva where the Zapatista movement is based. In this region there is almost no “distributable” land left in large haciendas.17 In eastern Chiapas, the latifundios and even neolatifundios,18 substantially disappeared in the course of the last three decades. Some land was given as ejido parcels in earlier agrarian reform distributions and in the 1980s, the federal government purchased 80,000 hectares of private land for distribution to 159 peasant settlements. Thus, with the relocation to eastern Chiapas of western Chiapanecans displaced by the construction of the hydroelectric dams from the 1950s onward, the settlement of landless peasants from fourteen other Mexican states and the Federal District in the 1970s and 1980s, and the land set aside for bioreserves (under pressure from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al community and supporters of the Lancandon Maya), so much of the land in the region had been given away in small parcels that the latifundistas in the zone found it safer to sell off portions of their land to neighbouring peasants in small lots than to resist the tide of land invasions and expropriations.19
치아파스 전역에 걸쳐 토지 자원에 비해 사람이 월등히 많은 데서 비롯된 압력으로, 전체 토지의 56%라는 압도적인 비율의 개인 소유 땅은 사실 5헥타르 이하의 소규모 농장들이다. 이 지역의 집단 농지 할당 최소 규모는 20헥타르이다.(20)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외부인으로선 땅 없는 농민들과 지주가 맞서는 농촌 계급투쟁 양상의 전통적인 농민 싸움이 벌어지는 땅으로 보기 십상인 치아파스에서, 땅을 둘러싼 ‘싸움’이 실제로 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슬프게도 이 싸움이 보통은 ‘가난한 이들간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충분치 못한 땅뙈기를 넓히려 애쓰는 국유지 임차 농민들 또는 땅을 물려받을 수 없는 국유지 이용자의 자녀들은 주변의 소지주들과 분쟁을 벌이고 있다. 소지주들은 그들대로 불쌍하리만치 작고 질도 떨어지는 생계용 땅을 지키려 맞서고 있다.
Given the enormous pressure of population on land resources throughout Chiapas, the vast preponderance of the 56 percent of all land that is privately held in fact consists of minifundios of 5 hectares or less in a region where the smallest ejido plot is set at 20 hectares.20 Thus, where some outsiders are apt to see a traditional lucha agrarista taking shape in which they imagine that landless peasants would be pitted against landlords in rural class struggle, in reality, the “luchas” over land in Chiapas are no less bitter but, sadly, they most often constitute a “war of the poor.” In these events, ejidatarios who are trying to expand their inadequate parcels, or younger sons and daughters of ejidatarios who cannot inherit the family holdings are locked in conflict with neighbouring minifundistas who are fighting to hold onto their pathetically small and poor subsistence plots.
종교(Religion)
대부분의 인터넷 이용자들이 익숙한 가상의 치아파스에는 종교적 행위자들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우리가 컴퓨터 화면에서 만나는 종교적 행위자들은 사무엘 루이스 주교, 그의 교구, 산바르톨로메 인권센터(San Bartolomé Centre for Human Rights)의 가톨릭 인권 운동가들이다. 아마 미국에 근거지를 둔 평화를 위한 목자들(Pastors for Peace)로 대표되는 몇몇 개신교도들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In the virtual Chiapas with which most internet users are familiar, religious actors have a crucial role to play. The religious actors we encounter on the computer screen are Bishop Samuel Ruíz, the Diocese, the Catholic human rights activists of the San Bartolomé Centre for Human Rights, and perhaps a few Protestants in the form of the U.S.-based Pastors for Peace.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사건에서 종교가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 현실의 그림은 화면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가슴과 정신, 무엇보다 영혼을 사로잡기 위한 가톨릭과 다른 종교의 경쟁은 지난 50년 동안 치아파스에서 벌어진 모든 일의 핵심 원동력이었다. 사무엘 주교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에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활동가로 변신한 것은, 1960년대말에 농민들 사이에서 복음주의적 개신교가 퍼지는 것을 제지하기 위해선 가톨릭교회가 밑바닥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21)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 특히 중앙 아메리카에서 그렇듯이, 가난한 이들의 관심과 애정과 지지를 끌어 내기 위한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간의 치열한 경쟁이 치아파스에도 있다. 그런데 전도사들의 용기와 진실된 노력, 사무엘 주교의 지도력과 헌신이 있었음에도, 오늘날 치아파스 인구의 51%만이 가톨릭교도다. 이는 멕시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다.(22)
While religion does play a central role in the events unfolding in Chiapas today, the picture on the ground is far more complex than the version on the screen. To begin with, competition for hearts and minds and above all souls, between Catholic and other religious groups has been a key motivating force in all that has unfolded in Chiapas over the last forty years. The transformation of Bishop Samuel, himself, from a traditional conservative into a socially engaged activist was prompted in the late 1960s by his perception of the need for the Catholic Church become involved at the grass roots in order to check the advance of evangelical Protestants among the peasants.21 As everywhere Latin America and particularly in Central America, a ferocious competition exists in Chiapas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 evangelical missionaries for the attention, affection and adherence of the poor. But for all the courage and sincere efforts of the catechists, and the charisma and dedication of Bishop Samuel, today only 51 percent of all Chiapanecans are Catholic, a figure that represents the lowest proportion in any Mexican state.22
치아파스의 억압받는 이들이 정치적 선택의 자유는 결코 얻어본 적 없지만 종교적 선택의 자유는 점점 더 크게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에서 보수까지 수많은 종류의 개신교가 개종자들을 끌어들였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세력이 크면서도 가장 오래 됐고, 그 뒤를 오순절교(하느님의 총회, 카리스마틱스, 엘림, 유니서),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이 따르고 있다. 또 비록 숫자는 적지만, 침례교, 루터교, 나자레스교회, 예수교회 또는 예수의 추종자들, 하느님의 교회, 세상의 빛, 평화의 왕자, 진정한 그리스도교회, 중앙아메리카교회 등도 있다.(23) 가장 최근에는 이슬람교와 모르몬교 선교사들이 개종자들을 모으고 있으며,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 쫓겨난 개신교도의 새 정착 지역에서는 곧 이슬람이 숫자면에서 주요한 종교집단이 될 것이다.(24) 그래서 치아파스의 종교 지도는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분파와 신흥 분파의 조각을 이어붙여 놓은 형상이다. 게다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런 종교적 성향이 정치적 정체성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여당인 제도혁명당(PRI) 또는 중도우파의 야당인 민주혁명당(PRD)과 일치하거나 상반되는 것이다.
We might almost say that the downtrodden in Chiapas have never been free to make political choices, but increasingly they have felt free to make religious choices. And a great assortment of Protestants, some progressive and some conservative, have attracted converts. Of the Protestant churches, the Presbyterians are the largest and longest established, followed by Pentecostalists (Assembly of God, Charismatics, Elim and Eunecer), Seventh Day Adventists, Sabbaticants, and Jehovah’s Witnesses. On the scene as well, but in smaller numbers, are Baptists, Lutherans, Church of Nazarene, the Christian Church or Followers of Christ, Church of God, Light of the World, Prince of Peace, the True Church of Christ, and the Central American Church among others.23 Most recently Islamic and Mormon missionaries have drawn converts and, in a couple of new settlements composed of Protestants who were expelled from predominantly Catholic communities, Islam will soon become the numerically dominant religious group.24 Thus the religious map of Chiapas resembles a crazy-quilt of different religious sects, some historically well rooted and others, brand new. And to complicate matters further, these religious affiliations sometimes coincide with and sometimes cut across political identifications with either the official party, that is, the PRI, or the centre-left party of opposition, PRD (Democratic Revolutionary Party).
그래서 치아파스에 대한 가상공간의 설명에서는 마르코스 이외의 인물 가운데서 사무엘 주교가 주인공으로 나타나고,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그를 아주 높게 평가하지만, 현장에서 사무엘 주교는 주요 종교 행위자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행위자들을 간과한다면, 인종 정치학을 가로지르는 저강도 종교 분쟁이라고들 평가하는 사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Thus while Bishop Samuel appears to be – other than Marcos himself – the central protagonist in the virtual accounts of Chiapas, and looms as a towering figure in the versions of events that circulate in France, Italy and Spain, he is not the only important religious actor on the stage. To ignore the other actors is to fail to recognize what many consider to be a low-intensity religious conflict that cross cuts ethnic politics.
정치적 행위자들(The Political Actors)
종교적 행위자들이 컴퓨터 화면에서 흔히 본 그림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것으로 드러난 것처럼, 치아파스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의 정치적 행위자들도 훨씬 더 복잡하다. 가상의 치아파스가 선한 쪽과 악한 쪽의 분명한 범주로 나뉘지만, 훨씬 더 복잡한 이 땅의 현실은 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심지어는 정의하거나 분류하기도 힘든 몇몇 그룹까지 등장한다.
Just as religious players turn out to be more numerous and varied than in the picture we usually see on the computer screen, the panoply of political actors in the drama unfolding in Chiapas is also considerably more complex. While virtual Chiapas is characterized by quite clear categories of good and evil, the more complex reality on the ground features a much larger cast of characters and even some groups that can be more difficult to define and sort out.
가상 치아파스에서 나쁜 놈들은 세디요 정권,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 본인, 내무장관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Francisco Labastida), 내부장관의 공식 협상대표 에밀리오 라바사(Emilio Rabasa) (그는 치아파스의 명문 출신이다), 제도혁명당 (아마도 이른바 ‘공룡’과 ‘개혁주의자’로 다시 분리됨.), 멕시코 정부, 멕시코군, 여기에 미국의 반군진압부대 또는 적어도 반군진압세력으로 은밀하게 행동하는 미국 마약단속국이다. 좋은 편은 사파티스타, 원주민, 일반적으로 농민이라고 불리는 좀더 폭넓은 범주, 여기에 비정부기구 지원자들, 사무엘 주교와 그의 교구다.
In virtual Chiapas, the bad guys are the Zedillo regime, President Ernesto Zedillo himself, his Minister of the Interior, Francisco Labastida, his official negotiator, Emilio Rabasa, (scion of an elite Chiapanecan family), the PRI (perhaps disarticulated into branches: that is, “dinosaurs” and “reformists”), the Mexican state, the Mexican armed forces, and the U.S. military counter-insurgency forces, or at least the Drug Enforcement Agency, acting in clandestine fashion as a counter-insurgency force. The good guys are understood to be the Zapatistas, indigenous people, a broader category generally referred to as peasants, plus their NGO supporters, and Bishop Samuel and the Diocese.
물론 실제로는 더 많은 행위자들이 있고 쟁점이 되는 이해관계도 더 많다. 더 완벽한 상황 분석을 하려면 치아파스 주 정부의 이해 관계를 멕시코 정부의 이익과 구별해야 하고, 국가 차원의 전략적 에너지 문제를 치아파스 지역의 경제 및 정치 권력들과 구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치아파스의 제도혁명당과 민주혁명당 지구당도 각각 중앙당과 상당히 관심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원주민들의 인종적 차이 외에도 (이 점은 초칠(Tzotzil), 첼탈(Tzeltal), 촐(Chol), 토홀라발(Tojolabal)의 다인종 혼재 현상이 사파티스타 집단의 중요한 특징이 됐기 때문에 사건의 인터넷 판에도 반영됐다), 우리는 땅 임차기간의 중요한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이 차이는 위에서 거론한 국유지 임차 경작자, 소지주, 땅 없는 이들간의 분쟁 과정에서 빈농 내부의 이해 차이를 유발한다. 게다가 이따금 외부의 주목을 받는 게 고작이지만 핵심 집단이 하나 있는데, 스스로를 “내어쫓긴 이들의 군대”(army of the displaced)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고지대에서 빠져 나와 해변의 타파출라(Tapachula)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흩어진 피난민으로 사파티스타를 지지하지 않는 원주민이다. 이들은 분쟁지역에서 탈출한 치아파스 사람들인데, 대부분은 1993년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동참 요구를 받았을 때 무기를 들지 않는 쪽을 선택한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쫓겨났거나 십자 포화에 갇힐 것을 걱정해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1만명을 훨씬 넘는 이 내어쫓긴 이들은, 멕시코 군대 또는 멕시코 정부가 원주민들로 구성한 준군사조직의 폭력에 희생될 때면 인터넷 통신에서 중심사가 된다. 그러나 이들 난민의 상당수가 사파타주의를 거부한다는 사실은 인터넷의 설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In reality, of course, there are more players and many different interests at stake. A more complete analysis of the situation requires us to consider the interests of the Chiapanecan State as distinct from the Mexican State and national strategic energy interests as distinquished from regional economic and political power holders within Chiapas. For that matter, we should think of both the PRI and the PRD in Chiapas as having concerns that are far from identical with their national affiliates. In addition to ethnic distinctions among indigenous people – an aspect of the situation that does find its way into the electronic version of events since the pluri-ethnic presence of Tzotzil, Tzeltal, Chol, and Tojolabal it is such a prominent feature of all Zapatista gatherings – we need to factor in important differences in land tenure that create different interests among poor cultivators as in the conflicts among ejidatarios, minifundistas and the landless that were discussed above. Moreover, a key group of people who receive only sporadic attention abroad are those referred to in Chiapas itself as the “army of the displaced,” that is, indigenous people who are not Zapatista supporters who have been dispersed as refugees from the highlands to as far away as Tapachula on the coast. These desplazados are Chiapanecans from the conflict zone who, in many cases, voted not to take up arms when consulted by the EZLN in late 1993, and who were subsequently expelled from their communities or chose to leave the region for fear of getting caught in the cross fire. Now numbering well over ten thousand, the desplazados take centre stage in internet communications when they become victims of violence at the hands of the Mexican army or the paramilitary troops comprised of indigenous men armed by the Mexican state. But the fact that many of the refugees from the conflict zone also reject zapatismo does not figure prominently in the internet accounts.
인터넷은 비정부기구를 언제나 ‘시민 사회’라고 표현한다. 또 실로 많은 전자적 의사소통이 어떤 지점에서는 비정부기구에 의해 걸러진다. 하지만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750개 이상의 멕시코 국내 또는 국제 비정부기구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담기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25) 대개 비정부기구들은 우리의 컴퓨터 화면에 서로 차이가 없는 진보적인 외국인과 멕시코인 무리로만 나타난다. 치아파스 분쟁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다소간 협력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지지하며 이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진실을 전하는 이들로만 표현된다. 사건의 인터넷판이 치아파스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비정부기구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이지 않지만, 실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같은 태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다. 컴퓨터 화면에서만 치아파스에 관여하는 이들이 실제로 비정부기구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멕시코로 간 이들을 비판하기를 꺼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치아파스에서 일하는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이나 기타 활동가들은 그리 과묵하지 않다.
The internet does make constant generic reference t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as “civil society” and, indeed, a great deal of electronic communication is, at some point, filtered through NGOs. However the term, civil society, does not seem adequate to capture the variety and diversity of organizations on the ground where, in fact, more than 750 Mexican and international NGOs are operating.25 For the most part, the NGOs appear on our screens as an undifferentiated mass of progressive foreigners and Mexicans who work more or less in concert to alleviate the pain of the conflict in Chiapas, to stand by the oppressed, and to transmit the truth about what is unfolding in this distant and isolated place. While the internet version of events is largely uncritical of both foreign and Mexican NGOs in operating in Chiapas, this attitude is not always shared by the people on the scene. Although those who principally relate to Chiapas on their computers are understandably reluctant to criticize anyone who has actually taken off for Mexico to participate in NGO activities there, NGO activists and others at work in Chiapas are not so reticent.
1998년에 내가 다양한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것으로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음이 나타난다. 그 결과 이들은 함께 일하지도 않는다. 멕시코 비정부기구 소속의 많은 이들은 정부의 ‘합리화’ 과정에서 축소된 정부기구에서 일하던 이들이다. 게다가 몇몇은 비정부기구 활동을 하면서도 과거 정부에서 일할 때 가난한 이들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래서 다른 비정부기구 활동가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깊은 철학적 차이는 물론이고 한정된 국제 기부금을 받기 위한 경쟁과 줄다리기가, 비정부기구 활동가들 내부 관계 및 다른 기구 활동가와의 관계를 악화시킨다. 예를 들어, 사무엘 주교와 그의 교구는(외부의 진보적인 이들, 특히 진보적인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이들의 용기는 폭넓게 존경받고 있는데) 치아파스에서 여성 문제를 위해 일하는 비정부기구 여성들로부턴 아주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여성 활동가들은 사무엘 주교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용기 있는 정치적 태도의 아이러니한 유사점을 지적한다. 이 태도가 아이러니한 것은, 두 지도자의 피임과 낙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관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Interviews I conducted in 1998 among a wide range of NGO workers indicated that a great many of these people do not like, trust, or respect one another and, as a consequence, are not able to collaborate. Many of the Mexican NGO people are former government employees who were downsized when the State was “streamlined,” and some of them have brought to their NGO work the attitudes that informed their relations with poor people when they were part of the state – a tendency for which they are roundly criticized by other NGO workers. Competition for international attention among a very limited universe of donors, turf wars, as well as profound philosophical differences plague the relations between and among NGO workers. For example, Bishop Samuel and the Diocese — so widely admired abroad for their courage by progressive people in general and progressive Catholics in particular — evoke a very different response among NGO women working in Chiapas on women’s problems. Many such activists note an ironic similarity between the courageous political stances taken by both Bishop Samuel and Pope John Paul II in contrast with the two leaders’ conservative social positions on contraception and abortion and indeed even on women’s rights.
게다가 몇몇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은 사무엘 주교의 교구와 치아파스의 가장 중요한 국내 인권단체인 프라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센트레(Fray Bartolomé de las Casas Centre)를 통해 자신들의 일을 ‘여과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에 분개했다. 이 인권단체는 사무엘 주교가 세우긴 했으나 비종교적 자치 기구로 운영되어 왔는데, 1994년 봉기 이후에는 다시 사무엘 주교의 교구가 장악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사무엘 주교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파티스타와 교회의 관계도 기복이 있다.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현지에서 활동하던 농민 권리 옹호 단체들이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열정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듯하자, 마르코스는 그들을 ‘제3의 길 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오랫동안 농민 지도자로 있던 이는 나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Moreover, some NGO workers expressed resentment at the pressure they experience to “filter” their work, as they put it, through the Diocese, and the most important Mexican human rights organization in Chiapas, the Fray Bartolomé de las Casas Centre, which was founded by Bishop Samuel, but operated as a secular, autonomous organization, was taken over by the Diocese after the 1994 uprising. Relations between the Zapatistas and the Church, as well as between Marcos and Bishop Samuel have had their ups and downs, to say the least, and local organizations in place and struggling for peasants’ rights since the 1970s have been denounced by Marcos as “tercerista” ["third way-ers"] when their adhesion to the EZLN’s appeals seemed insufficiently enthusiastic. As one long-time peasant leader said to me in an interview,
“마르코스는 언제나 ‘시민사회’를 들먹이는데, 그가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농민들이 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정부 (기관들)과 관계를 맺은 걸 타협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제쳐버렸다.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 머리 너머로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해외의 시민사회에 호소한다. 마치 치아파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은 타협한 적이 없기라도 한 듯 말이다!”
Marcos is always talking about ‘civil society,’ but who does he think we are? He dismisses us as compromised by the relations we have had with the state [agencies] to get the things that peasants need. He appeals over the head of people here to civil society in the rest of Mexico and abroad, as if people farther away from Chiapas have not made their own compromises!
간단히 말하면, 치아파스 문제, 더 넓게는 멕시코 문제를 해결할 세력이라고 많은 치아파스 연대 활동가들이 기대하는 ‘시민 사회’는 사파티스타 웹사이트와 이메일 리스트를 통해 유통되는 것보다 훨씬 이념적으로 다양하고 서로 충돌하는 공간임이 드러나고 있다. 활동가들의 배열과 얽힌 이해관계 전체를 가까이에서 점검하면, 급진주의, 개혁주의, 보수주의 종교 단체 및 세속 단체가 오늘날 치아파스에서 추구하는 수많은 의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In short the “civil society” that so many Chiapas solidarity activists see as the focus of their own hopes for solutions to the problems in Chiapas and more broadly in Mexico, turns out to be a more ideologically diverse and conflictive space than it might seem in the messages that circulate on the EZLN websites and e-mail lists. When the array of actors and interests are examined close at hand, we find, not surprisingly, that there is a very large number of agendas both secular and religious, as well as radical, reformist, and conservative, that are being pursued in Chiapas today.
토착성(Indigenismo)
원주민의 정체성을 신장하고 이들의 자치를 추구하는 것이 인터넷 통신에서는 아주 명백한 목표 같아 보인다. 하지만, 멕시코에 원주민이 650만명이나 있고(26) ‘원주민 문제’가 멕시코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심 문제였다는 점에서, 자치 사회를 구성하라는 국제 사회의 거의 일치된 요구가 연상시키는 것보다 이 문제는 훨씬 논란이 큰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The promotion of indigenous identity and the drive for indigenous autonomy seem very straightforward goals when they appear in internet communications. However, given the size of Mexico’s indigenous population of 6.5 million,26 and the centrality of the “indigenous question” to the development of Mexico as a nation, the issue turns out to be, of course, far more controversial than the current, nearly unanimous international call for autonomous communities would suggest.
자치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열광적 지지를 따져보기 전에, 이런 환경에서 멕시코 혁명(1910~1917)(역5)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과 이 개념이 만들어낸 공공 정책에 대해 약간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멕시코 민족주의의 역사적 정체성을 원주민의 과거와 함께 인식할 필요가 있다.(27) 혁명의 여파로, 이 땅의 원주민 뿌리에 대한 이해 및 관심이 되살아나고 스페인에 맞선 봉기를 이끈 목테수마(Móctezuma)의 조카 쿠아우테목(Cuauhtémoc)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고, 혁명 이후 지식 사회의 원주민 역사 찬양(새 혁명 정부가 발간한 교과서 또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다비드 시키에로스(David Siquieros),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같은 멕시코 벽화가의 작업에 나타나는 찬양)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근대 멕시코 원주민들의 미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책 논란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28)
Under the circumstances, before weighing in with enthusiastic international support for autonomy, it would seem important to have at least some understanding of the concepts that emerged from the Mexican Revolution (1910-1917) and the public policies to which those concepts gave rise. At a minimum, we would need to acknowledge the historical identification of Mexican nationalism with the indigenous past.27 In the aftermath of the Revolution, the revival of interest and concern with the indigenous roots of the country, the recuperation of the figure of Cuauhtémoc, the nephew of Móctezuma who led the uprising against the Spanish, the celebration of indigenous history in postrevolutionary intellectual life – whether in the textbooks issued by the new revolutionary regime, or the works of the Mexican muralists like Diego Rivera, David Siquieros, or Jose Clemente Orozco — all provided the ideological foundation on which policy debates took place around the future of indigenous people in modern Mexico.28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논의는 원주민 사회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인디언 문제’ 정책 수립에 대한 자의식이 거의 없는 메스티소 또는 백인 곧 ‘원주민 옹호론자들’간에 벌어졌다. 놀랄 것도 없이 진보적인 멕시코 지식인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언제나 이 문제를 놓고 심하게 대립했다. 문화적 생태주의자들, 인종차별 폐지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 원주민 옹호론자들이(이들은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관계에서 민족 문제를 계급 문제와 대등한 것으로 이해했다.) 혼합주의적 토착주의자들과 정책 형성 주도권을 놓고 대결했다. 혼합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었으며, 이들은 지역 개발 사업과 학교, 의료시설, 도로 건설 사업을 통해 소외당하던 원주민들이 나라의 경제, 정치, 사회적 영역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의 전망을 실현시키려면 원주민 언어 사전 발간과 수공예 촉진 같은 일을 통해 원주민 문화를 ‘보존’하는 게 필요했다.
Unfortunately, however, these discussions took place not within indigenous communities, but rather among “indigenistas,” that is, mestizos or whites who were usually quite unself-conscious about establishing policy on “Indian affairs.” Not surprisingly, progressive Mexican intellectuals and policymakers have always been deeply divided on the subject. Cultural ecologists, integrationists, and marxist indigenistas, (who understood ethnicity as equivalent to class in relations between indios and mestizos) vied with incorporationist indigenistas for control of policy formation. This last group prevailed and implemented programs for community development and the construction of schools, clinics and roads to bring disadvantaged indigenous people into full participation in the economic, political and social life of the nation. At the same time their vision required the “preservation” of indigenous culture through the creation of dictionaries of indigenous languages, the stimulation of craft production, and similar programs.
하지만 원주민들을 멕시코라는 국가와 시장에 통합시키려는 바로 이 시도는, 제도혁명당에 의한 공작, 인디언 아닌 이들에 의한 총체적 착취, 원주민의 국가에 대한 의존 심화의 길을 열어줬다. 이런 상황에서 통합주의적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는 가운데 1970년대 치아파스 고지대에서 종교 활동을 펼친 전도사들의 주 목표는 자치능력 계발이었다. “민족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대신 초월하는 데’ 맞춰진 구조를 규범삼아 다양한 원주민의 다민족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로스 알토스 지역 전도사들의 핵심적인 목표였다. 닐 하비(Neil Harvey)가 서술한 것처럼 “지역사회 밀착은 타고난 전통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투쟁성과 종교적 신념에 밑바탕을 둔 것이었다. 민족 정체성은 정치적 단결의 기초로 재창조됐다.”(29)
However, the same drive to incorporate indigenous people into the Mexican nation and market opened the door to their manipulation by the PRI, their gross exploitation by non-Indians, and their increasing dependency on the state. Under the circumstances, given the negative outcomes of integrationist policies, the development of a capacity for autonomous self-government became a principal goal of the Chiapanecan catechists in their missionary activities in the highlands in the 1970s. The composition of new pluri-ethnic communities comprised of indigenous people of various identities governed by structures “designed to transcend rather than erase ethnic differences” was at the heart of the catechists’ efforts in Los Altos. As Neil Harvey describes this movement, “Community cohesion was not based on native traditions, but rather on political militancy and religious belief. Ethnic identity was recreated as a basis for political unity.”29
자치라는 개념이야말로 사파티스타가 제안하고 1996년 2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과 멕시코 정부 대표간에 체결된 산 안드레스(San Andrés) 협정에 포함된 원주민 자치를 떠받치는 것이다. 이 협정은 “자치라는 맥락에서 원주민의 자결권을 인식하고 원주민의 참여와 정치적 대표성의 신장, 사법제도에 대한 접근의 보장, 원주민의 문화 교육 경제 활동을 촉진할 것”을 제기한다.(30)
It is this concept of self-rule that underpins the proposals on indigenous autonomy put forward by the Zapatistas and embodied in the San Andrés Accords, signed by the representatives of the EZLN and the Mexican State in February 1996. The accords call for “the recognition of the right of indigenous people to self-determination within a context of autonomy, the expansion of their participation and political representation, the guarantee of their access to justice, and the promotion of their cultural, educational and economic activities”.30
세디요 정권이 이 협정에 서명하고도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합의를 깼다. 또 산 안드레스 협정 이행 요구가 온 땅의 사파티스타 지지자들의 규합 지점이 됐다. 이는 또 멕시코 전역의 원주민들을 선동하는 주제가 됐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설명을 읽어보면, 전세계 진보진영의 의견이 모두 바로 이 모델 뒤에 굳게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또는,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obal de las Casas) 교구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총대리인 파드레 곤살로 이루아르테(Padre Gonzalo Iruarte)가 1998년 5월 인터뷰에서 나에게 말했듯이, “원주민들의 자치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 뿌리깊은 온정주의자들이나 이 합의에 담긴 원칙에 반대하는 쪽에 설 것이다.”
Inasmuch as the Zedillo regime signed the Accords but then failed to implement them, the EZLN broke off negotiations, and the call for the implementation of San Andrés quickly became the rallying point for Zapatista supporters everywhere. It has also become a mobilizing theme for indigenous people throughout Mexico. To read the accounts on the internet, it would seem that the entire world of progressive opinion is also solidly behind this model, or indeed, as Padre Gonzalo Iruarte, Vicar-General for Justice and Peace of the Diocese of San Cristobal de las Casas said to me in an interview in May 1998, “only profoundly paternalistic people who do not respect the capacity of indigenous people to govern themselves would be aligned against the principles embodied in this agreement.”
그러나 여전히 이런 구상에 대한 비판이 있다. 멕시코의 ‘원주민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뿌리깊은 의견 불일치가 이 문제에 대한 각 진영의 태도를 특징 짓는다. 내가 고지대 원주민 사회에 관여하는 치아파스의 정치 활동가와 인류학자들을 인터뷰했을 때 두드러진 것이 자치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자치에 대한 다른 전망 제시를 수용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워낙 강한 탓에 치아파스에 자리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열정적으로 제시했으나,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아예 꺼려했다는 사실이다. 한사람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And yet, the idea has its critics. As has always been the case in the debates around the “indigenous question” in Mexico, profound disagreement characterizes the positions held on the issue. In the interviews I conducted with Chiapanecan poli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