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4.5, 코스타리카 2.9, 에쿠아도르 2.5, 오스트레일리아 0.1 미만…. 이 숫자들은 겨울을 난 지구 남쪽 국가들의 신종플루 사망률이다. 아르헨티나는 환자 100명 중 4.5명이 사망했고 오스트레일리아는 1000명 중 한 명도 사망하지 않았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북반구의 국가들까지 포함하여 전 세계 나라들의 성적표가 사망자 수와 사망률로 드러날 것이다. 남반구 국가들은 아직 신종플루 백신이 생산되기 이전의 성적표였던 반면 북반구에서는 백신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가 나뉠 것이므로 각국의 명암은 더욱 뚜렷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 예방 접종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몇 명이나 될까? 북반구에서 올해 8월까지 백신 생산 주문을 한 것이 대체로 10억 회 분량 정도다. 짐작하다시피 거의 대부분을 북반구의 부국들이 주문했다. 일례로 미국의 경우 계절 독감 백신의 주문량은 1억 회 정도였지만 이번의 대유행 독감 예방 백신의 경우 2억5000만 회분을 주문했다.
그리스, 네덜란드, 캐나다, 이스라엘은 인구 전체가 2회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을 주문했고 다른 국가들도 인구의 30~78%가 2회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을 주문했다. 조류독감의 경우 치사율이 60%였으니 선진국들이 준비를 철저히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10억 명을 제외한 58억 명은 백신과는 관계가 없다.
다행인 소식도 있다. 2회 접종을 해야 할 것으로 알려졌던 백신이 18세 이상 성인과 10세 이상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1회 접종만으로도 예방이 가능할 것이라는 임상결과다. 또 9월 21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마가렛 챈이 밝힌 바에 따르면 대유행 인플루엔자 예방 백신이 2010년까지 내년까지 약 30억 개가 생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 이번 겨울에 신종플루 예방 접종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전 세계에서 몇 명이나 될까? ⓒ프레시안
그러나 이것이 다행일까? 30억 개가 생산가능하다는 것은 2009년이 아니라 2010년이다. 그리고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 주문 생산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벌써부터 내년에는 선진국들의 주문이 대폭 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또 2회가 아니라 1회가 된다 한들 선진국들이 백신을 후진국에 기부하기보다는 자국 사람들이나 선진국 사이에서 재분배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지금까지 기부물품으로 나온 백신이 오직 300만 개, 즉 전체 생산량의 0.3%도 안 된다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지구의 68억 인구 중 백신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 즉 선진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의 국민 대다수는 백신은 구경도 못할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50%가 하루 2.5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는데 신종플루 백신 가격은 최소 10달러가 넘는 현실에서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수조 원의 이익을 내는 기업들이 있다. 백신 독점 생산 기업의 하나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지금까지 3억4100만 개의 신종플루 백신을 주문 받았다고 한다. 이는 계절독감 수준의 가격으로만 계산해도 3조 원이 넘는 돈이다(실제로는 5조 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제약회사 하나가 신종플루로 번 돈이 이 정도다.
전 세계 백신 생산은 사노피-아벤티스, 아스트라-제네카, GSK, 등 몇 개 제약회사의 독점 영역이고 다섯 개 회사가 전체 물량의 80% 이상을 공급한다. 이들의 주가는 요즘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항바이러스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조류독감의 치료제이고 이번 신종플루 치료제이기도 한 타미플루의 독점 판매권을 가진 로슈는 2004년부터 이 약을 지금까지 2억7000만 명분을 팔았고 올 한해에 예상되는 매출액만 2조 원이 넘는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항바이러스 치료제도 백신과 마찬가지로 선진국들이 비축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인구의 30~80%를 비축한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비축은 엄두도 못낸다.
물론 선진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로슈가 올리는 천문학적 이윤과 어떤 관련도 없다. 타미플루만 하더라도 독점 판매권은 로슈가 가지고 있지만 그 특허권은 길리어드라는 회사가 가지고 있다. 그 길리어드의 전 대표이사는 우리가 잘 아는 부시 정권의 럼스펠드 전 국방부장관이다. 길리어드의 잘 알려진 주주로는 레이건 정권의 슐츠 전 국무장관과 그 부인도 있다. 그리고 이 길리어드는 로슈 판매액의 10%를 받는다.
이 럼스펠드가 국방부장관 시절에 조류독감 치료제로 전 세계 미군을 위한 타미플루 구입을 지시했으니 조류독감이나 지금 신종플루에 대해 인도네시아 보건부 장관이 제약회사가 질병을 만들어 퍼뜨렸다고 음모론을 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신종플루로 몇 개 다국적 기업과 소수의 권력자들이 떼돈을 버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비싼 약값으로 약을 구경도 못하게 생긴 상황에서 어떻게 음모론이 나오지 않겠는가.
20세기의 대부분의 시기 인류는 전 세계적 전염병에 대해 개인적 위생과 사회적 격리라는 두 가지 기본적 방법으로 대처해왔다. 빈곤과 흉작, 전쟁이 겹치는 상황에서 개인 위생이나 사회적 격리라는 고전적인 방법만으로는 역병을 막을 수가 없었고 1918년 스페인 독감 시기에 인류는 50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역신에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다. 현대 의학은 최소한 백신과 치료제, 그리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중심으로 하는 치료의학을 발전시켜왔다. 천연두나 소아마비 등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실상 사라진 질병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상황은 어떤가? 이번 신종플루만 보더라도 전 세계 인구의 80% 이상이 사실상 현대 의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중 하나인 백신과 치료제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다. 백신이 없어서도 치료제가 없어서도 아니다. 또 2005년부터 UN이 준비했으므로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신종플루만이 아니다. 지금 세계에서는 약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매년 1000만 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에이즈로 300만 명, 결핵으로 200만 명, 말라리아로 100만 명이 사망한다. 이들 중 반이 넘는 수는 어린이들이다. 홍역으로 폐렴으로, 또 설사로 아이들이 죽는다.
HIV/에이즈문제를 보자. 에이즈는는 과거처럼 걸리면 죽는 병이 아니다.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치료만 하면 오랫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병으로 바뀐 지 오래여서 미국 에이즈환자의 발병 후 평균여명은 지금 24년 정도다. 그런데 전 세계 HIV 감염자의 70% 이상이 있는 아프리카의 에이즈환자 중 적절한 치료를 받는 사람은 0.1%도 안 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인구 중 절반 가까이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산다. 그런데 에이즈 치료제의 약값은 1달에 최소 800달러 이상이다. 이들에게 다국적 제약회사의 에이즈 치료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똑같은 약제가 인도에서 수입되면 20분의 1이다. 특허권 때문이다. 특허만 없어도 당장 죽어가는 1000만 명을 살릴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에서 특허는 20년 동안 존속한다고 해놓았고 이 때문에 지구 한편에서는 1년에 1000만명이 죽고 다른 한편에서 럼스펠드와 같은 제약회사의 극소수 주주들은 1년에 수백조 원씩의 이윤을 얻는다. 이것이 21세기의 전염병의 자화상이다.
이번 추석에 신종플루는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신종플루를 둘러싼 한국의 상황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몇 년간의 시간에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더욱이 문제가 심각해진 올해 4월 이후에도 백신과 항바이러스제를 준비할 생각도 안했다. 부자감세와 건설업체 지원, 4대강에는 돈을 펑펑 쓰는 정부가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에는 나 몰라라한 것이 이명박 정부다.
그러나 나는 이 추석에 정부만 도마에 올려놓을 것이 아니라 더 눈을 돌려 21세기의 인류가 왜 과학과 현대 의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염병에 고통 받아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왜 이 세계는 생명보다 이윤을 중요시여기고 있는지 또 과연 이러한 ‘세상의 비참’을 낳고 있는 이 자본주의가 과연 정의와 양립할 수 있는 체제인지를.
그리고 한 가지 더. 전 세계를 떠나 당장 세계보건기구가 신종플루에 가장 취약한 나라의 하나로 뽑은 북한은 지금 어떨까도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왜 한국 정부는 가장 가까운 이웃과도 의약품과 백신을 나누지 못하는가.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