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재협상이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면 항상 재협상에 응해왔다. 이제 미국은 불리한 분야가 생기면 언제든지 협정문을 뜯어고칠 수 있다는 확고한 선례를 만들었고 따라서 한미 FTA는 미국에게 유리해야만 하는 불평등 협정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한국정부는 한 EU FTA를 들어 한미 FTA 협정문 수정을 합리화했고 EU는 수정된 한미 FTA에 따른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한국은 ‘FTA 허브’가 아니라 ‘FTA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이른바 4대 선결과제를 내주고 미국에 매달리다시피 FTA 협상을 시작한 이래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만 이번으로 세 번째다. 이처럼 통상협상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잦은 재협상을 거쳤지만, 한미 FTA에서 정작 고쳐야 할 내용은 하나도손대지 않았다. 이번 재협상을 앞두고 우리는 이를 협정문안을 전면 재검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사회전체의이익과 공공정책을 훼손하는 내용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를 거친후 전면적인 재협상을 하거나 아예 폐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시간에 미국이 결정한 의제만 두고 재협상을 벌였고 결국 미국의 핵심 요구를 다 수용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 합의과정은 고사하고 대통령 훈령에서 정한 절차까지 무시되었다.
자유무역협정체결절차규정(대통령훈령 제121호)에 따르면, 통상교섭본부장은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할 때 중요 진행상황을 국회에 보고해야 하고, 관련이해당사자와 국민에게 중요 진행상황을 수시로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민주적 논의과정과 의견수렴과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들은 통상교섭본부장의 입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외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인가.
이번 재협상의 결과는 한마디로 말해 미국측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것이다. 정부는 한미 FTA 협정의 자동차부문의 협상을 핵심적 이익이라고 자랑해왔다. 정부가 제시한 무역수지이익의 95% 이상이 자동차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협상결과는 미국측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들어준 것이다. 미국차에 대한 한국의 관세는 곧바로 인하하고 한국차에 대한 미국의 관세는 5년 이후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5년 이후에도 미국이 이번에 새로 생긴 세이프가드를 발동하여 (또는 스냅백 조항으로) 어느 때나 한국의 자동차수출을 막을 수 있다. 픽업트럭의 경우 7년 이후로 관셰철폐가 미루어졌다. 이에 대한 정부의 변명은 더욱 가관이다. 자동차 수출은 원래 미국현지 자동차 생산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관세철폐나 세이프가드의 영향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자동차부문의 협정으로 얻었다고 자랑해온 이익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욱이 자동차 재협상에는 미국자동차에 대한 환경규제완화까지 포함하고 있다. 미국자동차 안전기준을 더욱 약화시키고 미국자동차의 연비규정은 예외로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자동차에서 나오는 배기가스와 CO2는 특별한 CO2라는 말인가? 미국자동차를 더 수입하기 위해 배기가스를 더 마셔야 하는, 국민의 건강권과 환경권을 무시하는 무역협정은 필요없다.
정부는 쇠고기 협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미국측에서는 이미 쇠고기 문제는 “앞으로 수주내 모든 연령대 쇠고기에 대한 한국시장개방과 관련, 양측은 지속적인 대화와 협의를 해가기로 합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정부는 상대방이 있는 협상에서 미국측이 쇠고기 협상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쇠고기 협상이 FTA와 상관없고 협상이 진전되지 않았다는 뻔한 거짓말을 언제까지 계속 할 것인가.
한국이 자동차협상을 내주고 얻어다는 돼지고기 관세 2년 유예나 의약품 허가-특허연계 제도 3년 유예는 보잘 것 없다. 돼지고기 관세유예는 전체 농산물 개방의 극히 일부분일 뿐만 아니라 한-EU FTA가 체결된 상태에서 미국산 돼지고기의 2년간 관세철폐유예는 효과가 없다.
의약품 허가특허연계조치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후 파나마, 콜롬비아 FTA에서 이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조치를 삭제하였다. 한국만 이 조항이 삭제되지 않았다. 당연히 삭제되어야 할 조항에 대해 기껏 유예기간을 늘인 것이 무슨 의미인가. 더욱이 한국정부는 허가-특허연계조치로 인한 시민사회단체와 제약협회의 피해추계를 과다추계한 것이라고 지금까지 주장해 오다가 이번 발표에서는 제약협회의 손해추계를 인용하여 성과를 부풀리는 촌극까지 벌였다.
한미 양국 정부는 한미 FTA가 경제 발전과 국민복리향상을 가져올 것처럼 선전한다. 그러나 여러차례 강조했듯 한미 FTA의 문제는 수출과 수입의 문제가 아니다. 투자자-정부 제소제, 서비스개방조치, 역진방지조치, 국내농업의 붕괴, 의약품 등 의료비의 폭등, 지적재산권 강화, 환경규제 완화 등 공익을 해치는 조항들로 가득한 것이 한미 FTA다. 더욱이 금융위기에도 세이프가드조치를 취할 수 없도록 규정한 한미 FTA를 불과 2년전 금융위기를 거친 한국정부가 아직도 고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국민들의 생활에 악영향을 미칠 조항(투자자-정부 제소 제도, 네거티브 방식의 서비스 개방, 역진 금지 조항, 의약품 특허 강화 조항, 금융 서비스 조항, 노동 관련 조항, 필수공공서비스 탈규제, 과다한 투자 보호 조항 등)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는 한미 FTA를 저지하고 정부의 통상협상에 대한 민주적 통제력과 국민에 대한 책임성을 회복하는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한미 FTA저지 범국본 정책위원회
20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