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진폐증’ 환자는 탄광에만 있나

‘진폐증’은 광부만 걸리는 것이 아니다
[현장르포] 검은 먼지 속, 주물노동자 22.5%가 폐 질환

박수원 기자 won@ohmynews.com

인천시 서구에 자리잡은 한 주물공장. 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무더위 때문이어서 그런지 공장 주변에서 뿜어내는 공기는 더욱 뜨거웠다. 4월 22일 오후 4시. 공장 안으로 고철더미를 싣은 대형트럭이 들어가고 있었다. 주물을 만드는 기본 재료가 운반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검은 작업복

80여 명이 근무하는 이 공장 안에 들어서자 온통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공장 안은 검은 먼지로 가득했다. 그 먼지 때문인지 작업하는 사람들이 입은 청색 반팔 티셔츠와 회색 바지는 이미 그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얼굴에 보안경과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낀 노동자들은 섭씨 1500도가 넘는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일하는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일부는 소음 때문인지 귀마개를 꽂고 일하고 있었다. 이제 소음이 익숙해졌는지 동료들의 입 모양을 보고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 녹인 쇳물을 주형틀로 이동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박수원
주물(鑄物)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쇠붙이를 녹여 부어 만든 물건’. 주변에서 쓰이는 쇠붙이 물건들이 제작되는 곳이 바로 이 주물공장이다. 찾아간 공장에서는 자동차 부품을 주로 제작하고 있었다.

자동차 부품이 생산되기까지는 우선 들여온 고철을 섭씨 1500도가 넘는 용광로에 녹여야 한다. 고철이 용광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검은 먼지가 일차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녹여낸 고철을 주물틀에 집어넣고 형이 완성된 후 모래 형틀을 털어내는 과정(탈사)에서 상당한 먼지가 일어난다.

탈사 과정을 거치면 작업장 바닥에는 검은 모래가 쏟아져나온다. 탈사 작업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글라이딩 작업이 남아 있다. 주물에 남아 있는 울퉁불퉁한 부분을 곱게 갈아주는 작업으로 탈사 때와 마찬가지로 모래 먼지가 생긴다.

주물 공장 안에 들어선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코와 목이 까칠까칠해졌다.

5년 동안 이 곳에 근무했다는 A(39)씨.

“저희 공장은 기계화돼서 나은 편인데도 일을 마치고 나서 씻으면 코와 입에서 검은 모래가 섞여나옵니다. 마스크와 보안경, 장갑, 귀마개를 꼭 착용하도록 돼 있지만 어디 그런가요. 온도가 너무 높아서 마스크가 답답해서 벗어놓고 할 때도 많습니다.”

작업장 안의 검은 먼지 때문에 이 곳에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관지염을 달고 산다고 A씨는 말했다.

작업장에 먼지를 모아내는 집진 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제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A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노동부에서는 조사 나오면 먼지를 더 많이 밖으로 뿜어내라고 하지만, 환경부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밖으로 먼지 자꾸 뿜어내면 환경에 유해하다고 먼지를 뿜어내지 말라고 합니다. 결국 저희가 그 먼지 대부분을 먹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9월부터 산업안전공단 산업보건연구원에서 인천지역 경서동, 가좌동, 남동 공단에 위치한 30인 이상 규모의 주물공장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950여 명 중 427명에 대해 가슴사진을 찍어본 결과 진폐1형(진폐증 유소견자) 35명, 진폐의증 24명으로 진폐관련 질환의심자가 59명으로 전체의 13.8%가 진폐로 인한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다 폐질환의 종류로 분류되는 폐결핵, 기관지염, 기관지 확장증 등의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까지 포함되면 총 96명으로 전체 검사자의 22.5%가 폐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진폐증은 작업 중 발생하는 먼지를 들여마심으로써 먼지가 폐에 쌓여 폐가 굳어져 호흡이 마비되는 질병. 일반적으로 탄광노동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역학조사 결과 노동부는 진폐1형 35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조치를 강구하고 있지만, 진폐의증 24멸과 폐질환 판정만을 받은 37명 등 61명에 대해서는 직업병으로 분류하지 않고 개별적인 내과치료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공장 안에도 진폐1형 판정을 받은 두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B(52)씨. 그는 18년째 주물공장에서 일해왔다. 배운 게 주물기술이기 때문에 계속 이 일을 했지만 진폐1형 판정을 받은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고 한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해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B씨는 ‘평생 일만하고 살아온 결과가 이것인가’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하다.

주물공장을 빠져 나오는데 공장 한편에 빨아놓은 작업복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작업복은 떼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 오마이뉴스 박수원

진폐는 광부만 걸리나

현재 생산되는 대부분의 주물은 인천과 마산에서 만들어진다. 인천상공회의소 통계에 따르면 인천에만 280여 개 주물사업장이 있으며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이 곳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30인 이상 사업장은 겨우 70여 곳뿐이다. 대부분은 3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이다. 이번 역학조사가 상대적으로 조건이 괜찮다는 3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점을 감안한다면 주물공장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폐질환은 조사결과보다 훨씬 심각할 가능성이 높다.

암에 걸렸던 한 노동자

전아무개(당시 60세. 남) 씨가 인천 산업사회보건연구회 문을 두드린 것은 99년 여름쯤.
전 씨는 주물공장에서 15년 정도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폐암 판정을 받기 전인 98년까지 인천의 한 주물공장에서 일했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은 곳이 바로 인천 산업사회보건연구회였다.

서류를 준비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대답은 직업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의 거부 이유는 두 가지. 전 씨가 흡연자라는 사실과 가장 최근에 근무한 주물공장에서 6개월밖에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몇 차례 주물공장을 옮기기는 했지만 전 씨는 분명히 15년 동안 주물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직업병 판정을 할 경우 6개월 일한 회사에 부담이 과하다”며 회사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뛰어다녔지만 전 씨는 2000년 1월 결국 사망했다. 산업사회보건연구회 쪽에서는 충분히 승소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소송을 제안했지만 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죽은 사람을 두고 소송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주물노동자 22.5%가 폐질환을 앓고 있다는 산업안전공단 산업보건연구원 조사결과는 이미 예견돼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진폐의 예방과 진폐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석탄광업을 포함하는 8개 광업에 한정되어 있어 진폐에 노출된 노동자에 대해 전체적으로 포괄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인천 산업사회보건연구회 등 8개 단체로 구성된 ‘주물산업 종사 노동자 직업성 진폐 대책마련을 위한 공대위’는 인천과 마산을 중심으로 있는 주물사업장에 대한 전체적인 실태조사와 이번 역학조사 결과 진폐 의심자와 폐질환이 있는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정확한 검진, 진폐법 개정 등을 노동부에 요구하고 있다.

인천 산업사회보건연구회 조성애 연구실장은 “노동부가 주물공장 노동자들의 진폐에 대해 이미 보고를 통해 알고 있으면서도 대책을 마련하는 데 미온적”이라며 “적극적인 실태 파악은 물론 진폐 관련법 또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통해 제조업과 건설업 종사자들을 포괄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노동부 산업보건환경과 이신재 과장은 “노동부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역학조사를 실시했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며 “주물 사업장 자동화를 위한 지원과 함께 지도·점검을 계획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신재 과장은 종합적인 대책 마련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해 법률개정 여부는 미지수다.

주물공장 노동자들의 진폐와 관련 산업의학전문의인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주물공장에서 진폐가 발생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노동부가 역학조사를 통해 탈사 공정 자동화를 비롯해 작업장 먼지를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전략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방법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백 교수는 “폐기능 검사 정밀화 등을 통해 질병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