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 환자에게 불법 임상시험하다니…”
바이오벤처 무더기 적발, 식약청은 도리어 ‘규제완화’
2004-03-26 오전 11:11:02
동물실험도 거치지 않아 과학적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보되지 않은 세포치료제 등을 난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무분별하게 불법적으로 임상시험을 해온 바이오벤처가 무더기로 적발됐다. 이들을 적발한 안전 규제 기관인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오히려 임상 승인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난치병 환자 대상, 무분별한 임상시험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지난 2월까지 언론 및 인터넷을 통해 세포치료제 임상시험을 실시한 것으로 광고ㆍ홍보한 바이오벤처 및 병의원 6곳을 조사한 결과, 식약청 승인 없이 세포 치료제를 사용해 척추마비 암 환자와 대머리 환자 등과 같은 난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한 4곳을 적발해, 약사법 위반으로 검찰에 형사고발하기로 했다고 지난 23일 밝혔다.
식약청 실태조사 결과 이들 바이오벤처는 사람에게 세포치료제를 투여하기 전에 동물실험을 하지 않았으며, 환자에게 투여한 용량도 과학적 평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에 근거를 두고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식약청은 또 이들 벤처가 임상시험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고 임상시험심사위원회의 심의과정도 거치지 않았으며 최종 제품에 외래성 바이러스가 들어있는지를 검사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 결과는 세포ㆍ유전자 치료를 포함한 바이오 의약품 생산 업체들이 전체 바이오 벤처의 35%를 넘는 상황에서 늦은 감이 있다. 그 동안 의학계와 환자들 사이에는 바이오 벤처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난치병 환자의 절박한 처지를 이용해 과학적 검증 없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약청, “환자 상태는 조사 대상 아니다”
식약청은 바이오벤처의 불법 사실을 적발하면서도 정작 임상시험이 대상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환자들의 상태는 어떤지에 대한 조사는 생략해 눈총을 받고 있다.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는 25일 논평을 내고,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임상시험에 참여한 환자들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식약청이 밝히지 않고 있다”면서 “의약품과 관련된 안전성을 관리ㆍ감독하고 국민의 건강을 책임진 식약청이 임무를 방기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의 우석균 국장(가정의학과 전문의)도 “이번 식약청의 조사 결과 발표는 납득이 안 가는 측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면서 “바이오 벤처에서 불법 임상시험을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했다면, 어떤 의료기관과 연계해 실시했는지, 그 임상시험이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해 밝혀야 마땅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식약청 관계자는 “이번 조사의 목적은 불법적으로 임상시험이 실시되고 있는 상태를 빠르게 파악해 그것을 막는데 목적을 뒀다”면서 “임상시험을 받은 환자들의 상태를 추적 조사하는 것은 조사 목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식약청, “난치병 환자와 생명공학 발전 위해 규제 풀어야”
한편 식약청은 앞으로 이번에 문제가 된 세포치료제와 같은 첨단 생명공학 의약품에 대해서는 시판 허가 전이라도 다른 치료법이 없는 환자에게 치료 기회를 주기 위해 임상 승인철차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관련 규정을 고칠 계획을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식약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교통사고 응급 사지마비 환자 등 일부 난치병 환자의 경우에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연구가 있으나 현행 규제틀 안에서는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난치병 환자의 치료기회를 확대하기 위해서도 관련 규정을 손보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식약청 관계자는 또 “안전성을 우선에 둬야겠지만 연구 분야가 활성화돼야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안정성과 함께 연구 활성화를 모색하는 것도 정부 기관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지적했다.
”식약청이 생명공학 육성부터 걱정, 임무 방기다”
이런 식약청의 입장에 대해서 식약청의 임무 자체를 방기하는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우석균 국장은 “생명공학의 성과나 효과가 아직 불확실한 상태에서 규제를 완화한다면 국민 안전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면서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인 식약청이 앞장서 의약품 안전성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의료의 상업화를 부추겨 보건을 ‘복지’보다는 ‘산업’으로 보는 편견을 부추기고 있다”고 식약청을 비판했다.
우 국장은 난치병 환자에 대한 치료 기회 확대에 대해서도 “의료의 신기술이 절박한 처지에 놓인 환자의 동의만으로 도입돼서는 안 된다”면서 “생명을 책임지는 의료의 특성상 신기술의 의학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위원회 등을 통해서 충분히 검토된 후 도입되는 것이 당연한 절차”라고 지적했다. 우 국장은 또 “의료에서 신기술이 도입된 후 2년여가 지난 이후에도 계속 쓰이는 것은 불과 5% 미만”이라며 “무분별한 신기술 도입은 환자에게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의료비용을 부추긴다는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낭비”라고 덧붙였다.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는 “최근의 생의학 연구는 상업 활동과 의료 활동, 연구와 임상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어서 환자의 안전을 위해 더욱 강화된 관리ㆍ감독 체계가 필요하다”면서 “식약청은 바이오 벤처와 여기에 연결된 병원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실시한 후 적절한 규제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양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