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해답’인 사회보장체제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에서 이제 민주주의는 바람 앞의 촛불이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새로운 ‘적대적 상대’는 군사독재가 아니라 세계화다.

김상곤 교수(한신대)는 그 이유를 현 정부에게 주어진 과제의 성격에서 찾는다. 김 교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10일 개최한 6월항쟁 17주년 토론회 발제문에서 “지금까지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게 오늘의 민주주의 과제라고 짚었다. 그것은 “경제적 민주화와 경제과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연관지어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방안”이다.

그 핵심은 이른바 ‘87년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것이다. 박영호 <동향과 전망> 편집위원회 소장은 최근호 머릿말에서 “상업적 이익이 유일한 선택이자 생활방식인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해진다”고 밝혔다. 이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새로운 ‘적대적 상대’는 군사독재가 아니라 세계화다. 그것은 기왕의 민주적 성과마저도 위협한다. 세계화는 “불평등 문제를 사회보장국가를 통해 해결”하는 일국적인 개량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최소한의 해답’인 사회보장체제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에서 이제 민주주의는 바람 앞의 촛불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학계의 냉정한 평가다. 윤상철 교수(한신대)는 “노무현 정부는 경제·사회복지·대외정책 등에서 이전 정부에 비해 오히려 퇴조하는 양상을 보여줬다”고 꼬집는다. 윤 교수는 지난 8일 한신대 사회과학연구소 심포지엄에서 “(노무현 정부는) 경제적·사회적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정책적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이때문에 사회적 민주화에 대해 대응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안을 정치적 쟁점화하는 전략으로 이동했다”고 비판했다.

조현연 교수“사상적 결손과 정체성 빈곤의 한계”
박영호 소장 “사회보장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해”
윤상철 교수“경제·대외정책 오히려 전보다 퇴조”

이런 전략의 문제는 현 정부가 자리한 ‘시대적 좌표’에서 비롯된다. 민주화 이행은 일반적으로 ‘자유화기-이행기-공고화기-심화기’ 등의 단계를 거치는데, “김대중 정권 후반기부터 정치적 민주화의 단계를 벗어나 경제적·사회적 자원의 재분배구조를 변화시키는 민주적 심화기가 시작됐다”는 게 윤 교수의 판단이다. 민주적 심화기의 한가운데 서있는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는 민주화 이행기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조현연 교수(성공회대)는 이를 ‘영양실조에 걸린 민주주의’라 부른다. 조 교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토론회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민주적 공고화가 아니라 오히려 탈민주주의 추세 속에서 급격히 퇴락하고 있다”고 짚고, 노무현 정부의 “사상적 결손과 정체성 빈곤의 한계”를 그 이유로 들었다.

87년 6월 항쟁의 주역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청와대에서 부르는 오늘, 역설적이게도 한국 민주주의는 시련 앞에 섰다. 진보 학술진영은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세계화·사유화·상업화를 위해 폐기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화·사유화·상업화의 내용을 변경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섰다”(박영호)고 단언한다.

학계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 새로운 민주주의 과제를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

안수찬 기자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