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적십자사 불구속에 시민 강력반발
AIDS 감염 7명중 3명 숨지기도, “면피용 수사하기냐”
2004-07-29 오후 3:33:14
그 동안 잘못된 혈액 관리로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BㆍC형간염, 말라리아에 오염된 혈액을 유통시켜 온 혐의로 대한적십자사 등을 수사해온 검찰이 실무자급 27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당초 혈액 관리의 최고 책임자로 고발됐던 보건복지부나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질병관리본부 등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혈액 파동’에 대한 정부와 적십자사 등의 책임을 면하려는 조치라며 시민ㆍ사회단체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검찰, “AIDS 감염 7명, 3명은 이미 숨져”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성시웅 부장검사)는 잘못된 혈액 검사와 혈액 관리로 부적격 혈액을 유통시킨 혐의(업무상 과실치상 및 혈액관리법 위반)로 홍모 중앙혈액원장 등 전ㆍ현직 혈액원장과 혈액원 검사 담당 직원 등 27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29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BㆍC형간염에 감염돼 ‘헌혈 유보군’으로 분류된 헌혈 지원자 9명으로부터 헌혈 경력 조회도 거치도 않은 채 채혈한 다음, 간염 음성으로 잘못 판정해 15명에게 수혈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수혈 받은 15명 중 8명이 BㆍC형간염(B형 3명, C형 5명)에 감염됐다.
적십자사는 AIDS 잠복기 상태에 있는 헌혈 지원자 3명으로부터 채혈한 혈액을 유통시켜 2차 감염된 가족 1명을 포함 수혈자 7명이 AIDS에 감염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중 3명은 이미 숨진 상태다.
’아찔한’ 잘못 속출, 적십자사 ‘혈액관리’ 엉망 재확인’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적십자사의 ‘아찔한’ 잘못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적십자사는 헌혈 혈액 1백12건의 AIDS 양성판정 사실을 전산망에 최고 3년5개월이나 늦게 등록해 그 사이 이들 헌혈자로부터 추가 헌혈을 받아 3백60건이 수혈용과 제약회사의 의약품 원료로 출고됐다.적십자사는 2000년 4월7일 AIDS 양성판정을 받은 황모씨에 대해 3년5개월이 지난 2003년 9월4일 양성판정 사실을 전산에 등록한 사실이 수사결과 드러났다.
적십자사는 또 AIDS 양성 판정으로 ‘헌혈 일시 유보군’으로 분류된 헌혈자 51명으로부터 헌혈경력 조회를 하지 않은 채 혈액을 채혈해, 1백46건 혈액이 수혈용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다행히 유통된 혈액은 음성으로 확인됐다.
적십자사는 AIDS에 감염돼 ‘영구 유보군’으로 등록된 헌혈자의 혈액이 별다른 절차 없이 채혈됐다 폐기한 적도 있었으며, 말라리아 보균자 4명으로부터 헌혈을 받아 수혈자 8명중 4명을 말라리아에 감염시키기도 했다.
검찰은 이밖에도 적십자사가 ▲에이즈 양성반응 혈액에 대한 역학조사 지시를 3개월이나 지체하고, ▲헌혈지원자 1백73명의 빈혈 여부 검사를 실시하지 않고, ▲연령제한자 등 채혈 금지 대상자 3만2천7백89명으로부터 채혈하는 사례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성시웅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은 “사설 혈액원의 부적격 혈액 유통사례 및 기타 혈액사업과 관련된 비리혐의를 포착해 수사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작 책임질 사람들은 다 빠져…”
이번에 발표된 검찰 수사 결과는 그간 시민ㆍ사회단체와 언론의 고발 또 최근 복지부와 적십자사의 급박한 자체 조사 결과 발표와 대개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관심의 초점은 처벌 범위와 수위에 있었다. 국내에서 처음 ‘혈액관리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십자사의 총체적인 부실 혈액 관리 실태를 공식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검찰 수사 결과는 실무자급 27명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어 ‘면책용 수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보건복지부나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질병관리본부 등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찰은 그간 건강세상 네트워크 등 4개 시민단체에서 보건복지부와 적십자사, 전국 혈액원에 대한 수혈 피해 고발 사건을 접수, 6개월간 1999년 이후 수혈용으로 유통된 혈액 관리실태를 수사해왔다.
건강세상네크워크, “전 복지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책임자 11명 처벌하라”
건강세상 네트워크 등 시민ㆍ사회단체와 민주노동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건강세상 네트워크는 29일 논평을 내고, “이번 수사결과는 실무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뿐 전체 16개 혈액원을 관리ㆍ감독하는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나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혈액파동’에 대해 정부기관이 책임을 면하려는 조치”라고 말했다.
건강세상 네트워크는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비롯한 피고발인 11명에 대한 형사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며 “이번 검찰의 기소결정은 일반 국민들의 정서상 납득할 만한 수준이 아니며,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국민들은 헌혈에 등을 돌릴 것”이라고 검찰의 재조사를 요구했다.
민주노동당 홍춘택 보건의료 보좌관도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홍춘택 보좌관은 “이미 2001년부터 국정감사 등에서 혈액 관리 문제가 계속 지적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수사 결과 복지부와 혈액사업본부 등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누락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최소한 혈액본부장까지는 책임을 묻는 것이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수사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춘택 연구원은 “지난 22일 갑작스런 복지부의 자체 조사 발표처럼 정부 책임을 면피하려는 수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홍춘택 보좌관은 “혈액 관리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김근태 복지부 장관의 직접 사과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며 “이번 수사 결과 적십자사가 혈액 사업 주체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가 주도해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춘택 보좌관은 “수사 결과로 확인 안 된 감염 피해 사례를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확인된 사안에 대해서는 합당한 피해 보상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양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