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성수동 마찌꼬바를 누비는 일본인 아저씨

성수동 마찌꼬바를 누비는 일본인 아저씨
[인터뷰] 노동건강연대 성수동 팀장 스즈키 아키라

박영선(imon) 기자    

1988년 7월 2일, 온도계와 압력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불과 두달밖에 근무하지 않았던 15세의 어린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국 사회 최초로 산업재해노동자장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그의 이름은 문송면. 우리 사회는 88년 당시에도 올림픽이다 뭐다 하며 그 어린 소년의 죽음을 모른 체했고, 지금도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그의 죽음을 기억해 낼 뿐이다.


ⓒ2004 참여사회

스즈키 아키라(42)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건강권·생명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에게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건강연대’에서 성수동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세사업장 노동안전 활동이 그가 하는 일이다.

2002년 통계에 따르면 한해 동안 산재로 죽거나 다친 노동자는 8만여명이며, 이 중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5만8천여명,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가 2만여명에 이른다. 영세사업장의 노동자 산재 비율은 점점 늘어가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 조치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이런 현실에서 일본인인 그가 유기용제에 노출된 인쇄, 제화, 금속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권 확보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마찌꼬바(소규모 공장)’가 밀집된 성수동에 뛰어든 건 대단하다 못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 영세노동자 배려가 노동운동 우선과제 스즈키 씨는 60년대 태생이면서도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을 했더군요. 1960년대 안보투쟁 이후로 일본 학생운동은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맞습니다. 일본의 대중적인 학생운동은 70년대에 소멸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운동은 아니더라도, 정파적인 운동은 80년대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할 82년 당시 상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나카소네 수상이 등장하고 일본에서 교과서 왜곡 문제가 발생한 해였거든요. 아시아 침략에 대해 ‘진출’이라고 표현하면서 한국과 중국에서 많은 항의를 받았던 시기죠.

다시 말하면 일본 사회 의식이 전반적으로 우경화된 시기라 할 수 있어요. 학생운동 내에서도 일본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우익 측 입장을 주장하는 학생 운동이 등장했을 정도니까요. 충격이었죠. 동아리 선배 권유로 우익학생운동을 막는 집회에 참석한 게 제가 학생운동에 관여하게 된 계기예요. 졸업 후엔 대학 시절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이 현장에 들어가 만든 조직인 노재직업병원센터에서 상근자로 일했고요.”

  

▲ 스즈키 아키라  
ⓒ2004 참여사회

- 한국에서는 학생운동 하다 노동운동으로 옮겨가는 게 자연스러운 경로인데요. 스즈키씨도 비슷했던 거 같아요.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노동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뭔가요?
“DJ 구명운동 등을 보며 한국 민주화운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한국스미다투쟁(경남 마산에 있는 일본기업 스미다 한국 공장에서 89년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이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투쟁을 벌인 사건. 결국 이 싸움은 90년 일본스미다 본사에서 사과와 함께 위자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기자 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죠.”

- 저는 한국에서 노동운동 이슈가 점점 마이너화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중에서도 특히 산업안전 관련 노동운동은 훨씬 더 열악한 상황인 것 같은데요. 그래서 성수동에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 일하시는 스즈키씨가 참 대단해 보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그 동안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으로 해 왔다는 문제가 있어요. 그렇지만 한국 노동운동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게 그래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려는 등 노력을 많이 하잖아요. 파견법에 대해서도 문제제기 하고요.

그런 면에서 한국 노동운동에 바라는 건 비정규직 가운데에서도 조직화가 가장 어려운 영세노동자를 많이 배려했으면 한다는 거예요. 제가 성수동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도쿄에서 노재직업병센터(東京東部勞災職業病센터)에서 일할 때부터 노동안전활동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지요. 성수동에서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같이 일하자는 노동건강연대의 제안에 흔쾌히 응한 것도 그래서고요.”

- 성수동사업이 작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 주관한 풀뿌리 지역운동사례로 입상한 적도 있었죠? 좀 더 소개를 해주시지요.
“2002년부터 준비했는데요. 노동건강연대를 비롯한 성수동 주변의 지역노조, 성동건강복지센터 등과 함께 ‘성수동 식구들’이란 모임을 만들었어요. 일본의 ‘POSITIVE(participation Oriented Safety Improvement By Trade Union Initiative)’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체크 리스트를 작성하고, 현장을 방문해서 노동자들이 일터와 자신의 몸에 대해서 한번 점검해 보도록 하는 일이에요. 노동자가 편하고 안전하게 일하기 위해 개선할 사항이 있으면 예를 들어 보여 주고 그걸 통해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이 일하는 작업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 어려운 점도 많았을 거 같습니다.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 무료 건강검진 기회를 주는 것도 사업 중의 하난데요. 검진을 토요일, 그것도 오후 6시 넘어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모두 영세사업장이라 장시간 노동이 기본이에요. 제화공장의 경우 일감이 많을 땐 노동자들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겠단 생각에 하루 종일 본드 냄새 나는 작업장 안에서 자장면으로 끼니 때우면서 일하거든요. 노동자들과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없어요.”

“과거 반성도, 미래 설계도 서로 만날 때 가능”

아무리 한국 사람들조차 외면하고 있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해 일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분명 일본인이다. 일본인으로서 한국 사회의 풍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최근 큰 이슈로 대두된 과거청산 문제부터 물었고, 그의 대답은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낫다”였다.

“민주주의를 자기 힘으로 쟁취했느냐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큰 차이가 있어요. 자기 손으로 과거 청산을 해 내지 못한 일본에 비하면 한국은 대단하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걸린 사진 보셨나요?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4·19, 5·16, 80년 광주항쟁, 87년 민주화투쟁을 지나 최근 촛불시위 사진까지 전시돼 있어요. 한국은 민중이 지나온 흔적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데 비해, 일본은 그렇지 않거든요. 물론 60년대 안보투쟁을 계속 계승하자는 일부의 움직임도 있지만, 운동으로서는 좀 약하지요. 그래서 과거청산 문제를 끌어 안고 계속 싸워 나가는 한국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갖게 됩니다.”

-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사 문제 등을 비롯해 일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도 큰 이슈고요. 반면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많은 일본사람들이 한국이나 중국이 왜 내정을 간섭하며 시끄럽게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과거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고요. 일본에서는 한국 역사를 가르치지 않거든요. 오히려 일본 사람들은 태평양전쟁 때 많은 국민이 죽은 사실 때문에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60년대 후반부터일 거예요.”

- 한일 관계에서 신사참배나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이 계속 불거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미래 세대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과거일로 한일간 갈등이 계속 유발되는 건 큰 문제인데요. 해결 방법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저는 무엇보다 서로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만나야 반성할 건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도 설계할 수 있다고 봐요.”

아름다운 사람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지난 해 시민사회단체연대회 활동가대회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완벽하지 않은 발음이지만 매우 진지한 태도로 성수동 사업을 설명했다. 일본인이 한국 사회 운동 중에서도 비주류 영역인 노동건강 분야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퍽이나 신선했다.

그 뒤 이곳 저곳을 뒤져 그에 대한 정보를 모았더랬다. 그가 보건의료노조 간부로 일하는 부인을 대신해 거의 육아를 전담하다시피 하는 보기 드문 남성이란 사실도 알았고, 우리 민중가요에도 관심이 많은 최초의 외국인 ‘꽃사람(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멤버라는 사실도 알았다.

- 부인께 들어보니 노래를 무척 잘 하신다면서요.
“아니에요. 제 아내가 보는 눈이 너무 낮아서(웃음). 한국스미다 노동자들이 일본에 원정 투쟁 하러 와서 스미다 본사 앞에서 항의 투쟁 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만 부르더라고요. 노래가 있는 투쟁이라는 걸 처음 봤거든요. 그때 스미다노조를 통해서 많은 노동가요를 배웠어요. 노래가 노동 운동에 용기를 준다는 점, 다시 말해 노동운동 안에서 살아 있는 노래라는 점이 너무 좋아요.”

- 한국에서 생활한 지 8년째인데,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체류 자격 비자 문제를 이야기해요. 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여성하고 결혼한 외국인 남성은 동거 비자 대상이 아니었어요. 보통 여성이 남성을 따라 간다고 생각하니까요. 동거비자가 발급된 것이 90년대 중반 이후였지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여성이 동거비자를 신청하면 1년 정도는 무조건 발급해 줘요. 반면 외국인 남성이 동거비자 신청하면 체류 기간을 3~6개월 정도밖에 안 주거든요. 그런 남성 중심적 행정 처리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죠.”

내친 김에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답한다. “일본에 가도 할 일이 없어요.” 정말 그가 고국에서 할 일이 없진 않다. 다만 성수동의 마찌꼬바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현장 사진을 찍고, 야근이 끝나서야 가까스로 모일 수 있는 영세노동자들을 위해 정성껏 체크 리스트를 만들고, 유기용제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연 1회 정기건강검진도 제대로 못 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특수건강검진을 실시하는, 남들이 가지 않는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 한국에서 영세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성수동 사업을 자신이 갈 길이라고 믿고 뚜벅뚜벅 걷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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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정기간행물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드는 참여사회>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2004/11/01 오후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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