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가 “아버님, 그렇게 찡그리시지 말고 환하게 웃으세요”라고 말하자, 카메라 앞에 선 이덕영(63·가명)씨가 얼굴을 환하게 웃었다. 군데군데 빠진 치아가, 그가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노숙생활의 고단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5년 전 사업을 부도내고, 서울역 쪽으로 밀려왔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살 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두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가 모두 살아 있지만 연락을 아예 끊고 산다고 쓸쓸히 말했다. 그는 “동상 때문에 왼쪽 발가락을 모두 잘라냈는데, 언제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며 동지팥죽을 공짜로 주는 천막으로 향했다.
21일 서울 중구 서울역 앞 광장에서 열린 ‘2004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에서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인의협)와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노실사) 등 노숙 관련 시민단체들이 노숙자들에게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2001년부터 동지 때마다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노숙자, 시민단체 관계자, 자원봉사자 등 300여명이 모여, 동지팥죽을 나눠먹으며 쪽방체험, 종이박스집 짓기 등의 다양한 행사를 펼쳐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인의협 ·시민단체 ‘노숙인 추모제’
영정사진찍기등 다양한 행사 펼쳐
문헌준 노실사 대표는 “겨울철에 서울역 지하도에 나가보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아는 얼굴이 하나씩 줄어든다”며 “해마다 노숙자들이 300명씩 죽어나가는데 정부에는 이와 관련된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실제, 서울시는 1999년부터 올해까지 ‘노숙자 쉼터 입소 사망자’를 65명이라고 밝혔지만, 행사장에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숨진 노숙자 영정 67개가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주최 쪽에서는 “그나마 우리가 사진을 구할 수 있는 사람만 해도 이 정도”라고 말했다.
주영수 한림대 산업의학과 교수팀이 작성한 ‘2004 노숙자들의 건강실태와 해결방안’을 보면, 거리에서 버려진 노숙자들의 고단한 삶이 잘 드러난다. 인구 10만명당 남성 노숙자의 사망률은 952.7명으로 보통사람 평균보다 1.64배나 높았고, 35~39살 사이의 사망률은 4.81배나 많았다. 사망 원인도 일반인과 같은 위암·간암 등 암 종류가 아니라, 외부 사고로 인한 ‘손상’(34.1%)과 간장질환(13.4%) 등이 1·2위를 기록했다. 주 교수는 “노숙자들이 각종 안전사고와 알코올 중독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노숙자의 절대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나마 있는 ‘노숙자 쉼터’ 수를 계속 줄이고 있다. 보건복지부 자료를 보면, 전국 노숙자는 2000년 5830명에서 현재 4415명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노숙인 쉼터도 2000년 154개에서 올해는 그 수가 111개로 줄었다. 특히 서울에서 감소 폭이 커 2001년까지만 해도 106개였던 쉼터가 올해 12월 현재 64개로 줄어 들었다.
노숙자들은 쉼터를 벗어나 밖을 맴돌고 있다.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지난 8월 발표한 ‘2004 거리 노숙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날씨가 추워 동상 위험이 있는 겨울에도 쉼터를 찾는 사람들은 전체의 6.1%밖에 안 됐고, 그대로 노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42.7%나 됐다. 나머지는 쪽방, 여인숙, 사우나, 만화방 등에 ‘거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팥죽을 다 먹은 노숙자들은 이날 오후 6시부터 삼삼오오 모여 먼저 숨진 동료들의 영정 앞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노숙자 임장수(56·가명)씨는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서울역 광장을 한바퀴 돌며, “올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떨궜다.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