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폐허 위엔 절망과 한숨만 남아
[뉴스메이커 2005-01-14 16:12]
남아시아 지진재해지역 의료지원을 위해 파견된 국제보건의료발전재단 소속 황정연 의료지원단장(국립의료원 응급의학과장)이 피해가 가장 큰 스리랑카 북동부 킬리노치치(Killinochchi) 지역 의료지원활동 체험기를 ‘뉴스메이커’에 보내왔다. 황 단장은 자연재해 앞에서 나약하기만 한 인간의 문명을 특히 강조했다. [편집자 주]
도시가 사라지고 없었다. 부서진 건물, 뒤엉킨 철길, 무너진 나무에 끼어 널브러진 트럭…. 해일이 한순간에 할퀴고 간 도시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살아 있는 자들의 깊은 상처와 절망만 있을 뿐. 싸늘한 어린아이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넋을 잃은 아버지, 상처투성이 젖먹이를 끌어안고 비통해 하는 어머니.
시신 확인 포기하고 화장
우리 지원단 일행이 지난 1월 2일 오후 늦게 40여개의 난민수용소가 모여 있는 스리랑카 동북부지역 킬리노치치에 도착하면서 본 것은 자연의 공포였고 들은 것은 산 자의 통곡이었다. 그것은 도시의 비명이었다.
이곳 킬리노치치는 평상시에도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벌어지던 곳이다. 따라서 출입 자체가 자유롭지 못해 어느 지원단체도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UN산하의 지원단체 하나가 상주하고 있지만 이번 쓰나미와는 무관하다. 사실상 복구지원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지역이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절망의 현장’을 목격하니 지원캠프까지 오기까지 겪었던 갖은 고생을 돌이킬 여유도 없었다. 신변안전 등 헤아릴 수 없던 어려움은 과거의 일이었다. 시급했다. 서둘러 질병관리본부 회의를 열어 난민수용소를 중심으로 진료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급한대로 킬리노치치 지역 내 병원에 진료캠프를 마련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어느새 어둠이 몰려왔다. 어둠은 흉물을 삼켰다. 절망을 숨겼다. 하지만 어둠이 어둠을 극복할 수는 없는 법.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빛이었다. 진료소에 불이 켜졌다. 밤 10시였다.
루터 킹 목사의 말처럼 절망을 이기는 것은 사랑이었다. 작은 사랑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한숨 돌린 진료단이 깊은 잠에 들었을 즈음 캠프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한 남자(모하마드 핫신-24)를 업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진료캠프가 만들어진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상처는 깊었다. 고름이 흘러내렸다. 의료진 3명을 투입, 상처를 봉합하고 염증을 가라앉히는 주사를 놓았다. 항생제 등 사흘분 의약품을 줬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몸짓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이방인에 대한 낯가림도 없었다. 순식간에 어린아이, 노약자들이 진료대 앞에 길게 늘어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씩 웃음소리도 들렸다. 이 웃음은 세상의 관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아닐까.
“배아프다” “가렵다” “피가 난다” “눈이 아프다”…. 그들의 통증 호소는 도움의 갈망이었다. 유나뿌니(53-여)는 나의 손을 잡고 꽤 오래 울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서 “제발 오랫동안 있어줄 수 없느냐”고 하소연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의 인사 한마디에 가슴은 먹먹했다. 비록 고생이 되고 힘들어도 이곳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밝자 시신 수습작업과 피해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중장비로 건물 잔해를 들어 올릴 때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많은 시체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구역의 건물 밑에선 60여구의 시신이 발굴됐다. 임신 8~9개월 되어 보이는 여인도 죽은 채 발견됐다. 한 젊은 여인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건물 잔해 속으로 뛰어들어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놀라움과 슬픔의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온다. 한마디로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시신의 주인을 찾는 작업은 이미 포기한 상태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것도 이유지만 더 시급한 것은 전염병 예방이기 때문이다. 발굴된 시신은 곧 바닷가에서 집단 화장했다. 주민들은 슬픔에 더 큰 슬픔을 태우고 있었다. 산처럼 쌓인 주검 속에 사랑하는 가족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채…. 저절로 눈이 감겼다. 기도를 했다. “하얀 연기 속으로 피어오른 영혼이여, 영면하소서.”
터전 잃고서도 피해주민에 헌신
주민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고 한 시간이라도 빨리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환자들은 타박상 환자와 호흡기 질환이 많았다. 파도에 밀리면서 부딪치거나 모래나 진흙을 먹어 생긴 질환이다. 식사 시간이 따로 없었다. 텐트 뒤에 숨어서 한국에서 가져간 컵라면이나 즉석밥을 허겁지겁 먹어야 했다.
4일에는 진료캠프에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다섯살 난 아들 요가를 잃고 비통에 빠져 있던 어부 쿠마리(29)가 피해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돈드라 이재민 캠프에서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쿠마리는 해일이 지나간 뒤 “요가는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면서 난민캠프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체념하던 터였다. 기적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이재민 캠프에 잠깐이지만 환호성이 터졌다. 쿠마리는 이재민들에게 “신이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면서 아들을 품에 꼭 껴안고 캠프를 떠났다.
이날 오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116㎞ 떨어진 해변지역 골(Galle)에서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가슴 아프고 찡한 소식이었다. 이곳에서 3년째 숙박과 관광사업을 하던 박정호씨(52)가 이번 쓰나미로 인해 그동안 밤잠을 설치며 이룬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잃었다고 했다. 그가 갖고 있던 건물은 완전히 파손됐고 관광사업에 사용하던 유람선, 스킨스쿠버 등 레저장비 등이 모두 사라졌다. 박씨는 “희망과 기대를 품고 찾아온 이곳에서 이처럼 큰 재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며 낙담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유일한 가족인 부인과 종업원들이 모두 무사한 것을 위안 삼으며 골에서 멀지 않은 마타라(Matara) 지역에 설치된 서울대 의료지원단에 합류, 피해주민을 돕는데 몸을 던지고 있었다.
6000여명의 이재민이 수용되어 있는 마타라 이재민 캠프엔 코리안 드림을 이룬 길리야뜨(30)가 이재민 자원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 2년반 동안의 한국생활을 마감하고 6개월 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찾아가고 있었으나 이번 해일이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그의 희망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 질환자와 설사환자가 많아졌다. 상하수도 시설 등이 거의 모두 파괴됐고 도로가 복구가 늦어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전염병의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해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지낸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이런 자연재앙이 인류에게 주는 경고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스리랑카 | 황정연[국제보건의료발전재단 의료지원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