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사랑의 리퀘스트’ 없어도 암치료 하는 ‘꿈’

사랑의 리퀘스트’ 없어도 암치료 하는 ‘꿈’

김양중 기자가 보내는 편지
“건보 여유분을 국민에게”

상욱아! 요새 장인 어른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무척 힘들지? 벚꽃이 피었다가 어느덧 지는데, 짧은 봄날을 느낄 틈도 없었겠다. 그나마 장인이 항암제 치료에 반응해 상태가 좋아지신다니 얼마나 다행이냐. 담당 주치의랑 통화했는데, 암 덩어리 크기가 좀 더 작아지면 수술을 하겠다고 하더라. 작아진 덩어리만 떼어내니깐 그리 어려운 수술은 아니래. 대장암 환자의 항문 기능도 살릴 수 있다고 하니 정말 불행 중 다행 아니냐.

그런데, 치료비는 어떻게 마련이 됐니? 수술까지 받으려면 올 한 해만 돈 천만원은 족히 들텐데. 형제들끼리 조금씩 나눠낸다 해도, 둘째까지 봐서 가뜩이나 쪼들리는 네 형편에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사실, 신문사에서 일하다보니 가족 암 치료비에 전세값 빼서 길에 나앉거나 퇴직금을 미리 빼서 쓰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우리나라 사망자 4명 가운데 1명이 암으로 숨질 정도일만큼 암환자도 많고 그 가족도 많으니, 그나마 네 처지가 외롭진 않겠다.

웃으라고 한 얘기다. 힘들 땐 웃음이 힘이 된다고 하지 않니.

암 걸려 가족이 거리에 나앉는 우리 현실…민간보험은 이중부담

주변에서 암에 걸려 병원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그래도 의사면허 있다고 내게 꼭 한 번씩은 연락을 한단다. 너도 그 중에 한 명이긴 하지만, 정말 얼마나 부담되는 줄 아니? 너도 잘 알다시피 내가 뭐 해 줄 것이 없잖니. 의사면허 가진 정도의 지식으로 해당 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게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지, 뭐.

그렇게 연락 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정말 암에 대해서는 뭔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사망자의 25%가 암 때문에 죽는다고 하고, 그 수도 한 해 6만 4천여명에 이른대. 노인 인구가 크게 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앞으로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될텐데 말야. 가족 중에 누군가 암에 걸리면 살림 거덜난다는 두려움 때문에 형편되는 사람들은 민간 암보험이라도 든다지만, 정작 치료비 댈 능력 안 되는 사람들은 그림의 떡이지.

멀쩡히 국민건강보험 들어 있으면서 민간보험까지 이중으로 돈 들이는 사정도 딱하긴 마찬가지 같아. 건강보험이라는 게 암처럼 생명을 위협하면서 돈도 많이 드는 질병에 쓰라고 있는 건데 말이야. 그렇게 못 하는 건 건강보험 재정이 부족해서 그러는데, 그 이유가 우리나라는 국가나 공공이 부담하는 비율이 너무 낮아서 그래. 경제개발협력기구 국가들의 공공부담율이 평균 73%대인데, 우리는 겨우 53% 정도 되거든. 게다가 우리나라 국민들이 내는 한 해 민간 암보험 규모가 3조원 이상이라는 조사결과도 있단다. 실감이 나니? 국민건강보험이 18조원 정도니까, 암 하나만으로 따로 17%를 더 부담하는 셈이지.

연말이면 보험재정 1조3천억 여유…국민 부담 암치료비와 일치

△ 지난 2003년 글리벡 제조사인 노바티스 앞에서 백혈병 환자들. 글리벡 약값을 내리고 보험을 적용받기까지 이들은 제약사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정용 기자lee312@hani.co.kr

암 진료비가 많이 드는 사정이야 뻔하지. 수술비와 값싼 치료제는 건강보험이 되는데, 값은 좀 비싸지만 치료효과가 좋은 약은 보험이 안 되거든. 보험재정이 모자라니까 이것저것 다 보험으로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건데. 당장 목숨이 걸려 있고 엄청난 고통까지 따르는 병이 암인데, 누군들 좋은 약 쓰고 싶지 않겠니. 그렇다면 자기 돈 더 안 내고 건강보험으로만 암 치료를 받으려면 보험료를 올리는 수밖에 없을까.

대부분 그렇게 생각해왔지. 몇해 전 건강보험 재정 거덜났다고 난리치던 일을 떠올리면 암 걸리고 보험이 알아서 해주길 기대하는 건 꿈도 못 꿀 일 같기도 하지 않니? 그런데 말야. 세상에 꿈도 못 꿀 일은 없는가 봐. 얼마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재정 추계를 보니까 지금 내는 보험료 수준으로도 암 진료비를 전액 대줄 수 있을 만큼의 보험재정이 연말까지 만들어진다는 거야. 오늘 너의 전화를 받고 다른 사람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맘이 한결 편한 것도 이 때문이야.

전문가들 예상으로는 올해 연말까지 약 1조3천억원이 건강보험공단에 남을 거래. 그런데 2003년 자료를 보면 암치료에 건보공단이 내는 돈이 한 해 8100억원 정도이고, 환자가 내는 돈은 보험급여가 안 되는 것까지 모두 합쳐 8000억원 정도로 드는 걸로 나와 있어. 그동안 통계를 살펴보면 해마다 16~20% 정도 암 치료비가 늘어나는 걸 감안하면 올해는 1조2천억~1조3천억원 정도 국민이 부담하게 된다는 거야.

수학이 많이 나와서 좀 어렵겠지만, 올해 연말에 남을 것으로 보이는 재정과 올해 암 치료비에 국민들이 내야 하는 돈이 신기하게도 거의 맞아떨어져. 그래서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과 건강세상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가 올해 남는 건강보험 재정으로 국민들이 내는 암 치료비를 해결해주자고 나섰어. 정말 깜짝 놀랄 소식이지?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이 돈을 암 치료에 쓰겠다고 합의하면 민간 암 보험에 따로 돈을 들일 필요도 없고, 저소득층이라도 암 치료하다 길거리에 나앉을 일도 없을 거야.

사회적 합의의 원칙은 ‘국민이 낸 보험료 국민에게로’

하지만 재원만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일단 정부는 연말에 남은 1조3천억원을 암 치료비로만 쓸지는 망설이는 눈치야. 보건복지부는 사회적 형평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 암뿐 아니라 뇌졸중, 심혈관질환 같은 중증 고액 질환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대. 본인부담상한제라는 어려운 개념과 보험 급여 범위를 넓히는 계획을 세우는 중이라고 해. 암의 경우에는 상급 병실 입원료 등과 같은 부분은 제외하고 현재 보험 급여가 안 되는 비보험 치료를 포함해서 치료에 사용되는 직접 비용에 혜택을 주는 방법을 찾겠다는군.

물론 이렇게 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하지만 사회적 합의까지 가려면 넘어야 할 장애물도 많단다. 생각해봐. 민간 암보험사들이 가만 있겠니? 의료인들도 보험료 남으면 이들이 받는 보험수가 올려달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으니깐. 그래도 국민들이 열심히 보험료 납부한 결과니까 국민을 위해 쓰는 게 당연하다는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될 거야.

아무튼 방금 이야기한 것이 꿈같은 이야기는 아니니깐 관심가지고 같이 지켜보자. 이제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방송 프로그램 보다 눈물 훔치면서 전화기 ARS 단추 누르는 일도 사라질지 몰라. ‘꿈(★)은 이루어진다’. 월드컵 이야기만은 아닐 거야.

그럼 간병하다가 쓰러지지 말고, 직장에서 졸다가 쫓겨 나지 말고 잘 다녀라, 알았지? 수술 잘 되면 삼겹살에 소주나 한 잔 같이 하자. 또 연락하자!

<한겨레> 사회부 김양중 기자himtrain@hani.co.kr